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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슈화되었던 사건은 무엇일까. 단연코 한 때 광우병 발생지역이었던 미국에서 쇠고기 수입이 재개된 사건일 것이다. 모든 식당에 호주산이라는 원산지표시만이 넘쳐나고 우리는 곰탕안에 들어간 쇠고기가 깨끗한 호주산임을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미 미국산쇠고기가 쇠고기시장을 점령했다는 것은 암묵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2009년 소의 해가 되었다. 거리를 뒤덮었던 미친소라는 단어를 보면서 그다지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 것은 정확히 말해 소들은 미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이고 그들이 미치게 된 것은 100% 인간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홍수 천재지변이 마녀의 소행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우리는 광우병의 원인을 알고 있다. 효율과 극단적인 이윤창출을 위해 생명의 존귀함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방식을 선택한 것. 그러나 인간은 쉽게 그 관행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한 농부가 있다. 기계가 도입되고 농약으로 해충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소에게 쟁기를 매어 밭을 갈고 손으로 직접 김을 매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농부.  영화 워낭소리는 옛 것을 고집하는 이 농부와 30년을 동고동락해온 소의 이야기이다.

농촌의 풍경 안에서 느릿하게 전개되는 소와 농부의 이야기가 많은 관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동물, 소가 가장 중요한 이야기 한 가운데 등장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소에게 잠시 마음을 주지만 소는 모든 것을 바친다는 문구는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소가 고마운 것은 농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주었던 특별한 소이기 때문일까. 다른 소들은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그 수많은 소들을 철저히 이용해왔으면서 한번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와 함께 농사를 지어 9남매를 키워온 농부는 이제 80을 바라보는 병든 몸을 끌고 매일 밭으로 나간다. 그리고 힘들어 걸음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는 소를 채근하기도 한다. 너무 매정한 행동일까. 하지만 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하게 되면 농부도 소도 그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그 사실을 농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오직 농부가 네 발 달린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달구지에서 자신의 아내를 내리게 하는 것일 뿐.

농부의 자식들은 그 소가 자신을 먹이고 학교를 다니게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소를 팔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우시장에서 고삐를 쥐는 손이 달라지는 순간 그 소가 가는 곳은 도살장이 된다. 농부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통적인 소는 살아서 죽도록 노동에 시달리고 더 이상 노동할 수 없게 되면 죽어 인간에게 곰탕의 재료를 넘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소의 운명이다. 그런데 그 운명은 절대 절명의,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일까.  적어도 그 소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은 인간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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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서 언어를 가지고 가장 정교한 도구를 만들고 뛰어난 문명을 만들어 낸 것은 단연코 인간이다.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지적이다. 물론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그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 발전의 밑거름에 수 많은 동물들이 있었다. 동물들은 단백질 공급원으로, 가죽과 모피, 오락거리로 인간에게 유용하게 이용되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적인 순환 내에서 그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을 이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동물들을 인위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과도하게 생산해왔다. 전 세계에는 지금 10억 마리의 소들이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는 배설물을 쏟아내고 오존층을 파괴하면서 자연적 수명의 10분의 1도 채 살지 못한 채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우리는 광우병이라는 괴물이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산업시스템의 산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효율성이라는 근대산업의 가면을 거두어놓고 과거의 시간에 비추어본다 한들. 동물이나 인간에게나 그다지 행복한 모습만은 아니었다. 고달픈 노동의 연속.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고 살아야 하느냐는 아내의 푸념은 잔소리만이 아니다. 농부와 소는 모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힘겨운 노동에 시달려왔다.

그나마 농부는 걱정해주는 자식들이라도 있는데 반면 소는 어떨까. 동물들이 인간에 비해 불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아무도 데카르트처럼 동물이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이룩한 과학의 성과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과 기쁨, 호기심, 권태 또한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밝혀냈다.

도로에서 차에 깔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죽음과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다. 연쇄살인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고 이들의 폭력성은 어릴 적 동물을 학대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인간은 같은 인간사회에서도 자신과 다른 존재를 구별하고 차별해온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 가장 취약하고 약한 고리 아래에 동물들이 있다.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단체는 1824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영국인들은 특별히 동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서구에서 동물보호법이 일찍부터 만들어졌던 것은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되는 어느 부분에 동물들이 위치해 있음을 미리 알고 그 폭력으로부터 절대적인 약자인 동물을 보호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을 뿐이다. 이런 인간의 자각은 동물의 복지를 위한 활동을 가능하게 했고 근대사회 이후 어느 나라나 예외 없이 동물보호단체가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동물복지운동이란 인간에 의해 과도하게 이용되고 착취당하는 동물들이 극단적인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활동을 의미한다. 내가 키우는 개만 사랑하고 옆집에 있는 개를 학대하는 것, 개만 사랑하고 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물복지를 위한 이념과는 동떨어져 있다. 나는 소를 키우지 않는다. 하지만 농부의 늙은 소가 땅에 묻히는 순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농부와 소의 우정을 통해 우리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은 그 소통의 경험이 오직 농부와 소의 관계내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죽은 농부의 소를 통해 말할 수 있는 동물복지란 이런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동물을 이용하라. 욕심과 돈벌이만을 위해서 과도하게 동물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정작 필요해서 소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면 살아서 고통스럽지 않게 배려하라. 그리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예의를 지켜라. 현재 그 동물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 고통이 적은 방법을 선택해 주어야 한다.” 동물은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다. 따라서 동물복지활동이란 역시 인간 본연의 활동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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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폭력성에 우리는 때로 절망한다. 이 지구에 희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말도 못하는 어떤 생명체, 자신과 종이 다른 생명에 동정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 역시 감동적인 경험이다. 소의 해. 말없이 땅에 묻힌 농부의 이름없는 소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명에 대해 이타심과 존중감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소에게 감사한다.

워낭소리 동물복지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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