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신상우 총재와 프로야구 감독들이 간담회를 열고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했다.

KBO 홈페이지에 개재된 보도자료에 따르면, 8개 구단 감독(롯데 자이언츠는 박영태 수석 코치 대리 참석) 중 무려 7명이 '무제한 연장전'을 폐지하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소위 '끝장승부'로 불리는 무제한 연장전은 지루한 무승부를 없애기 위해 올 시즌 처음 도입된 제도다. 왜 고작 한 시즌 밖에 겪어 보지 못한 제도가 벌써 존폐 위기에 놓인 것일까?

무승부를 '선택'하는 선수들의 추태를 다시 보라고?

'가장 늦게 끝난 대한민국 프로야구 경기'의 현장 2008년 6월 13일 0시 49분 당시의 목동구장 전광판이다. 전광판에 표시된대로 강정호 선수(히어로즈)의 타석을 마지막으로 이날 경기는 끝난다. 강정호 선수는 1-1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14회말에 1사 만루 상황에서 안타를 쳐내서 5시간 12분(우천으로 중단된 55분 제외)의 긴 경기를 마친다.

▲ '끝장승부'의 현장 2008년 6월 13일 0시 49분 당시의 목동구장 전광판이다. 히어로즈가 2-1로 KIA를 이겼다. 히어로즈 강정호 선수는 1-1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14회말에 1사 만루 상황에서 안타를 쳐내서 5시간 12분(우천으로 중단된 55분 제외)의 긴 경기의 종지부를 찍었다. ⓒ 이준혁


이닝이나 시간을 제한하지 않고 무제한 연장전을 치를 경우, 그만큼 불펜 소모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평소 1이닝을 던지던 마무리 투수가 3이닝 이상을 소화해야 하고, 다음 날 선발로 예정된 투수가 등판하는 경우도 생긴다. 야수들 역시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

그렇게 되면, 승패에 관계없이 그 후유증은 다음 경기까지 이어지고, 더 나아가 팀 전체의 균형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독의 입장에서는 '끝장승부'를 좋아할 리 없다.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밑그림'이 자칫 엉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야구는 '감독의 편의'가 아닌 관중, 즉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4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지키며 응원하다가 허무하게 무승부로 끝나는 경기를 관전하고 싶은 팬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시간 제한(10시30분)이나 이닝 제한(12이닝)이 있던 시절에는 무승부 기미가 보이면, 선수들이 다음 이닝으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끄는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팀 사정을 고려해 '승리를 위한 도전'을 포기하고 무승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이기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비싼 입장료와 귀한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을 보러 온 관중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무제한 연장전을 폐지하면 그런 추한 장면이 재연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관중의 귀가 문제, 전광판 시계는 누구 보라고 만든 거니?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무제한 연장전을 도입하고 있다. 애초부터 야구는 '무승부'가 존재하지 않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끝장승부'를 반대하는 감독들은 '한국의 현실'을 앞세운다. 선수층이 두껍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1군 엔트리(26명 등록·25명 출전)는 오히려 메이저리그(25명 등록·출전)보다 많다.

게다가 각 팀마다 수많은 유망주들이 2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1군 진입을 노린다. 경기에 나올 선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감독의 구미에 맞는 선수를 좀 더 폭넓게 활용하지 못할 뿐이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의 귀가 문제도 이유로 꼽힌다. 선수층을 가지고 핑계를 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 앞서 말했듯, 팬들은 프로야구의 '왕'이기 때문이다.

무박 2일로 넘어가는 '끝장승부'를 하게 될 경우, 버스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은 대부분 운행이 끝난다. 차를 가져 오지 않은 관중들은 값비싼 택시를 타거나, 늦은 시간에 차를 가져올 수 있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 어린 학생들은 지하철 역내에서 밤을 지새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구장의 출구는 언제나 활짝 열려 있고, 관중 역시 바보가 아니다. 또한 각 구장의 전광판에는 보기 편한 위치에 시계가 설치돼 있어 관중들은 수시로 시간을 체크할 수 있다. '차가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경기에 집중하는 관중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조금 아쉬워도 내일의 일과를 위해 경기 중에 자리를 뜨는 관중들도 있을 것이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라고 외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열성팬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관중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제한 연장전을 폐지하게 되면, 관중들은 정해진 시간이나 이닝이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야구장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환불 따윈 해주지 않는다. 이래도 무제한 연장전 폐지가 팬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올해 벌어진 패넌트레이스 504경기 중 '무박 2일' 경기는 단 두 차례 밖에 열리지 않았다. 확률로 따지면, 고작 0.4%에 불과하다. 프로야구 감독의 87.5%가 0.4%의 확률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셈이다.

진정 시간 제한 없는 종목의 묘미를 없애려 하는가

석패한 선수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 6월 12일 히어로즈-KIA타이거즈 간의 경기. 비록 패하긴 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고생하며 경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수 및 코칭스탭을 위해, 끝까지 응원석을 지킨 관중들은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선수들이 끝까지 노력하면 팬들도 선수들의 노력을 잊지 않는다.

▲ 선수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 6월 12일 히어로즈와 KIA의 끝장승부 종료 후, 끝까지 자리를 지킨 관중들이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 이준혁


야구는 시간 제한이 없는 종목이다. 경기 진행 방식은 다르지만, 배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같은 종목도 시간 제한이 없다.

이런 종목은 아무리 점수 차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도, 혹은 아무리 경기 시간이 길게 늘어져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시간 제한이 없는 종목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지금 프로야구 감독들은 야구가 가진 '원초적 매력'을 없애려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들이 좀 더 편하게 팀을 운영하기 위한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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