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

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 ⓒ 김진석


혼자 뛰기도 팍팍한 세상이다. 살맛 나는 경제뉴스 구경한 지 오래 됐고, 실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한다. 겁나는 세상이다. 용산참사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연쇄살인 뉴스에 골목길 다니기도 무섭다. 혹시 '비상구'마저 사라질까, 그저 눈을 부릅뜰 수밖에. 하루하루 안도할 수밖에.

그런데, 저들에게서 풍겨나는 자신감의 정체는 뭐지? 혓바닥을 내밀면서 '하하',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씨익', 양손을 하늘로 쳐들며 '만세'. 물론 "아, 죽겠다"는 말도 나오고, 가쁜 호흡에 잔뜩 찡그린 얼굴도 있다. 그래도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그들 얼굴에는 한결같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자부심이 충만하다.

두 남자를 만나다, 아름다운 어깨동무 달리기

 아름다운 마라톤

아름다운 마라톤 ⓒ 김진석

마라톤 결승점에서 만난 얼굴들이다. 15일 한강 잠원지구 트랙경기장에서 열린 '제5회 아! 고구려 역사 지키기 마라톤대회' 참가자들 얼굴이다. 허나 '좋은 구경'도 한두 번이지,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다. 1시간째 결승점을 지키고 있자니 솔직히 지겹다. 오후 들어 기온도 뚝 떨어졌다.

아까부터 두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와 도우미 참가자다. 이제나 저제나 올까, 잠깐 한눈 파는 사이 지나치지 않을까,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저기 오네요"란 외침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가마동'(가톨릭마라톤동호회) 사람들이 '이리 오라' 손짓한다.

드디어 두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한 남자 얼굴은 알고 있는 터다. 오전 인터뷰 직전, 이시현(45)씨는 이미 10km 코스를 달리고 온 다음이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시각장애인 마라톤 도우미 역할을 위해 30km 지점으로 돌아갔었다. 나를 알아보고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반면 다른 한 남자는 아직 내 존재를 모른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동안, 벌써 그들은 내 앞을 지나쳤다.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두 사람 팔에 묶여 있던 빨간 끈이 어깨동무에 파묻혔다. 혼자 뛰기도 팍팍한 세상, 마주보고 웃는 그들의 얼굴이 참 아름다웠다.

한 남자 이야기 "달리기 할 때는 자유롭다"

"뱃살 빼려고 시작했습니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자꾸 배가 나와서 말이죠(웃음). 마라톤을 시작하고 그전보다 훨씬 더 즐겁게 삽니다. 스트레스 해소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고, 참 좋더라구요. 목표도 있어요. 서브3(풀코스를 3시간 이내 주파하는 것)요. 쉽진 않겠지만, 도전해 보려고요."

서브3,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에게 꿈의 기록으로 불린다. 시각장애인이 이루기에는 다소 무리한 목표가 아닐까. 하지만 김정호(38)씨의 목소리에서는 확신이 느껴졌다. 그가 현재 일하는 곳이 어딘지 알고 나니 또 그럴 만도 했다. 김씨는 엑스비전 테크놀러지란 회사의 마케팅 이사로 일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정보통신 보조기기를 만드는 곳으로, 문자를 음성이나 점자로 인식해 출력하는 소프트웨어도 개발했다. 얼마 전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최영씨가 사용한 소프트웨어가 바로 김씨가 다니는 회사에서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장벽' 없는 세상을 하나 하나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2007년 10월부터 시작한 마라톤이 이제 김씨에게는 또 하나의 '장벽' 없는 세상이다. 그는 "뜀뛰기 할 때만큼은 자유롭다"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페이스 메이커, 형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결승점 통과 직후 김정호(왼쪽)씨, 이시현(오른쪽)씨

결승점 통과 직후 김정호(왼쪽)씨, 이시현(오른쪽)씨 ⓒ 김진석


또 한 남자 이야기, "사업 부진으로 시작한 마라톤"

김정호씨가 전적으로 믿는 '형님' 이시현씨는 마라톤에 입문한 지 이제 3년이 됐다.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자신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져서 마음의 중심을 잡고 싶어 마라톤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흔을 넘어 시작했는데도, 그는 이제 서브3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원래 끈기나 극기가 강한 편이냐"고 묻자, '형님'은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도 "내가 끈기가 있는 편이 아닌데,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고, 부인 역시 "어디 얼마나 갈까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고 한다.

이씨는 스스로 나약해질 때마다 '함께 뛰는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동호회 '가마동'에서 좋은 사람들, 또 경험 많고 잘 뛰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 분들과 같이 운동하면서 나도 얼른 따라 가야지란 마음으로 뛰다보니 이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마라톤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을 이렇게 소개했다.

