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 야구 선수였던 A(24)씨. 그가 야구를 한 것은 이승엽과 같은 선수가 되는 것을 꿈꿔서가 아니었다. 그저 야구가 재밌어서 좋아서 흙먼지 속에서도 펑고를 받고 배팅볼을 쳤다.

하지만 고교를 졸업하고 불러주는 프로팀도, 진학할 대학도 없는 현실은 냉혹했다. 군 문제라도 먼저 해결하자 싶어 군에 입대했지만 제대 후 마땅히 할 일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는 현재 고정된 직업 없이 호프집이나 PC방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A씨는 "운동부에서 합숙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미친 짓 취급을 받는 분위기였다"라며 "지금이라도 대학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책만 펴면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합숙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미친 짓"

공부하는 축구 선수 만든다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브리핑실에서 열린 초중고 축구 '지역리그제' 전면 시행 관련 기자회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가운데)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홍명보 전 올림픽 대표팀 코치가 제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발표된 지역리그제는 그동안 엘리트 선수의 공급 통로 역할을 해왔던 학원축구가 전인 교육을 외면하고 선수들이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즐기는 축구'가 아닌 '이기는 축구'로 변질하면서 선수 선발 과정의 비리가 만연하고 선수들이 학교 수업을 외면했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마련됐다.

▲ 공부하는 축구 선수 만든다 11일 오후 서울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 브리핑실에서 열린 초중고 축구 '지역리그제' 전면 시행 관련 기자회견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가운데)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홍명보 전 올림픽 대표팀 코치가 제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날 발표된 지역리그제는 그동안 엘리트 선수의 공급 통로 역할을 해왔던 학원축구가 전인 교육을 외면하고 선수들이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즐기는 축구'가 아닌 '이기는 축구'로 변질하면서 선수 선발 과정의 비리가 만연하고 선수들이 학교 수업을 외면했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마련됐다. ⓒ 연합뉴스 황광모


초중고 시절 황선홍을 꿈꾸며 공을 찼던 B(26)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축구 선수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이 없는 그는 "열심히만 하면 어디든 불러주는 곳이 있을 줄 알았는데 미련한 착각이었다"며 "미리 이런 현실을 알았다면 하다못해 영어 공부라도 해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생긴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직업 운동 선수를 꿈꾸는 것은 '정크본드'(신용등급이 낮은 회사가 발행하는 고위험 채권)에 투자해 놓고 대박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운동과 공부가 양립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이승엽이나 박지성을 꿈꾸며 운동만 하는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은 프로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실패하면 다른 길이 없는 이런 위험한 투자처에 자식의 인생을 다 걸 부모는 많지 않다. 그래서 운동을 하겠다는 꿈나무들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축구만 해도 2004년 279개였던 초등학교팀이 2008년에는 221개팀으로 58개팀(20.8%)가 줄어들었다. 야구도 최고 124개까지 늘었던 초등학교 야구팀은 2008년 현재 100개로 줄었다. 특히 고등학교 팀의 경우 현재 54개팀이 있지만 선수 부족으로 해체를 고려하고 있는 팀도 여럿이다.   

반면 '즐기는 운동'을 하는 스포츠클럽 활동을 하는 유소년과 청소년들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축구의 경우 초중고 스포츠클럽이 5700여개에 달하고 축구교실등 유청소년클럽도 829개팀에 달한다. 야구도 정식 학교 팀은 줄어들고 있지만 리틀야구팀은 지난해 39개팀(813명)에서 올해 50개팀(977명)으로 늘었다.

축구계의 새로운 실험, 이번에는 성공할까

그동안 꿈나무들을 운동에서 멀어지게 하는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제시됐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만 대학입학을 허용하는 입시제도 폐지,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최저학력제, 수업 결손을 초래하는 전국대회 축소 등이 대안으로 꼽혔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축구계가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11일 대한축교협회와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는 공동으로 '학교축구 활성화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학기중 전국 규모 토너먼트 대회 폐지, 학교팀은 물론 스포츠클럽도 참여할 수 있는 연중 지역별 리그 신설, 정규수업 시간 중 선수들의 훈련 및 대회 참가 금지, 일정 성적 수준을 유지해야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최저학력제' 도입 검토 등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현실화만 된다면 학원 체육의 풍토를 전면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제도들이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와 축구계가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다"며 "제도를 시행하면서 앞으로 3~4년간은 잡음도 많고 학교 현장에서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차피 가야할 길, 일관된 정책 집행이 필수"라고 주문했다.

특히 이 방안이 정착되면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에 입학할 자격을 주는 기형적인 입시제도도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대회 규모가 축소되고 리그제가 활성화되면 체육특기생 선발 기준을 정하는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서도 다른 방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강 제도'는 그동안 선수와 감독들을 성적지상주에 내몰아 폭력 등 인권유린, 선수 스카우트 비리, 학습권 박탈 등 학원 체육 병폐를 가져온 주범으로 꼽혔다.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앞으로 축구협회에서 선수들의 기록부를 작성할 때 '4강 진출' 같은 입상 성적이 아니라 선수 개인의 특성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반영을 할 것"이라며 "교과부가 대교협의 결정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내신이나 면접 등의 요소도 특기생 선발에 반영할 수 있도록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늘도 진행되는 고교야구 현재 목동구장은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한창 진행중이다. 이번 대회도 어떤 선수가 어깨나 팔꿈치에 부상을 입을지 모른다.

제 55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경기가 열리고 있다. ⓒ 이호영


발등에 불 떨어진 야구계도 학원 체육 개선에 나선다

축구계의 신선한 실험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야구계다. 안그래도 야구계는 선수 부족을 걱정해야하는 처지다. 고교팀 54개에 선수 1526명, 중학교팀 78개 1634명, 초등학교팀 100개 1577명으로 중학교 선수 숫자보다 초등학교 선수 숫자가 적다.

위기의식 속에 야구계도 선수들의 학습 박탈은 물론 혹사를 가져오는 전국 토너먼트 대회의 축소와 최저학력제 등의 도입을 검토했지만 현실화 되지 못했다. 

만약 축구계에서 공부하는 축구선수 키우기가 정착되고 성공한다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선택은 야구가 아니라 축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현재 프로팀 수는 야구의 경우 8개에 불과하지만 축구는 내년부터 15개 구단이 리그에 참여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할 직장이 야구보다 7개나 더 많다는 이야기다. 

구경백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는 "전국대회에 대학 진학이 걸려 있다보니 대회수를 줄이자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돼도 학부모 등 현장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며 "미국이나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최저학력제도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소홀히 하는 국내 현실에서는 운동만 하기에도 힘든 선수들에게 이중부담이 될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야구계도 학원 체육 정상화를 위해서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구경백 이사는 "축구계가 마련한 방안을 환영하고 지지한다"면서 "야구의 경우 리그를 치르기에는 팀의 수가 적고 야구장 시설이 부족한 상황이긴 하지만 축구계가 먼저 나선 만큼 야구협회도 논의 중이던 이런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2년 영국의 한 언론은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4강 진출을 "자동차 공장은 없는데 자동차가 나온 꼴"이라고 썼다. 다소 조롱이 담긴 비유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만큼 축구의 저변과 기초 인프라가 형편 없었던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나 2008년 올림픽 야구 금메달 기적 등 국제대회 성적이 신화나 기적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 스포츠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반증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공장을 리모델링하겠다는 축구계의 실험이 성공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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