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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일(1월 10일)

히말라야 발자국

09 : 00   도레이(DOLE, 4110m) 

11 : 00   포르체(PHORTHE, 3800m)  

14 : 00   팡보체(PANGBOCHE, 3989m)

             * 무명의 롯지에서

 

셋 중 하나는 소원을 들어주겠지?

 

아침으로 삶은 계란(boiled egg)를 시켜먹고 포르체를 거쳐 팡보체까지 가기로 하였다. 포르체 마을의 입구에 도착하니 11시였다. 포르체 뿐 아니라 히말라야에서 방문하는 대부분 마을 입구에는 하얀 스투파가 문지기처럼 버티고 있었다. 스투파(stupa)는 산스크리트어로 '탑(불탑)'을 의미한다. 꼭 우리의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과 솟대를 상상하게 한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눈망울이 툭 튀어나와 있고, 뭉툭한 코에 입을 헤벌리고 있는 장승은 마을 초입에서 악귀를 물리쳐주는 수문장이다. 하늘과 땅, 물을 골고루 다니는 오리를 긴 장대 위에 올려 놓은 모양인 솟대! 하늘과 땅을 다니는 오리처럼 솟대는 하늘과 땅, 즉 신과 인간을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1년에 300개씩이나 되는 알을 낳는 오리를 통해 마을의 물질적 풍요를 기원한다. 이밖에도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돌무덤 모양의 서낭당, 뒷산의 산신, 집을 다스리는 성주신, 부엌의 조왕신, 변소의 측신, 두꺼비와 구렁이 등 집안 살림을 늘어나게 하고 복을 가져다주는 업신 등 우리 조상들은 종교와 삶이 매우 밀착된 형태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네팔에서 마주한 스투파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종교성을 확인한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새벽 일찍 집을 나선다. 삶의 고단함에 허리가 활처럼 굽은 할머니는 지팡이에 늙은 몸을 의지한 채 마을을 수호하는 당산 나무로 간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쭈글쭈글 세월의 풍파가 주름으로 화석화된 늙은 손을 가지런히 바로 모아 기도한다. 그리고 뒷산으로 걸음을 옮겨 작은 사찰에 올라간 후,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절을 올린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언덕 위에 위치한 예배당(교회)에 들려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그래도 무엇이 불안한지 중얼거린다.

 

'셋 중에 하나는 꼭 소원을 들어주겠지.'

 

할머니의 소원은 이루어질까? 아니면 잠을 청하는 할머니의 마음에 안식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유쾌한 상상을 한다. 우리 아파트 앞에도 무서우면서도 해학적으로 생긴 장승 하나 세워놓으면 어떨까?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쌓인 온갖 스트레스와 욕심, 거짓된 마음을 버리라고 호통을 치는 상징물 말이다.

 

예전에는 궁궐에 들어가는 문 앞에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세워놓았다. 신하들이 궁에 들어갈 때 해태에 이르면 말에서 내리고 옷매무새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였다. 청렴결백하지 못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뿔로 들이받는 동물이 해태기 때문이다. 아파트 입구에 장승, 혹은 해태 하나 세워놓으면 어떨까?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박수를 받을까? 아니면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외면당할까?

 

포르체는 꽤 규모도 크고, 호(戶) 수도 많은 마을이었다. 특히, 트레킹 초기에 몽라에서 보았던 포르체와 타보체의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이 머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오늘 목표 지점인 팡보체까지 2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여, 중식을 팡보체에서 해결하기로 하였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산허리길이 길게 늘어지는데, 손에 잡힐 듯 팡보체가 가까이 아른거렸다. 멀리 보이는 에베레스트와 아마다블람의 모습이 칼라파타르로 향하는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한다.

 

 

 

 

하지만 바로 손에 닿을 것 같았던 팡보체는 먼 곳에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이다. 마음의 길과 세상의 길이 다르구나. 팡보체에 도착한 것이 2시! 무려 포르체에서 3시간 소요된 여정이었다. 더구나 1시가 넘으면서 구름이 갑자기 피어올라 주위의 시야가 꽉 막힌 상태에서 걸었기 때문에 그 지루함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제부터 오후만 되면 어디선가 나타난 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아침에는 파란 하늘을 보자마자 모두들 'Perfect weather!' 환호하며 출발하지만, 오후 1~3시 정도를 기점으로 대기가 순식간에 흐려진다.

 

원래 계획은 팡보체에서 오늘 숙박을 하는 것이었으나 시간도 어정쩡하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 2시간 거리에 있는 페리체까지 가기로 하였다. 팡보체에서 중식은 간단히 삶은 감자로 시켜 먹기로 하고, 나란에게 먼저 가 주문을 해 놓으라고 부탁했다.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양 세 마리

 

 

팡보체에 거의 다다를 쯤, 산길을 가로막는 양 가족 세 녀석을 보았다. 어미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새끼 두 마리가 가고 있었다. 좁고 위험한 길에서 새끼 한마리가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장면에 깜짝 깜짝 놀란다. 그들은 서로 '관계'하고 있었다.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 단절이 생겼을 경우, 그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처절한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는 결국 두 갈래 비상구 앞에 선다.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치열한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유를 찾아 나설 것인가? 하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다시 관계성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다.

 

문제는 '외로움'이다. 우리라는 관계 속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아야 한다. 관계의 주체는 올곧게 서 있는 나 자신인 것이다.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자유가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되어,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위한 내적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어떤 계획도, 지시도, 통제도 없이 주어진 자유를 두려워한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너무 무거워 주체할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등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유가 두렵다.

 

또한 자유에 내팽개쳐진 현실이 나를 외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누가 이 두려운 자유에 정답을 제시해 주면 편할텐데.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의 안락에 취하고 싶어 한다. 외부의 강한 힘과 제도, 즉 정치, 종교 등에 자유를 맡기고 그 대가로 안식을 얻는다. 이제 나는 항상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이 이끄는 큰 물줄기에 몸을 내맡기면 된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경계하며 두 가지 자유, 즉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제시한다. 소극적 자유는 나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해방의 자유이다. 즉,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이다. 적극적 자유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삶을 창조하고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에로의 자유(freedom to)'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의 전환를 요구한다.

 

(적극적인 자유를 가진 사람은) '그는 자기 자신을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또한 인생의 의미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 즉 그것은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자유를 지키고 누리려는 신념과 노력, 의지가 없다면 그는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권위와 제도, 타인에의 복종으로…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이다.

덧붙이는 글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네팔, #히말라야, #쿰부, #에베레스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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