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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 14일째, 그렇게도 기다리던 바라나시에 들어가다.
▲ 갠지스강이 있는 곳, 바라나시 인도여행 14일째, 그렇게도 기다리던 바라나시에 들어가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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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의 성스러운 어머니 갠지스 강

아침 7시 반, 드디어 힌두의 어머니 갠지스 강이 흐르는 성(聖)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이틀간 30시간에 육박하는 야간 열차와 라이브 로컬 버스로 기력이 쇠진한 우리는 릭샤 호객꾼을 쫓아 릭샤가 모여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왜소한 몸집의 릭샤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려고 시동을 걸고 또 걸어도 엔진은 헛바퀴만 돌았다. 릭샤꾼은 곧바로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들이 힘껏 릭샤를 앞으로 밀어주자 가까스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바라나시 기차역에 도착하다.
▲ 바라나시 기차역과 소 이른 새벽, 바라나시 기차역에 도착하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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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화장터 중심부 근처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영어를 못하던 그는 소통을 단절한 채 이상한 게스트하우스 이름만 반복해서 말했다. 가트(계단) 가까이는 릭샤 운행이 금지돼 있기 때문에, 최대한 릭샤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다음 릭샤에서 내렸다. 그런데 릭샤꾼은 릭샤를 길가에 팽개치고 또 그 숙소 이름만을 읊조리며 잰걸음으로 앞장서서 갔다. 우리가 "괜찮다. 그냥 가도 된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다"라고 양해를 구해도, 그는 대꾸 없이 눈짓으로 따라오라고만 했다. 우리는 뒤에서 쫓아가며 속앓이를 했다.

그를 따라가다 보니, 미리 우리가 묵으려고 점찍어 놓은 숙소의 이정표가 나왔다.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고 앞장서 걷기만 하는 그에게 우린 작별 인사도 없이 곧장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 라운지에 짐을 내려놓고 직원을 기다리는데, 그 릭샤꾼이 이곳까지 쫓아와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혹 잡범을 찾는 형사 같았다. 우리는 아쉬움과 적잖은 원망이 가득한 그의 얼굴과 마주치자마자 그 집요함에 소름이 돋았다. '우린 아무 죄도 저지른 거 없어요' 그의 머리가 문틈에서 빠져나간 후 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다 알지만, 이곳의 관행도 알지만, 어찌 감정이 이성만을 따르겠는가?  
             
트리플 룸을 잡아놓고 옥상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외출을 하려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날 밤기차에서 잠자리에 들며 등산화를 벗어 놓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기억이 났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잠에 골아졌는데, 아침에 일어나 침대 아래에 밀어 넣은 운동화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채 기차에서 내린 것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오면서도 뭔가 불편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발이 시리다 했는데. 바라나시 역에 가서 기차에 신발을 놓고 내렸다고 할 수도 없고, 대략 난감했다. 고가의 신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도에서는 보기 힘든 고어텍스 신발이었는데…. 적당한 가게가 보이면 신발을 사기로 마음 먹고 슬리퍼를 불량스럽게 끌며 밖으로 나왔다.

오밀조밀 얽힌 바라나시 골목에는 다른 도시보다 유독 소와 그들의 배설물이 많았다. 특히 사방에 소의 배설물이 널려 있었는데, 슬리퍼를 신고 거리를 지나가면 온갖 배설 지뢰를 밟을 위험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더 근심이 되는 것은 바로 슬리퍼의 구조였다. 인도 슬리퍼는 대부분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가로지르는 막대기 같은 기둥이 달려있는데, 구입하자마자 나는 그것이 너무 불편해 가위로 절단해 빼버렸다. 막대기를 뺀 자리에는 동그란 구멍 하나가 덩그러니 뚫려 있었고, 이제 슬리퍼 바닥의 구멍은 각종 동물들의 배설물이 출입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넓디 넓게, 끝없이 펼쳐진 갠지스강을 보며 온갖 피곤함과 시름이 사라졌다.
▲ 갠지스강 넓디 넓게, 끝없이 펼쳐진 갠지스강을 보며 온갖 피곤함과 시름이 사라졌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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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우리가 방문할 곳은 바라나시의 주요 화장터인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였다. 가트는 '강의 가장자리'라는 뜻으로, 3000년의 고도 바라나시에 흐르는 갠지스 강변을 따라 계단식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강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왕실과 귀족이 건설하여 소유한 것이었다. 네팔의 파슈파티나트 화장터를 방문한 기억이 있기에 바라나시 화장터의 방문은 크게 낯설지 않았다.

