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선 전동차 안. 20대로 보이는 여자 둘이 문가에서 동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서 있던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느닷없이.

"웃기냐?"
"네?"

당황한 여자는 왜 반말을 하는지 따지지도 못한 채 남자를 바라봅니다.

"웃기냐고."
"왜요? 웃지도 못해요?"

여자는 뒤늦게 어이가 없다는 투로 항변합니다. 옆의 친구는 시선을 계속 동영상에만 고정하고 끼어들지 않습니다. 어색한 상황. 할 말이 없는 남자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합니다.

"웃어. 실컷 웃어."

그리고는 여자가 서있던 방향으로.

"퉤!"

남자가 뱉은 더러운 침이 여자의 바로 옆 출입문에 달라붙어 흘러내리기 시작합니다. 달리는 전철 안.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서 있습니다. 창 밖으로 스치는 어두운 터널을 묵묵히 응시하며 태연하게. 어제(9일) 목격한 광경입니다.

남자는 무언가 잔뜩 뒤틀려 있었습니다. 타인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침 까지 뱉다니. 더군다나 상황으로 보아 여자가 남자를 보고 웃은 것이 아니라 보고 있던 동영상이 재미있기 때문에 웃었다고 봐야 타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 자신을 비웃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니면 평소에 억눌린 감정을 풀어버릴 희생자가 필요했던 걸까요? 자기보다도 어리고 약해 보이는 여자한테 말이죠.

남자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과연 이성적인 말이 통할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그대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시민들 사이에서 버젓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양심이 없는 행동을 저지른 것이죠. 공공재산인 전동차 출입문에 침을 뱉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겁니다.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 그런 행동을 할 줄이야. 더군다나 머리 모양새와 옷차림은 공무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단정한 사람이.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것은 여자와 함께 있던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얼굴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약간의 미소까지 머금고 액정 화면만 보고 있었습니다. 침을 뱉은 남자도 별일 없다는 듯 평범한 기색으로 돌아가 있더군요. 객차 안을 둘러봤습니다. 모두들 아무 일 없는 표정들.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닌데. 우주의 어둠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다가 목적지에서 내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남자를 질책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아니, 그 상황에서 사실은 뭐라고 해야 했을지, 어떻게 했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저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면 문 옆에서 그 봉변을 당한 여자가 한참 동안 분노와 수치심을 억누르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보고도 방관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예전에 저는 백화점 직원에게 욕을 하며 성질을 부리던 사람에게 화를 내며 따진 적이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작업반장이 사람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날리는 것을 보고 항의하며 싸워서 일당도 포기한 채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고요. 그런데 이날은 왜 그랬을까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면서 마땅한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피해자인 여성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가해자처럼 태연하게 굴었던 그 상황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제가 행한 방관이 용서 받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바로 <아메리칸 크라임>입니다.

방관이 불러온 살인

<아메리칸 크라임> 가해자와 피해자의 눈동자가 담긴 포스터. <주노>의 엘렌 페이지 주연.

▲ <아메리칸 크라임> 가해자와 피해자의 눈동자가 담긴 포스터. <주노>의 엘렌 페이지 주연. ⓒ First Look Studios

맑은 가을 하늘 아래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피골이 상접한 소녀의 시신이 구급차에 실립니다. 죽은 실비아의 자매인 제니는 경찰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후 충격적인 사건이 신문지상을 장식하게 되죠.
실비아와 제니의 부모는 유랑극단에서 일하며 거처를 자주 옮겨야 했고 아이들 문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을 여인 거트루드 베니체프스키가 아이들을 맡아 주겠다며 나섭니다. 사실 그녀는 6명의 자녀들과 다림질 등의 소일거리로 연명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요.

거트루드는 아이를 돌봐주면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모를 설득합니다. 자신에게 실비아와 제니를 맡기라고요. 불안정한 거주 상태와 불화를 겪고 있던 부모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두 자녀를 맡기는 실수를 저지르지요. 하지만 자신들이 매주 보내주는 20달러로 여덟 명의 아이들과 거트루드가 생활할 것임은 몰랐을 겁니다.

이 영화는 다른 사람이 맡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둬놓고 학대하며 굶겨 죽인 거트루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1965년 미국에서 벌어진 실화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충격적인 것은 실비아가 학대당할 때 방관하던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거투르드의 언행과 학대의 이유에 수긍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지요. 이들을 향해 거트루드는 온갖 거짓말로 실비아를 경멸하게끔 유도하고 결국 방관자들은 폭력의 행위자로 변모하고야 맙니다.

 실비아 실제 모습

실비아 실제 모습

당시 사건의 법정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는 한 편의 재연 드라마를 통해 관객을 충격의 현장으로 몰아넣습니다. 가정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권력을 유지하는 거트루드는 사실 온전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자녀들의 편지를 뜯어보며 경계를 침범하기 일쑤고 큰 딸보다 6살 많은 남자를 애인으로 삼아 돈을 주며 관계를 유지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녀가 큰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엔 현실을 왜곡하는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죠. 그러던 차에 실비아가 큰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거트루드 또한 어린 시절의 비행으로 미혼모가 된 경험이 있었고 실비아 때문에 지나간 기억이 떠올라 수치심이 자극받게 되지요. 여기엔 그녀가 교회에 다니며 독실한 신자로 자신을 포장하던 평소의 환상이 깨질 것에 대한 두려움 또한 작용하게 됩니다.

