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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결의를 보여 주기로 한 장준하

장준하는 그 길로 곧장 서안 시내로 나갔다. 그는 이발소를 찾아갔다. 그가 대뜸 삭발해 달라고 하자 중국인 이발사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발사는 빗과 가위를 가져오더니 다시 한 번 삭발이냐고 물었다. 장준하는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 이발사는 뚱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빗을 장준하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머리털이 무더기로 잘려 내리는 것도 모르는 듯, 장준하는 거울 앞에서 혼잣말을 계속 뇌까리고 있었다.

"서울 지구 공작반의 임무가 가장 중요하오. 내가 빠지면 공작반이 와해되리라 보오."

장준하는 자기 머리털이 비에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지는 것을 보며, '몸이며 얼굴이며 머리털이며 살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고 가르치던 조국과 '이 목은 잘라도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라고 주장했던 조상들을 동시에 생각해 보았다.

편집실로 돌아온 그는 <제단> 2호 일을 하고 있던 동지들을 돌려보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있는 장준하의 삭발 머리를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장준하는 먼저 일기장을 꺼냈다. 일군 병영을 탈출하던 작년 7월 7일부터 시작된 1년 분 일기는 공책으로 일곱 권이나 되었다. 그는 임천에서 만들었던 잡지 <등불>과 서안에서 만든 <제단>을 일기장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유서를 작성하여 맨 위에 놓고 두 겹으로 포장했다. 그는 포장지에 고향집 주소를 썼다.

그는 개인용품들을 모두 모아 마당으로 가지고 나갔다. 마침 하늘에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그는 물품들을 불태우면서 흙에 짤막한 시를 지어 써 보았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장준하는 한동안 노을이 물들고 있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소포로 만든 유품을 들고 걸음을 떼었다. 그는 김준엽의 집으로 갔다. 김준엽의 부인 민영주가 혼자 집에 있다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아니 장 선생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불원간 조국으로 가 죽을 것이니 이 물건을 이 주소로 우송해 주십시오."

민영주는 의외로 태연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후예답게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장준하는 학병 탈영 계획을 듣고 곧장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아내 희숙을 떠올렸다.

장준하가 돌아서자, "꼭 전해드리겠습니다"하는 민영주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렸다.

경성 특공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는가

8월 4일 조례가 끝나자 이범석은 장준하를 불렀다. 이범석은 청사 건물을 휘둘러보더니 건물 반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정원을 함께 걸읍시다."

장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범석은 대화를 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제단 2호는 끝나가지요?"

이범석은 잡지 일부터 물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그런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뜸, "대장님의 고마운 뜻을 전해 들었습니다"라고 윽박지르다시피 말했다.

이범석은 입을 굳게 다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는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준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대장님, 애초 계획대로 해 주셔야겠습니다."

장준하가 모자를 벗자 삭발한 머리가 나타났다. 이범석은 장준하의 삭발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보았다. 그는 매서운 결의로 불타고 있는 장준하의 눈빛을 슬며시 외면하더니 뭔가 체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이 나이의 나도 아직껏 폭탄을 들고 왜놈들이 많은 북경이나 천진 등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소."

이범석은 다시 한 번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해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우리 민족의 혈관에 불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지금은 냉철하게 국제 정세를 살펴야 할 때요. 왜놈들은 오래 뻗대지 못할 것이오. 반면 우리 혁명 세력의 분포와 역량은 한심스러워 염려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오."

장준하는 묵묵히 이범석의 말을 들었다. 이범석은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며 말을 이었다.

"중경의 영감님들은 국제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허구 헌 날 내 당, 네 당 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외국 세력과 내통하며 국내 진입을 노리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보나마나 세력 충돌이 생길 것이고, 결국 민족 분열의 비극이 안 생긴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지. 어차피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니 유능한 동지를 아껴서 전후에 야기될 사태에 대비해 보려는 뜻이었소."

장준하는 이범석의 약간 체념하는 듯한 어조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는 내친 김에 자기 할 말을 다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장님의 사려 깊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후에 일할 동지는 그때 가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맡은 임무는 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경성 공작대의 실질적인 책임자입니다. 경성의 책임자면 함경도부터 남해안에 이르는 국내 20개 전 지역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 역할의 성패 여부가 전체 대원의 임무 수행에 결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저는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 관계자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동조자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들뿐입니다. 그들이라면 우리 임무에 협조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인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국내 진입을 해야 한다는 것을 대장님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현 시점에서 그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를 국내로 보내 주십시오."

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덤비는 젊은이를 말리기란...

이범석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작전의 입안자였고 실행 책임자였다. 그런 당사자가 유능한 인재의 작전 참가를 만류하고 있으니 왠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았다. 이범석은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장준하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장준하가 끝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범석은 어린 청년과 무익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숱한 전투를 통해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겠다고 덤비는 청년을 만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닦더니 다시 썼다. 그러더니 모자를 고쳐 썼다. 장준하도 모자를 쓰고 부동자세를 취하며 이범석의 답변을 기다렸다.

"…하기야 가장 보람 있는 일에 목숨을 던져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찾아오기는 힘든 일이지. 장 동지 뜻대로 하시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경성특공대, #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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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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