갠지스 강가에 있는 화장터에는 벌써 수 구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었다. 우리 셋은 화장터 가트 위에 나란히 서서 육신이라는 이름의 헌 옷을 태우는 모습을 어떤 감정도 없이 지켜보았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시신을 순식간에 삼켰다. 꽃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시신이 계속 들것에 실려 왔다. 시신은 먼저 갠지스 강물로 들어가 성스러운 어머니의 품에 말없이 안겨 이승에서의 마지막 씻김 의식을 하였다. 한 평생 얼마나 많은 사연이 저 육신에 담겨 있을 것인가? 기쁨, 슬픔, 열광, 아픔, 환희, 좌절 등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수 많은 삶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 바라나시의 메인 화장터인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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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떠나는 몸, 모두 깨끗이 버리고 가시옵소서. 떠날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고 모두 놓고 가시옵소서. 유유히 흐르는 갠지스 강물처럼 그렇게 떠나십시오. 다 토해 놓고 가면 됩니다. 꼿꼿이 세우고 다녔던 두 어깨 이제 축 떨어뜨려도 됩니다. 이젠 옳고 그름도, 아름다움과 추함도 판단하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편안히 웃음 짓고 가면 그만입니다. 한평생 신명 나게 놀고 간다고 생각하십시오. 내 눈에 고인 이 눈물은 이별의 눈물이 아니라 당신이 살았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추억하는 눈물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라는 자아 의식이 생기고 세상을 보는 작은 창이 열리며 누구보다 멋들어진 '나의 삶'을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껍데기를 벗고 멋진 새가 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날개짓을 했겠죠? 퍼득퍼득~ 바둥바둥~ 세상 한 가운데에서 모든 이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주인공의 삶의 꿈꾸었을 나! 그리고 그대들! 하지만 나에게 등 돌린 세상, 그들과 섞이지 못하고 고립된 '나'와 자주 마주했을 것입니다.

나 또한 기대만큼 삶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외면당하고 버림당해도 '나'는 버텼습니다. 그것이 자존심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존재 가치였습니다. 집으로 오는 어두컴컴한 길에 '외로움'이 덮일 때에도 그런 '나'를 사랑했습니다.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며 나는 세상의 '규격'에 맞게 나를 '조물'했고, '포장'했습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멋있다, 훌륭하다, 대단하다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의 존재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질문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바쁘게 살아왔고, 그들에게 정답과 같은 삶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있는데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한 뭔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장작 위에 놓인 그대를 봅니다. 뜨겁지요? 외롭지요? 아프지요? 하지만 나는 평화롭습니다. 장작 위에 누인 당신의 모습이 너무 평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지도 못하고, 말도 없겠지만 그래도 좋습니다. 당신의 야윈 몸이, 얼굴의 구석구석을 가로지르고 있는 깊은 주름이, 하얗게 덮인 머리카락이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답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깰까 두려워 나도 함께 살며시 장작 위에 눕습니다. 당신의 육신이 탈 때, 나 또한 '나'를 태웁니다. 이곳을 떠날 때는 당신처럼 작은 재만 손에 쥐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버리라면 버리겠습니다.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수한 '나'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조물하고 포장한 '나'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기부