결국 가정 내 권력을 쥐고 있던 거트루드는 불안정한 감정의 기복과 온갖 거짓말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실비아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강요한 후 지하실에 가둬버립니다. 영화에서 다뤄지진 않았으나 실제 사건에서는 지하실에서 매춘까지 강요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건의 과정에는 이웃들의 방관과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 언행에 수긍해버린 사람들의 무기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상식과 양심을 거스르는 상황을 보고 인지불일치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해도 되는 행동이라는 거트루드의 태연한 주장과 실제로 행동에 옮겨버린 자녀들을 시작으로 다른 학생들까지 범죄에 가담하고만 것이죠. 결국 실비아는 시신이 되어 지하실에서 나옵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이 가능했던 상황의 힘

거트루드의 아이들 거트루드의 이상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다 아이들 뿐이었다.

▲ 거트루드의 아이들 거트루드의 이상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다 아이들 뿐이었다. ⓒ First Look Studios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상황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트루드의 이상한 언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주변인들은 모두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아이들뿐이었고 이웃들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었죠.
결국 아이들은 거트루드가 두려워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거트루드의 자녀들은 이미 그녀와의 생활을 통해 자신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항하면 자신들이 고통 받을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힘든 저항을 택하기보다는 당장의 편한 복종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실비아에게 폭력을 휘두면서 자신들의 위치가 더 이상 피해자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을 겁니다.

거트루드와 함께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실비아와 자신들의 경계를 가르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해자와 동일시를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아이들은 자신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하다가 모두 감옥으로 가거나 평생 범죄자로 살게 됩니다.

실비아와 함께 맡겨진 제니의 경우 적극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방관하다가 자매를 죽음에 몰아넣게 됩니다. 그런데 제니와 실비아가 거트루드를 벗어나지 못한 원인 또한 상황에 있습니다. 미성년인 그들에게는 일자리나 돈이 없었으며 빈병 수집으로 푼돈을 얻긴 하지만 그마저도 빼앗깁니다. 거트루드가 돈을 빼앗으며 실비아를 도둑년이라고 몰아붙이는 것 또한 착취를 부정하고 오만한 자아를 보호하려는 현실 왜곡이고요.

게다가 거트루드는 부모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 몰래 버려 연락을 두절시킵니다. 또 갖은 험담과 소문을 만들어 실비아를 마을로부터 소외시켜 가지요. 이런 식으로 사회로부터 고립된 실비아와 제니는 가해자의 손 안에서 너무도 쉽게 농락당하며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비아와 거트루드 불안정한 심리와 감정의 기복이 심한 거트루드는 자신이 학대하는 실비아를 마치 제3자 처럼 위로한다.

▲ 실비아와 거트루드 불안정한 심리와 감정의 기복이 심한 거트루드는 자신이 학대하는 실비아를 마치 제3자 처럼 위로한다. ⓒ First Look Studios


결국 가정 내 폭력은 살인으로 발전하고 맙니다.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가정의 권력을 악랄하고 교활한 인성을 지닌 사람이 장악함으로서, 상황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이 살해 4분의 3이 부모의 손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 내 상황을 주도하는 권력이 살인과 얼마만큼 연관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죠.

<아메리칸 크라임>은 가정폭력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살인에 이르는지를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화라서 그렇습니다만 이렇게 악랄할 수 있을까 싶네요. 우리 사회 또한 심각한 가정 폭력 사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로 그 사정이 알려지기가 쉽지 않아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심지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스스로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만일 실비아와 제니가 지속적인 저항을 했다면?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현실을 왜곡하는 오만한 자아가 깨지길 두려워하는 거투르드의 분노가 더 타오르게 됐을 겁니다. 아무도 깰 수 없는 이상인격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더욱 더 끔직한 짓을 저질렀을 겁니다.

이것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인내력의 극한에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때문에 수년 동안의 피해자가 한순간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가고 가해자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지요. 따라서 현실에서 최선의 방법은 도망치는 것입니다. 가해자의 손에서 자립하는 것이죠. 사자와 같은 용기로 두려움을 없애고 여우처럼 교묘하게 거투르드를 속이며 그곳을 탈출할 방법을 실천했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았겠죠. 결국 한 아이는 사망하고 다른 아이는 방관자가 되어 자매를 잃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주변의 올바른 인식과 도움이 절실합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과 상담을 하고 도와주기 시작한다면 거투르드가 가진 권력 또한 약해졌겠죠. 거투르드가 우월하던 가정 내 지위가 무너지고 아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의 손에 맡겨질 수 있었다면 비극은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지하철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시공간이 우주의 어둠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던 어제의 상황에서 제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치 보기였고요. 아무리 확고한 규범과 도덕이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처한 상황은 정반대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아무런 일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그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 존재할 뿐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너무도 쉽게 상대가 이상한 내면을 가지고 있을 거란 단정을 내렸습니다. 때문에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남자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으며 그것을 목격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뒤늦게야 저는 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혼자라도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두려워하지 않길 자신에게 바라봅니다. 누군가가 피해를 당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길 바라봅니다. 홀로 품은 선이라는 씨앗이 퍼지고 퍼질 때, 불의에 대한 저항이 모이고 모일 때, 비로소 타인을 존중하고 범죄 없는 사회가 올 거라 여기면서 이만 줄입니다.

아메리칸 크라임 거트루드사건 아동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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