"무엇보다 정확해요. 딱 노력한 만큼 나와요. 몇 시간에 뛰겠다고 하면 그만큼 연습해요. 그렇지 않고 과욕을 부리잖아요? 망가져요. 그렇게 욕심내고 뛰면 결국 퍼지든가, 몸에 탈이 나든가 하더라구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두 남자에게 묻다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김정호·이시현씨

김정호·이시현씨 ⓒ 김진석

두 남자가 만나게 된 것은 작년 3월 가톨릭마라톤동호회와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VMK)이 자매결연을 맺으면서부터. 처음 함께 뛸 때부터 느낌이 좋더니만, 이제는 1주일에 4번 만나 연습을 할 정도로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이제까지 '동생'이 참가한 풀코스는 모두 3회, 그때마다 '형님'이 함께 뛰었다고 한다.

- 그동안 서로 배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김정호 "형님이 굉장히 잘 뛰거든요. 그런데도 이제까지 한 번도 저한테 더 빨리 뛰라고 채근한 적이 없습니다. 철저히 맞춰주세요. 일정 수준 올라간 사람이 천천히 뛴다는 것이 참 힘든데도 말이죠. 한 번도 앞서 나간 적이 없어요.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멋있는 집을 짓기는 쉽죠. 그러나 주위 풍경과 어울리는 집을 짓기란 참 어렵잖아요? 마찬가지죠."

이시현 "사실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안대를 하고 뛰어본 적이 있는데, 참 신기해요. 그렇게 뛰면 뒤에서 오는 자전거 소리, 이런저런 소리 다 들리는데, 눈을 뜨고 뛰면 아무리 집중해도 들리지 않아요. 인정할 것을 인정하면 다른 방법이 보인단 뜻입니다. 정호처럼 말이죠. 사업도 똑같습니다.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한 방에 만회하려다 문제가 생기잖아요."

"이봉주 선수보다 형님과 달리기가 더 좋아요"

-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 두 분 말씀이 각별하게 와 닿네요.
김정호 "마라톤을 하다 보면 다들 서로 아끼고 격려해주고 그래요. 왜냐. 서로 힘든 걸 아니까요. 만약 내가 혼자서,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린다, 더 자유롭고 신나게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아무도 그렇게 달리지 못할 겁니다. 외롭고 지치니까요.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안 힘든 게 이상한 거잖아요. 나만 힘든 것도 아니고, 내가 더 힘든 것도 아니고, 사실은 다 힘들거든요. 결국 주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서로 위안을 받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 큰 기쁨이 되는 거죠. 비록 아주 소박한 보상이라도 말입니다."

- 끝으로 서로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시현 "정호가 꿈꾸는 세상, 비록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앞이 보이는 사람과 비슷한 여건에서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어떤 장벽에 막혀 정상인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부분을 바꿔나가자, 그렇게 장벽 없는 세상을 꿈꾸면서, 나름대로 하나씩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친구거든요. 달리는 데도 목표가 있어요. 적어도 달리는 데 있어서만큼은 그 목표하는 곳까지 눈이 돼 주고 싶습니다."

김정호 "항상 형님이 저한테 그럽니다. 계속 같이 뛰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형님이 애쓰는 만큼, 그 노력에 부끄럽지 않도록 멋있게 뛰고 싶습니다. 그게 형님에게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이봉주 선수와 함께 뛰고 싶은 생각은 없냐는 농담에)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죠. 그래도 형님이랑 뛸 겁니다. 훨씬 잘 통하고 마음도 편하니까요. 이봉주 선수보다 형님과 달리기가 좋아요."

 김정호씨와 이시현씨

김정호씨와 이시현씨 ⓒ 김진석


아름다운 바닷길 마라톤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올해로 아홉 번째를 맞는 <오마이뉴스> 마라톤대회가 강화도에서 4월 19일에 열립니다.

강화해협을 타고 흐르는 강화 해안순환도로를 주요 코스로 이용하게 될 '2009 오마이뉴스 강화 바다사랑 마라톤대회'는 작년 대회를 통해 '즐런(마라토너들 사이에서 즐거운 러닝을 줄여 부르는 말)' 코스로 손색 없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대회 시작 시간은 아침 09시 30분. 참가자들은 강화도 길상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풀코스(42.195km), 하프코스(21km), 10km 단축마라톤, 5km 건강달리기 코스를 뛰게 됩니다. 출전 종목별로 각 코스 1위 참가자에게는 상장 및 트로피와 부상 그리고 상품이 시상되며, 참가자에게 친환경쌀 또는 티셔츠 등 기념품도 지급될 예정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정확한 기록측정을 위해 전자칩을 이용한 자동계측을 실시합니다. 다만 5km 건강달리기 코스에서는 수동 측정할 예정입니다.

대회 코스는 길상운동장-덕진진(5Km 반환점)-광성오리(10km 반환점)-오두돈대-화도돈대-용당돈대(하프 반환점)-더리미 장어마을-갑곳돈대-인삼센터-용정리-연미정-월곶돈대-휴암돈대 앞 마을(풀 코스 반환점)입니다.

접수기간은 3월 20일(금)까지, 선착순 마감입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대회 홈페이지(Marathon.ohmynews.com) 또는 오마이뉴스 마라톤 사무국 (02-733-5505)에 문의하세요. 이번 대회는 강화군청, 강화경찰서, 강화군의회, 강화군 생활체육협의회가 후원합니다.

마라톤 시각장애인 이시현 김정호 즐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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