한쪽에서는 산 자들이 몸을 씻고, 그 너머에선 사자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 삶과 죽음의 양면성 한쪽에서는 산 자들이 몸을 씻고, 그 너머에선 사자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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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터에서 넋 놓고 상념에 젖어 있을 때, 화장터 가이드로 보이는 한 인도인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는 화장터 방문을 환영한다며 저 뒤에 보이는 건물 2층에 가면 '신성한 불(Holy fire)'이 있고, 화장터 전체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고 했다. 장호의 만류에도 그를 따라 건물로 올라갔다. 콘크리트 건물 2층에는 그의 말대로 '신성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5000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다는 신성한 불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을 올렸다. 그는 신성한 불에서 나온 재를 손에 묻히더니 우리의 이마에 찍어 주었다. 우리는 엄숙한 종교 행사를 치르는 듯 마음과 자세를 경건히 하고 이 성스러운 의식에 참여했다.

신성한 불의 재를 이마에 묻히고 우리는 그와 함께 화장되는 시신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그는 우리에게 힌두교와 인도의 화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화장 비용은 장작값과 불씨값을 합한 것인데 부자와 가난한 집안에 따라 나무의 차이가 크며, 여기 보이는 장작 더미가 높은 것은 부자의 화장이라고 했다.

시신이 모두 타는 데는 보통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또한 화장터 위에 있는 저 건물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호스피스 건물이라고 했다. 물론 그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낮은 톤으로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서 갠지스 강 화장터에 깃든 힌두의 무게와 생사의 의미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의 엄숙한 나레이션은 '기부'로 마무리되었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알면서도 또 당했네'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며, 그중에는 한국인과 일본인도 있다고 했다.

"(묵직한 음성으로) 저 호스피스 건물 안에는 두 명의 한국인과, 한 명의 일본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에 쓸 나무를 구하지 못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요. 당신들이 기부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그들을 위한 기부를 해 준다면 크나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네이션(donation, 기부)'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이 가이드의 모든 시나리오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단호히 그의 제안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종교 의식을 집전하던 성스러운 사제의 모습을 간데없고 시정 잡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으로 나의 팔을 잡아당기며 경찰서로 가자고 협박하기도 하고, 인도말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다. 난 주위 사람들이 듣도록 "난 당신에게 설명을 요구한 적이 없다. 당신이 원해서 해 준 것인데, 내가 왜 돈을 지불해야 하는가?"라고 목청을 높였다.

'괘씸한 녀석, 우리는 이미 인도 여행을 통해 이런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터득했다고.'

우리가 더 강한 톤으로 거절하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나에게 친절히 다가오는 대부분의 인도인은 '호객', '사기', '거짓말', '공갈·협박'의 사람들이었다. 인도인의 친절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외국 관광객이 당해야 하는 힌두의 쳇바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일본인 부인과 인도인 남편이 운영하는 메구 식당에서 새우 덮밥을 먹었다. 아, 오랜만에 맛깔 나는 음식을 먹으니 신발을 잃어버린 찜찜함조차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많은 가이드북에서는 바라나시의 여행 일정을 추천해 주지 않았다. 바라나시는 계획도, 세부 여행 일정도 필요하지 않는 곳이었다. 갠지스 강가의 가트를 따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벗 삼아 거닐면 그것이 바라나시 여행의 전부였다.

