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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로스앨러모스 사막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의 거대한 연구 단지에는 과학자와 기술자와 군인과 노동자와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수만 명이 모여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각종 연구실과 실험실, 기계 제작소, 우라늄 추출을 위한 거대한 공장 등이 차지한 면적은 당시 미국의 자동차 공장 면적을 합한 것보다 넓었다. 그곳은 하나의 임시 도시였다. 임시 도시인들은 사막의 바람에 얼굴들이 죄다 거칠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과학자와 일부 군인들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수천 명씩 짐을 꾸렸다. 귀향하는 그들의 표정은 밝고 평화로웠다.

임수경은 귀향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며 새삼 고향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귀향객들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가 과학자 식당으로 발을 돌렸다. 그녀는 얼마 전 면회 온 베어드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파악하는 정보로는, 전쟁이 끝나면 한국은 1순위로 독립한다고 합니다."

베어드는 격전이 치러진 필리핀 근무를 끝내고 며칠 전 귀국했다고 말했다. 그의 그을린 얼굴에는 전에 없던 소신과 건강이 함께 담겨 있었다.

"미스 임, 나는 전장에서 미스 임 같은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절감했습니다. 살육의 현장에서는 갑자기 사고 작용이 마비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의식을 찾게 되는 실마리가 언제나 미스 임이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체험이었습니다. 미스 임이 생각남으로써 내 의식이 정상화되고 다른 사고가 명확해질 수 있었습니다. 한때 나는 미스 임을 욕심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나의 지인입니다."

임수경은 미국에도 양반이 있다면 베어드 같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어드는 다음에 한국으로 가 근무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님 소녀도 볼 수 있었던 섬광

그로부터 며칠 뒤인 1945년 7월 16일 새벽이었다. 번개 폭풍이 한바탕 뉴멕시코의 사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임수경은 짙은 색 보안경이 부착된 용접면을 받았다. 옆에 있는 에드워드는 자외선 차단제를 온몸에 발랐다고 말했다. 그는 버스를 타고 오다가 갑자기 토할 것 같다며 몸을 떨었던 과학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덤불 속에 들어가 토하고 오는 동안 아무런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그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주는 으스스함 때문이었을까? 버스 세 대에 나눠 타고 온 100명에 가까운 과학자들은 공포감 속에서 폭파 지점이 있는 방향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누구도 몸을 빨리 움직이거나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꼭 할 말이 있을 때면, 그들은 현장의 밤도둑처럼 작은 말씨로 속삭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파인 만밖에는 없었다. 그는 유난히 다이얼이 복잡한 라디오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른 그는 쉬지 않고 라디오를 만지며 다이얼을 돌려보고 있었다. 그가 계산의 천재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안테나를 들어보다가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자 웬 감미로운 왈츠곡이 흘러나왔다. 그에게는 단파방송의 주파수를 이용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시간을 예측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마침내 그가 라디오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30분 전."

그가 알려 준 것은 세계 최초로 벌어지는 원폭 실험의 시간이었다. 임수경은 멀리서 하늘을 가르며 분주히 움직이는 탐조등의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부탁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인슈타인은 원폭 실험을 보자마자 그 성능과 위력에 대한 소감을 바로 알려 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었다.

"모두 폭파 지점 방향으로 발을 뻗고 엎드리시오."

임수경은 보안경의 유리를 통해 철탑이 있음직한 위치를 헤아려 보았다. 그곳에 30m 높이로 솟아 있는 철탑 상단부에는 여러 종류의 물건이 장착되어 있었다.

지휘본부에서는 섬뜩하리만치 깡마른 연구소장 오펜하이머가 낡아빠진 모자를 쓰고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피와 뼈가 말라붙은 것 같아 보이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문질렀다. 그가 손을 내리며 부르짖었다.

"주여! 이런 일은 나의 가슴을 짓누릅니다."

그때였다. 임수경이 철탑이 있으리라고 눈길을 주고 있었던 지역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이어서 무서운 폭음이 들렸다. 삼십 킬로 밖에서 일어난 섬광을 보고 눈과 고개를 파묻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임수경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자줏빛으로 얼룩진 바닥을 보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현장에서 3마일 이상 떨어진 산맥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새하얘진 땅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은색에서 서서히 노란색으로, 그러고는 오렌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하늘에 새로 형성된 구름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강렬한 폭풍이 불어왔고 거대한 구름이 1만 2천m 상공으로 솟구쳤다.

파인만과 페르미는 폭발 압력을 계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여러 가닥으로 찢은 종잇조각을 돌풍에 날려 보고 있었다. 천둥같이 거센 음향이 쉬지 않고 들렸고 총소리 같은 것도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터지고 몰아치고 몸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빛을 목격한 과학자들은 빛과 소리가 잦아들자 공포감을 환호성으로 풀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 나 없이 악수를 나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등을 두드렸다. 그것이 원폭 실험임을 전혀 몰랐던 <뉴욕타임즈> 취재 기자가 소리쳐 물었다.

"대관절 뭐였습니까?"

누군가 기자에게 답을 주었다.

"일본에 줄 선물입니다."

암호명 '트리니티' 실험은 이렇게 성공했다. 페르미는 특별 제작 전차를 타고 현장 점검을 위해 출발했다. 그는 트리니티 현장에 있던 30m 철탑은 잔영도 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폭파 지점에서 수 킬로 떨어진 곳에 있던 산토끼는 몸이 갈가리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 사막의 모래는 투명한 비취색으로 반들반들하게 녹아 붙어 있었다.

현장에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던 한 장님 소녀는 폭음이 들리기도 전에 이 빛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이따금 경박해 보이는 청년 물리학자 파인만이 말했다.

"갈색 사막 한가운데 폭발로 파인 초록빛 바닥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굉장히 멋진 구경거리였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원자폭탄 개발

임수경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핵 실험이 성공했다고 전한 후 그것을 지켜 본 솔직한 심경을 아인슈타인에게 밝혔다. 그녀는 한 마디로 전율적(terrible)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원자폭탄은 우리의 예상을 상회하는 가공할 살인병기라고 말했다. 실험이 성공하자 희희낙락하는 세계적 권위의 과학자들에게 자신은 크게 실망했다고 덧붙이면서, 과학자들이 인류를 자멸시킬 무기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대발명이라고 기뻐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고 말하며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할 때, 조국이 식민 상태에 있고 일본이 빨리 항복해야 조국이 독립할 수 있는데, 원자탄을 사용하면 그것이 조속히 이루어진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원자탄의 사용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라는 한국일 것이었다. 그녀는 만약 자기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원폭의 사용을 무조건 반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핵실험이 성공한 직후 미국 국방장관 스팀슨은 전투기를 타고 영국의 처칠에게로 날아갔다. 당일 오후에 처칠의 집무실로 들어간 그는 말없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습니다.(Babies satisfactory born)"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사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이 소개됩니다.



태그:#로스앨러모스, #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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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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