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8년 연말 어느 출근길의 풍경

아직 채 동이 트지 않은 시각, 출근을 하고자 집을 나섭니다. 이불 속 따뜻한 온기가 커다란 유혹으로 다가와 여름보다 한층 일어나기 어려운 겨울, 덕분에 저의 눈은 버스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반쯤 감겨 있습니다.

비몽사몽 버스에 올라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잠을 떨쳐내고 있는데, 문뜩 버스 뒷문 유리에 부착되어 있는 종이가 눈에 띕니다. 워낙에 급하게 만들었는지, 몇 줄 되지 않는 글을 여러 개 복사하여 프린터로 몇 장 뽑은 뒤 자를 대고 자른 티가 역력합니다.

반 쪽 자리 천원권
▲ 생계형 범죄 반 쪽 자리 천원권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내용인 즉,

"OOOO 노선에서 천 원 권 지폐를 반쪽으로 잘라 승차하는 승객이 있습니다. 적발 시 형사고발 조치 할 것이니 유념하시어 불미스런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협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마냥 웃겼습니다. 오래 전 중학교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등하교 할 때 회수권을 반으로 자르거나, 비슷한 색깔로 회수권을 만들어 얼마 되지 않는 그 푼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애쓰던 친구들. 위의 무시무시한 문구대로 한다면 다들 형사고발조치 할 만한 사기꾼에 화폐 위조범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한 때 지나가는 아이들의 장난일 뿐 악의는 없었던 바, 마냥 그 시절이 그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 땐 그랬지.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기 전, 계속해서 그 문구를 보고 있자니 괜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고, 그 문구가 가리키는 우리의 팍팍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반쪽으로 잘려진 천 원 권이 얼마나 발견되었기에 버스회사측이 정색을 하고 이와 같은 경고 문구를 붙이게 된 것일까? 또 그 범인은 과연 얼마나 생활이 어렵기에 천원 권을 반으로 잘라야 했을까? 혹여 학생들의 장난이 아니라면, 그 천 원짜리 반쪽을 내면서 범인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범인은 이 문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제가 떠올린 것은 그와 같은 범인을 양산해내는 지금의 우리 현실이었습니다. 서민경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며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이 시대. 과연 이와 같이 말도 되지 않는 범죄가 모두 개인의 몫일까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빠듯한 이 시대의 잘못은 없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공범이요, 방조자인 이 시대.

그런데 요 며칠 전, 매일 아침 그 문구를 지켜보던 난 드디어 범인의 자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범인은 그의 범죄를 이렇게 시인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서민들의 생계형 범죄에 처벌 감경"

'생계형 범죄'의 의미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글로벌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경제관련 부정적 통계 수치가 높아가고 계절적 요인 등으로 건설현장 등의 일용직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11월 19일 오전 서울시내 한 인력개발 사무실이 일자리를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로 붐비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글로벌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경제관련 부정적 통계 수치가 높아가고 계절적 요인 등으로 건설현장 등의 일용직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11월 19일 오전 서울시내 한 인력개발 사무실이 일자리를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로 붐비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정부는 16일 국무회의에서 '서민을 위한 법무부 민생대책'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고 합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서민들의 생계형 범죄에 대한 벌금을 통상벌금의 1/2 또는 1/3 수준으로 감액하고, 기소유예를 확대한다. 또 벌금을 즉시 완납할 수 없는 생계 곤란자나 병자에겐 벌금 분납과 납부 연기를 허용한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는 일이 없도록 벌금수배자가 자진신고한 뒤 일부 납부하면 수배를 해제하고 검거된 벌금미납자가 병을 앓거나 일부 납부 뒤 분납 또는 납부 연기를 신청한 경우엔 적극적으로 석방한다."

언뜻 보면 참으로 너그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범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부에서 기꺼이 벌금을 탕감해 주신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하해와 같이 넓디넓은 나랏님의 마음.

그러나 불온한 전 정부의 이 같은 선처를 두고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생계형 범죄'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 때문이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생계형 범죄'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는 법과 규칙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둑질은 나쁜 짓이고, 사기를 치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명제가 항상 참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이상 항상 예외는 존재하니까요.

생계형 범죄는 바로 그 예외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엄연한 법치국가에서 처벌해야 될 범죄는 범죄인데, 누가 봐도 그 사정이 뻔한, 그래서 마냥 다른 이들과 똑같은 잣대로 처벌하기 곤란한 것이 바로 생계형 범죄입니다.

이는 사회적 규약이 개인의 생존권과 부딪힐 때 생기는 모순입니다. 아무리 사회적인 약속으로서 법과 도덕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생존권을 앞설 수는 없으니까요. 인간이 산다는 것만큼 가장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장발장을 용서하다 못해 은촛대를 내준 미리엘 신부처럼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생계형 범죄자들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양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약자에 대한 관심을 쏟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최근 정부의 생계형 범죄 관련 처벌 경감 소식은 그만큼 정부가 생계형 범죄 양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생계형 범죄자를 양상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와 같은 사회적 현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인식을 하고 있음에도, 생계형 범죄를 축소시킬 만한 정책을 펴기는커녕 그와 같은 문제를 방조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생계형 범죄를 부추긴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현재 정부가 내놓는 정책 대개 부익부 빈익빈의 방향으로서 서민들에게는 답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서민들의 주머니가 헐겁거나 말거나 세금을 풀어 토목쟁이들이나 지방 토호 세력들을 살리려는 정부. 말로는 SOC 정비를 통해 일자리를 늘려 서민들에게 돈이 돌아간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일용직 몇 십만 일자리 창출로서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없음은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과연 현 정부 임기 내내 그 폭탄돌리기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모든 이들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생계형 범죄가 만연하게 된다면 점차 사회의 법과 질서는 무너질 것이며, 개인의 생존권만이 두각 되는 이상 우리 사회는 소위 먹고사니즘만이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벌써 경기는 뚜렷한 하강곡선을 그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구조조정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남겨진 자는 헐거워진 월급봉투를 받는 요즘.

시대의 엄중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이념적인 잣대로 빨갱이 사냥을 하고, 교조적인 한미FTA 추진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먹칠을 하는 현 정부가 무슨 큰 인심이나 쓰듯 '생계형 범죄' 운운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착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경기가 회복되어 좀 더 많은 이들이 '생계형 범죄'라는 범죄 아닌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입니다.

[최근 주요기사]
☞ 3만원 들고 유럽여행? 일단 시작해봐!
☞ [최저학력제를 말한다] "운동선수들에게 맞는 교과과정 만들자"
☞ [야구의 추억] 역사상 최고의 직구, 모질게 망가지다
☞ [블로그] "대통령님, 아드님부터 중소기업 보내시죠"
☞ [엄지뉴스] 비싼 승용차는 이렇게 대도 됩니까?
☞ [E노트] 황현희 PD의 소비자고발 '뉴라이트' 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생계형 범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