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의 한 장면.

<과속스캔들>의 한 장면. ⓒ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매년 극장가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예상외의 '대박'을 터뜨리는 깜짝 흥행작이 한 편씩은 꼭 등장하곤 한다. 특히 돈을 엄청나게 많이 들이거나 내로라하는 톱스타가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작품들은 한국영화의 구세주처럼 높이 평가받기 마련이다. <집으로>(2002)나 <어린 신부>(2004), <달콤살벌한 연인>(2006), <미녀는 괴로워>(2006)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올해의 '깜짝 스타'는 단연 <과속스캔들>이다. 개봉 초기만 해도 1~2년마다 공산품처럼 배출되는 '차태현표 코미디' 정도로 과소 평가받았던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 3일 조용히 개봉하여 입소문을 타더니 어느새 해를 넘겨 2009년까지도 살아남았고, 설 연휴기간동안 마침내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지난 26일 기준) 역대 한국영화 '흥행 톱10'안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8년 개봉한 작품 중에서는 개봉시기가 더 늦었던 <쌍화점>이나 여름 최고 흥행작이던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제치고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쌍화점>과 <놈놈놈>이 엄청난 제작비와 스타캐스팅을 동원한 상업 블록버스터로서, 쏟아부은 돈이나 그에 대비하는 순이익 등을 감안할 때 <과속스캔들>과의 격차는 더욱 커 보인다. <과속스캔들>은 인지도 있는 배우래야 차태현 하나 정도고, 박보영은 신예인데다 왕석현은 아역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숨겨진 혈육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소동극'이라는 소재는 <파송송 계란탁>같은 기존 코미디에서도 등장했던 아이템이다.

700만 <과속스캔들>이 한국영화에 남긴 교훈

<과속스캔들>의 흥행 성공이 한국영화에 남기는 교훈은 무엇일까. 700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후광 때문에 새삼스럽게 보이지만, 사실 <과속스캔들>은 큰 욕심이 없는 평범한 상업영화다. 시장이 그리 넓지 않은 한국에서 배급망을 완전히 독과점하는 소수 '대작 블록버스터'의 경우를 제외하면, 하나의 영화에 400~500만 이상의 관객이 든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치부될 정도다.

<과속스캔들>이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영화였을까? 가족·휴먼 코미디 영화로서 무난한 완성도와 볼거리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웰메이드' 영화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떠한 사회적 트렌드나 메시지를 반영하는 소재도 아니다.

성공하는 작품에는 항상 분명한 흥행 포인트가 있었다. <과속스캔들>의 영화적 미덕이라면, 가족 코미디의 장르적 특징과 흥행 공식을 잘 살리면서도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코미디 장르에서 강점을 보이는 차태현이라는 배우와 '과속으로 어머니·할아버지가 된 불량 3대 가족'을 둘러싼 소동극이라는 소재에서 찾아낼 수 있는 잔재미를 잘 살려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왕석현이다. <과속스캔들>은 <집으로> 이후, 아역 캐릭터를 활용한 흥행 포인트를 가장 잘 뽑아낸 작품일 것이다. 아역의 비중이 큰 영화일수록 흔히 아역 캐릭터의 이미지는 고정되기 쉽다. 지나치게 깜찍한 척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애늙은이거나. 이것은 사실 순수한 동심 본연의 순수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왕석현은 사실 다코타 패닝처럼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쁘거나 깜찍한 타입은 아니다. 그렇다고 <나홀로 집에>시절의 매컬리 컬킨이나, <집으로> 때의 유승호처럼 너무 능글맞아서 아이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도 아니다. 영화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설정'의 조미료를 첨가하는 대신, 한정된 대사와 상황 속에서 순간순간 비치는 아이 특유의 엉뚱한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과속스캔들>의 웃음포인트는 대부분 왕석현과 차태현의 호흡에서 나온다. 적당히 영악하고, 적당히 귀여운 왕석현의 연기와 그를 받쳐주는 차태현의 리액션은 최근 한국 코미디 영화 중 가장 손꼽힐 정도로 절정의 타이밍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최근의 한국산 코미디 영화들이 간과하기 쉬운 '절제의 미덕'을 가장 잘 지켜낸 영화일 것이다. 차태현은 최근 몇 년간 자신의 주연작을 통틀어 '오버 연기'를 가장 자제했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엉뚱한 에피소드를 남발하거나, 여러 가지 볼거리를 모두 잡으려는 과욕으로 영화의 줄거리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억지 갈등이나 신파도 없었다.

