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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자연씨. 사진은 <꽃보다 남자>의 한 장면.
 고 장자연씨. 사진은 <꽃보다 남자>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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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여배우가 죽음을 택했고 그 죽음에 대한 말들이 가득하다. 연예가 생리가 그렇듯, 루머는 진실이 되고 진실은 루머가 된다. 모든 이가 피해자를 자처하고 있고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같이 억울한 사람들뿐이며 억울함을 풀 길이 없어 환장하겠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참으로 애처롭게 바라보는 망자의 영정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이 사건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경찰이 입수했다는, 아니 지금은 그 바닥에 있는 업계인사들이나 눈치 빠른 기자들은 다 알고 있다는 그 문건의 등장인물들이 누구인지 곧 의혹과 진실의 경계쯤에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등장인물 모두 부인할 것이고, 수사는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즈음에 엄숙한 표정으로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는 일군의 언론들과 '이 무심한 법치의 시대에 법과 제도를 다시 한 번 정비하자'는 국회의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는 뒤돌아서 다들 한마디 할 것이다.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지 뭐."

문제는 누구도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성상납과 접대라는 뜨끈한 주제여서 뭔가 한 건 하려는 듯 눈독을 들이는 것이, 제도정비와 규제강화를 외치는 것이, 그 지긋지긋한 법치를 들먹일 호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어디 경찰과 언론, 국회의원, 사건 관련자들뿐일까. 결국 죽은 사람을 더욱 억울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한국 사회 풍토다. 거기엔 나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속함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천국 문보다 조금 넓은, 톱스타로 가는 문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는 탤런트 장자연씨의 기획사 대표 김아무개씨가 17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은 100% (유모씨의 ) 자작극"이라며 "조만간 귀국해 수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는 탤런트 장자연씨의 기획사 대표 김아무개씨가 17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은 100% (유모씨의 ) 자작극"이라며 "조만간 귀국해 수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 iMBC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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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문제의 본질은 분명하며 고질적이고 단순하다. 신인배우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못할 일만 빼고 다 할 것이라는 걸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연예기획사와 배우, 둘 중 누가 갑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신인배우들은 심지어 을도 아니고 병이나 정일 경우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신인배우들이 기획사 사장이든 누구한테든 그런 돼먹지 못한 강요를 받았을 때 별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이 돼야 마땅하다.

그럼 이런 잔혹한 '현실'은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답은 쉽다. 넘치는 연예인 지망생에 비해 그들이 소망하는 배우의 길로 들어서는 문이 천국으로 가는 문보다 아주 조금 넓기 때문이다.

배우 지망생이 늘고, 따라서 그들을 훈련시키거나 매니지먼트 하는 회사들이 늘어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들이 활동할 최종적인 공간 혹은 시장이 형성돼 있지 못한 이 현실이 일차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가 어찌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드라마 편수나 영화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니지먼트 회사를 줄이는 것은 도움이 될까? 그것도 아니다 싶다. 한 국회의원이 발의한 대로, 연예매니지먼트에 라이선스를 도입해 최소한의 양식을 갖춘 사람들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규제하자는 것도 난센스다. 도대체 어떤 시험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할 것이며 시험을 봐 합격한 사람만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성상납 등의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표준계약서'만 있으면 다 해결될까?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한 것과 같이 '표준약관'을 만들어 연예인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것도 그다지 효용성이 없을 것 같다. 표준계약서는 이미 1990년대 이전부터 존재했다. 단지 계약서 하나로 신인배우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

일각에선 '캐스팅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관계자들의 도덕을 강화하거나, 안 된다면 캐스팅 과정을 법제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제작자나 연출가를 성상납 요구자로 볼 수는 없다. 혹 제작자나 연출가가 캐스팅과 관련해 누군가에게 검사나 확인을 받고 경우에 따라 설명을 해야 한다면, 이건 제작권과 연출권의 심각한 침해다. 나아가 창작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이 문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해야 한다. 첫 번째는 신인배우들, 절대적 약자인 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성상납이든 술자리 접대든 강요와 강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장해 줄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두 번째는 배우라는 존재와 제작사, 즉 매니지먼트를 포함한 제작 주체들 간 힘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 둘이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공정하고 올바른 파트너십을 갖추게 된다면 오늘 우리의 고민은 거의 완벽하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확실하며 현실적인 방법은 이미 조직되어 있는 연예인노조를 적극적으로 확대, 활용하는 것이 대안이며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 불공정하거나 불합리한 거래, 음성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면 즉각 SAG(전미 배우조합)가 개입해 해당 기획사, 영화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또 배우들은 부당한 요구를 받을 시, 이를 즉각 조합에 알리고 법적인 조치를 강구하거나 전체 배우들의 도움 지지를 얻어 요구의 철회와 사과, 심지어는 배상까지 받아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우-제작사 등 제작주체들 간 '힘의 균형' 필요

배우 고 장자연의 전 매니저였던 유장호 호야스포테인먼트대표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컨벤션센터(하림각)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배우 고 장자연의 전 매니저였던 유장호 호야스포테인먼트대표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컨벤션센터(하림각)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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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는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한예조)이 존재한다. 이들은 지난해 드라마 <이산> 촬영 당시 단역배우들의 처우문제 등을 공론화해 파업을 진행하면서 배우들의 권익을 도모했다. 또 이번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단체가 중심이 돼 신인배우들의 인권과 권리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제작주체들은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제작사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연예인들과 공정한 파트너십을 형성한다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법이나 제도로 제작권과 연출권을 침범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현실도 미래도 바뀐다. 지금은 이번 일이 음모라거나, 내 이름이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거나 등의 말 따위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또 연예계 생리도 모르면서 표준계약서니, 기획사 라이선스니 하는 삽질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울러 성상납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일부이거나 아니면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구시렁거리는 제작주체들의 앓는 소리도, 신인배우들에겐 언제나 위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제작주체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설득력이 없다.

한 신인여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변화를 던져줄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만들 것인지, 그 선택은 언제나 그렇듯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제발, 이젠 좀 바뀔 때도 됐다.    

덧붙이는 글 | 탁현민 기자는 현재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태그:#장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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