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끌렸던 일본영화 <굿'바이>

왠지 끌렸던 일본영화 <굿'바이> ⓒ 케이디미디어

영화 <굿'바이>를 보리라 결심하게 된 것은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 글들을 읽고 난 후였다. 평소 일본 영화라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러브레터>를 마지막으로 거들떠보지 않은 나였지만 영화의 소재가 '시체를 닦는 일'이라는데 눈이 번뜩 뜨인 까닭이다. 뭐? 시체를 닦아? 그것도 전임 첼로 연주자가?

내가 그 '시체 닦는 일'에 그리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결국 10대 후반 20대 초의 기억 때문이다. 용돈을 벌기 위해 수많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던 그 때, 병원 영안실에서 시체를 닦는 아르바이트는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흥미 있는 자리였다.

비록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들었지만 대부분의 병원들이 이를 무시하고 '초짜'들을 고용한다고 했으며, 적은 노동에 비해 많은 돈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경험을 축적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시체 닦는 일은 분명 남에게 내세울 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가부장 사회 속에서 남성으로 담력을 과시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갓 죽은 예쁜 여성의 시체와 관련된 성적 판타지를 농담 삼아 지껄일 수 있는 자리였다.

시간(屍姦)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아마도 그것은 가부장 사회 속에서 보잘 것 없는 남성이 자신의 욕망을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객체에다 대고 푼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체를 닦아?

그러나 또래들에게 최고의 아르바이트 자리로 여겨졌던 시체 닦는 일에 대한 나의 환상은 곧 깨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군대에서 후임병 한 명을 받고 나서였다.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는 그 녀석이 정말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며 경험담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야기의 70%가 거짓이라는 군대라지만 어쨌든 후임병의 경험담은 내가 상상하지 못한 많은 것, 그러면서도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사실들을 상기시켰다.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의 납관사 시체를 닦으면 분명 고수익이 보장된다.

▲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의 납관사 시체를 닦으면 분명 고수익이 보장된다. ⓒ 케이디미디어


납관사의 현실 항상 상태 좋은 시체만 있는 것은 아니다.

▲ 납관사의 현실 항상 상태 좋은 시체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케이디미디어


그 녀석의 이야기인 즉, 영안실에 오는 시체의 절반은 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건 사고로 오는 시체의 경우 팔 다리 없는 것이 예사요, 부패가 심한 시체의 경우에는 시체를 닦고 난 이후 아무리 씻어도 1주일은 그 송장 냄새가 몸에 배겨 있는 것 같으며, 병으로 죽은 시체의 퀭한 눈은 꿈에도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르바이트생이 시체를 닦으러 영안실에 들어가면 도망가지 말라고 병원은 밖에서 출입문을 걸어 잠근다나? 그래, 괜히 돈을 많이 줄 리 없지. 시체 닦아 돈을 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후 내가 시체 닦는 일에 대해 또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작년 초에 둘째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 장례 절차를 지켜보면서였다. 위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지만 다행히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저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뚱이를 닦으면서 혹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황이 이러하니 그 행위를 단지 돈으로 환산했던 나의 젊은 날을 반성하는 수밖에.

그런데 영화 <굿'바이>가 그 시체 닦는 일을 다루었다고 했다. 혹자에게는 거액을 벌 수 있는 행위로, 혹자에게는 죽은 자를 보내는 거룩한 예식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그 행위가 소재라고 했다.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뭐, 내용이야 후자로서 뻔한 이야기이겠지만 영화는 그 진부함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내가 영화를 보게 된 이유였다.

돈과 사회의 편견을 넘어 소명 의식으로

기존에 몸담고 있는 오케스트라단이 해산되면서 첼로 연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고바야시가 NK에이전시에 입사하게 된 것은 결국 돈 때문이었다. 비록 여행사라고 착각해서 찾아갔지만, 그가 처음부터 납관사의 일을 그만두지 못한 것은 첫날부터 사장이 쥐어준 터무니없이 많은 액수의 돈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납관사의 일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편견을 보여준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막연한 교과서적 당위성과 함께 고수익이 보장되는 납관사의 일 앞에서 그 누가 쉽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납관사의 길을 선택한 고바야시에게 시련은 자신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온다. 시체를 닦는 일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부패한 시체를 만지고 돌아온 그를 향해 사람들은 역한 냄새가 난다며 힐끗힐끗 쳐다보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 친구는 그를 무시한다. 게다가 고바야시가 납관사의 일을 그만두기 전에는 같이 못 살겠다고 집을 나간 아내까지.

죽음에 대한 경건함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한다.

▲ 죽음에 대한 경건함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한다. ⓒ 케이디미디어


사회의 편견을 이기지 못해 납관사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고바야시에게 사장님은 맛있는 복어 정자 주머니 음식을 권하면서 이야기한다. 우리도 역시 죽은 것을 먹는다고,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옆에 있다고.