대박 폭소는 없어도, 영화는 내내 적당히 들뜬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며 흔들리지 않게 스토리를 밀고 나간다. 최근 몇 년간 개봉한 한국 코미디 영화 중에서 이 정도로 안정된 이야기 구조를 유지한 작품도 별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불황기에는 복잡한 스토리보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지닌 이야기들이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과속스캔들>은 '가족 코미디'라는 장르를 앞세워 틈새시장을 잘 공략했다. <과속스캔들>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작품 중에서, 남녀노소 구분없이 모든 연령층의 관객들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었다. <미인도>나 <쌍화점>같은 흥행작들은 대부분 스타 캐스팅이나 '노출장면' 같은 성인취향적 코드로 화제를 모았다.

'튀는 소재'나 '규모의 미학'을 앞세운 상업영화들이 판치는 연말-명절 성수기에, <과속스캔들>은 오히려 소박한 소재와 크기를 앞세운 이야기도 장르적 완성도만 갖추어진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작품의 흥행을 이끈 원동력은, 배우나 배급의 힘도 아니고 온전히 영화 자체의 재미와 관객들의 입소문에 기댄 바 컸다. 그것은 그만큼 최근의 극장가에 관객들의 다양한 영화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있는 '웰메이드 상업영화'가 부족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 설 연휴에 개봉한 한국영화는 하나뿐

그러고 보면 올해 설 연휴만큼 극장가에 신작 개봉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때도 별로 없는 듯하다. <과속스캔들>이나 <쌍화점>은 모두 지난 연말 개봉한 작품들이었고, 신작들은 대부분 설 연휴를 오히려 피해갔다. 코미디를 포함하여 설 연휴에 개봉한 한국영화는 <유감스러운 도시> 하나뿐이었다.

<과속스캔들>과 <유감스러운 도시>는 코미디라는 장르를 대하는 현재 한국영화계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소재나 배우가 아니다. 바로 코미디라는 장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절제'와 '과잉'이라는 태도의 차이에 있다.

<두사부일체> 시리즈의 배우들을 그대로 캐스팅하여 만든 <유감스러운 도시>는, 한국 코미디의 자기복제와 퇴행을 반영하는 작품이다. <무간도>의 설정을 패러디하고 액션과 스릴러적 요소를 추가하여 '규모'를 키운 듯하지만, 본질은 여전히 욕설과 폭력, 성적인 코드로 과장된 억지 웃음을 유발하려고 한다.

흔히 관객들이 코미디를 과소평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정말 코미디를 우습게 아는 것은 오히려 이런 영화로 장사를 하려드는 영화인들이 아닐까. 아직도 관객의 수준을 우습게 보는 이런 영화들로 '날로 먹으려고' 하면서, 틈날 때마다 한국영화가 불황이라며 그 책임을 관객들의 외면에 돌리려하는 것이 문제다.

<과속스캔들>은 국내에 '가족 코미디 장르'에 대한 수요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리고 보고나서도 실로 오랜만에 뒷맛이 씁쓸하지도, 어이없는 실소나 욕이 나오지 않았던 국산 코미디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저평가받는 장르는 어쩌면 '가족 영화'다. 심각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담거나 거대한 규모가 받쳐주는 영화만이 좋은 영화는 아니다. 연말에서 연초 명절 성수기에도 제대로 된 가족 영화 한 편없어서 15세 이하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외화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극장가의 현실이다. <과속스캔들>이라는 특정 영화의 깜짝 흥행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시대의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관객이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어떤 이야기인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영화 과속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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