다샤스와메드 가트(메인 가트)에 가니 매일 저녁 6시 힌두교 의식인 '푸자'가 열린다고 했다. 우리는 가트에 나란히 앉아 멍하니 갠지스 강을 응시했다. 갠지스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는 현지인의 종교적 경건함과 해석 불가한 신비한 힘을 느끼며, 정말 갠지스에서 멍 때리다 미칠지도 모른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들의 표정 속에는 신성한 곳을 찾은 영광과 마음의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에 들어가고 나왔다.
▲ 갠지스 강가의 사람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강에 들어가고 나왔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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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이 가트를 거닐다 다시 '도네이션'을 만났던 메인 화장터까지 가게 되었다. 화장터에서의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다. 아주 상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가족들은 사자(死者)를 떠나보내는 큰 슬픔의 의식을 치르고 있는데,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단순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장면을 간직하려는 값싼 의도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셔터에 손을 대고 말았다. 화장터 바로 위에 있을 때는 주위의 수많은 시선 때문에, 그리고 아주 상식적인 이유 때문에 사진기를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가트 옆에서 먼 발치로 보이는 화장터를 보자마다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후다닥 화장터 사진을 찍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갠지스 강을 태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 다가 왔으니, 바로 아침의 그 '도네이션'이었다.

그는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경찰서에 가야 한다며 수갑으로 손을 결박하는 시늉을 하였다. 아침과 똑같이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지했다. "알았다. 그럼 당신이 보는 앞에서 사진을 삭제하겠다" 하니, 그래도 안 된다며 함께 경찰서에 가자고 했다. '이건 또 뭔 사단이야!' 그는 만일 자기에게 적당한 돈을 주면 경찰서에 가서 큰 벌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며, 또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당신은 그냥 가면된다고 하였다. 하, 이 사기꾼! 계속 '폴리스, 폴리스'를 떠벌이는 그에게 참다 못해 맞대응을 했다.

"그래, 좋다. 나도 너와 함께 가야겠다. 내가 앞장서서 갈 테니 따라 와라."

이렇게 된 거, 그의 사기를 경찰서에 모두 밝힐 요량이었다. 그는 호기가 넘치는 나의 모습에 멈칫하더니, 주뼛주뼛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를 따라오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 찾아보니 서양에서 온 다른 먹잇감을 골라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못말리는 '도네이션'이다. 그래도 그의 안면 연기와 경건하고 엄숙한 바리톤 목소리로 사람을 사로 잡는 연기력만은 박수를 받을 만 했다.      

살아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가트 주변을 가득 채웠다.
▲ 먼 곳으로부터 갠지스강을 찾아온 힌두교도들 살아서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가트 주변을 가득 채웠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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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메인 가트로 돌아와 푸자가 열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말쑥하게 생긴 한 남자가 찾아와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악수를 하는데, 그가 내 손을 놓지 않고 계속 주물러 댔다. 말로만 들었던 바로 길거리 마사지였다. 그는 25RS만 주면 머리에서 어깨까지 마사지를 해 준다고 했다. 계획된 일정도 없고 길거리 마사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 기꺼이 그가 안내하는 자리에 누웠다. 말이 자리이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트의 계단에 비닐을 깔고 민망하게 누워야 하는 생뚱맞은 자리였다.

그는 능수능란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상반신만 한다던 마사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어졌고, 몸을 뒤집어 전신을 마사지하고, 다시 앉으라고 하더니 얼굴, 눈썹까지 주물러 주었다. 시간은 몇 분이 아닌 몇 십 분이 흘러갔고, 내 몸 구석구석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속으로 '이거 25RS 맞는 거야?' 생각하며, 이 정도 서비스를 받았으면 그의 말이 거짓이었을지라도 적당히 비용을 지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사지를 마치고 그는 환히 웃으며, "당신이 행복하다면 원하는 대로 주어라"고 말했다. 나는 200RS를 건네며 참 좋았다고, 수고했다고 마사지로 풀어진 안면에 미소를 지었다.

푸자의 여인들

해가 지자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시바신을 경배하며 성스러운 의식을 올렸다.
▲ 사바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푸자 의식 해가 지자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시바신을 경배하며 성스러운 의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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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스 강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푸자가 시작되는 6시쯤이 되니 다샤스와메드 가트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우리와 같은 외국인 여행객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인도의 힌두교도들이었다.