납관사의 일을 단순히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한 만큼 사회의 편견에 휘둘렸던 고바야시는 그제야 자신의 일을 되돌아본다. 죽은 자를 마지막으로 치장하여 보내는 자신의 의식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의 정성스러운 의식을 앞에 두고 서로 상처를 치유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소명의식'이라 하던가.

소명의식 첼로의 선율로 죽음의 경건함을 연주한다.

▲ 소명의식 첼로의 선율로 죽음의 경건함을 연주한다. ⓒ 케이디미디어


영화 중반 흐르는 고바야시의 첼로 소리는 결국 그가 납관의식을 천직으로 받아들이며 평온을 얻은 소리이며, 동시에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이승의 마지막 배웅이다. 영화 제목처럼 굿'바이를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일본에 대한 부러움

영화를 보는 내내 둘째 큰아버지를 떠올리던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어느 영화보다 죽음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각자의 경험은 모두 다를 터, 영화는 보는 사람들을 울리다가 웃기고, 웃기다가 울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 머리 속에 강하게 각인된 것 중 하나는 일본에 대한 잔상이었다. 죽은 자를 경건하게 보내는 일본 사회의 모습이, 상을 치르면서 연신 돈 봉투를 꺼내들어야 하는 우리네 모습과 오버랩된 것이다.

 경건하게 망자를 보내는 의식

경건하게 망자를 보내는 의식 ⓒ 케이디미디어


물론 일본에서도 장례의식이 모두 경건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사회에서도 모든 장례식이 그리 천박한 것은 아닐 테지만,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일본 사회의 망자에 대한 경건함은 이제 분명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요소였다. 100년 전만 해도 당연히 존재했을 죽음에 대한 경건한 의례가, 모든 것이 경제로 통하는 이 시대에 돈 봉투로 환원되고 만 것이다. 인사마저도 '부자 되세요'가 되어버린 천박한 시대.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일본에 대한 부러움은 영화 초반 주인공 고바야시가 첼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올 때부터 시작되었다. 고향이 있는 사회. 타지에서의 삶이 지치고 힘들면 돌아갈 곳이 있는 사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며 고향을 찾아서 온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일본이 부러웠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불행히도 고향이 없다. 기껏해야 우리 아버지 세대 정도가 고향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들의 기억 속 고향 역시 지금은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되나마나 아파트를 올리고 산천을 헤집어 버리는 이 시대에 어찌 그 시대의 원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개발과 투기의 광풍 속에 어느새 사라져버린 우리의 고향.

게다가 지금 태어난 아이들의 고향은 물으나마나. 전 국토의 도시화율이 90%에 다다르고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과 서울에 몰려있는 지금 과연 우리들에게 무슨 고향이 남아있겠는가. 온통 획일화된 아파트 숲에 콘크리트 도시.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도 아련하게 추억할 만한 곳도 없다.

 장인 정신을 알아주는 단골손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다.

장인 정신을 알아주는 단골손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다. ⓒ 케이디미디어


또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일본의 소도시에 아직까지 꿋꿋이 남아 있는 작은 목욕탕의 존재였다. 빨리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짓자는 아들 앞에서 단골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고집스럽게 버티는 어머니와, 장작불로 데운 물은 뜨겁지만 따갑지 않다며 그 목욕탕의 진가를 알아주는 단골손님.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은 목욕탕과 그를 알아주는 단골손님이 우리 사회에도 존재 가능할까? 물론 정답은 '아니다'다. 가능만 하다면 조촐한 동네 목욕탕 대신 거대한 찜질방을 지어 모든 고객을 흡수하려는 것이 현재 우리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자본의 논리에 따라 오로지 크고 강한 것만 이기는 약육강식의 사회.

이는 결코 목욕탕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래시장을 다 죽이면서 마트가 들어서는, 동네 서점들이 무너지고 대형서점만 존재하게 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창업의 기회를 빼앗기고 대형 상점의 비정규직으로 비참한 삶을 꾸려가야만 하는 많은 개인들. 지금과 같이 새롭고, 크고, 인공적인 것을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소자본이 대자본을 절대 이길 수 없으며 아무리 유능한 기능공이 있다 한들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간이 그립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간이 그립다. ⓒ 케이디미디어


영화 속 일본의 소도시는 매우 아름답다. 그것은 봄에 피는 벚꽃 때문도 아니요, 겨울의 눈 덮인 하얀 산 때문도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간.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바로 그 공간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그런 공간.

급한 마음으로 쓰느라 횡설수설한 것 같다. 극장들이 영화를 내리기 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서둘러 쓰는 글. 이렇게 좋은 영화가 오래 걸리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밀려 조기 종영되는 작금의 현실에 가슴 아플 뿐이다. 허무맹랑한 홍보 없이는 제값을 받지 못하는 우리들의 현실은 언제나 개선되려나. 여러분께 이 영화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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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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