이 푸자의 정식 명칭은 강가 아르티(Ganga aarti) 혹은 아그니 푸자(Agni Puja)라고 하는데, 브라만의 젊은 제사장들이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에 다니는 아르바이트 생이라고 했다. 이 제식은 갠지스 강(강가)의 시바신을 위한 것으로 첫째가 시바, 둘째는 갠지스 강과 태양, 셋째는 불과 우주를 위한 의식이다. 의식은 한 남성이 레코디언을 연주하며 마이크를 이용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힌두교도들은 찬송가를 부르듯 조용하고 경건한 태도로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아마도 신을 청하고 달래는 의미일 것이다. 제기에 강가의 신성한 물을 퍼 담은 후에 본격적인 의식이 진행되었다. 7~8명의 젊은 제사장들이 방울, 향을 피운 항아리,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 등을 들고 동서남북 사방을 경배하였다. 그들이 경배하는 동안 앞자리에 앉은 몇몇 사람에게 제단 위쪽에 설치된 방울과 연결된 끈을 주고 계속 흔들라고 하였다. 의식 내내 요란한 방울 소리가 갠지스 강의 시바신을 깨우며 찬양했다. 

갠지스 강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 푸자 의식을 올리는 사람, 보는 사람, 비는 사람 갠지스 강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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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푸자 의식보다 이 제식에 참여한 인도 사람들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미소, 태도, 행동 하나하나에서 인도인으로 태어나 삶의 굴레를 돌려가는 그들을 보기 시작했다. 무리의 맨 바깥쪽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 서 있었다. 의식 앞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두 손 모아 절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녀들은 서로 어떤 관계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며 홀로 웃었다. 아마도 무표정한 모습으로 계속 앞에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시누이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 앞에 엄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여인은 한 집안의 살림을 모두 책임지는 큰 며느리일 것이고.

그동안 계속 드는 느낌이지만 인도인들의 눈과 미소에는 어느 곳 누구한테서도 찾기 힘든 깊이가 있었다. 그것이 나의 편견에 의해 비롯된 느낌이라 할지라도 물질적 향락이나 이익을 쫓는 가벼움이 아니라 사람의 심연을 건드리는 모종의 힘이 있었다. 우린 얼마나 많은 위장막을 두르고 페르소나를 쓴 채 살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나의 페르소나가 '내'가 된 것을 아닐까? 그녀의 얼굴에서 내가 본 것은 인간의 '민낯'이었다.

푸자가 끝나고 우린 많은 인파 속에서 빠져 나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걷다가 인도 특유의 '수행자'로 보이는 분이 있어 그에게 들킬 새라 몰래 사진을 찍었다. 사진 화면을 들여다보는 척 하면서 사진 한 컷을 딱! 사진을 찍고 뒤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수행자가 나를 부르며 힌두말로 뭐라뭐라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거 사진 한번 몰래 찍었다가 큰 망신을 당하게 생겼구나' 그는 손짓으로 이리 오라고 하였다. 안절부절 머쓱해하며 그에게 가니, 손가락으로 내 사진기를 가리키며 화면을 보여 달라고 했다. 두려움과 초조감에 방금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자, 아주 아주 걸쭉한 목소리로 "구~우~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으하하하. 나는 한 바탕 웃으며, '정말 잘 나왔다'며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으면 인도에서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충고를 다시금 되새기며, 그에게 "Bye"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 이명처럼 내 귀에는 그의 멋진 목소리 'Good'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바라나시의 첫 날밤을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밤늦게까지 토마토, 오렌지와 함께 한국에서 바리 바리 싸온 소주 한 잔으로 오늘 만났던 갠지스 강을 토해냈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중고등학교 현직 교사 세 명이 2014년 1월, 한 달간 인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우다이뿌르, 조드뿌르, 아그라, 바라나시, 맥그로드 간지 등 인도 중북부를 방문했습니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사색과 반추, 철학'이 있는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태그:#바라나시, #갠지스강, #힌두 화장터, #인도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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