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만난 MBC ESPN 중계진. 왼쪽부터 신승대 아나운서, 김민아 아나운서, 이상윤 해설위원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만난 MBC ESPN 중계진. 왼쪽부터 신승대 아나운서, 김민아 아나운서, 이상윤 해설위원 ⓒ 곽진성


예전에 나는 축구팬이었다. 국가 대표팀 경기는 물론이고, 스포츠 신문에 표시된 K리그 관중수까지 일일히 체크하던 그런 열혈 축구팬.

당시 중학생이던 난 K리그 대전시티즌의 팬이기도 했다. 그해 창단된 대전팀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나는 마냥 우리 팀이 좋았다. 그래서 틈 날 때마다 축구장을 찾곤 했다. 마음껏 서포터 석에서 응원하고 뛰어다녔다. 비가 와도 태양이 내리쬐도, 축구 보는 게 얼마나 좋던지 축구장만 가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

학교에선 점심시간은 물론 하교 후에도 친구들과 축구 시합을 하곤 했다. 새벽 조기 축구회에도 가입했다.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꽁꽁 언 겨울 그라운드를 달리는 기분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어디 그 뿐인가. 유명 축구선수 선수의 인터넷 팬카페(회원수 1만여명)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 땐 난 정말이지 축구에 죽고 축구에 살았다. 그 시절, 내 화두는 단지 축구였다.

하지만 그런 축구 열정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사그라들었다. 아니, "사그라들었다"는 표현보단 "강제로 꺼버렸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축구장을 찾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금단증상보다 더 큰 후유증을 불렀던 것 같다(물론 내가 담배를 펴본 적은 없지만). 과거의 추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일이었고, 가슴 속 열정을 차갑게 식혀버리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10년은 잘 버텨 나갔다. 내 나이는 26살이 되어 버렸다. 어느덧 난 축구에 미친 외계인에서 축구란 녀석을 남들만큼 좋아하고, 남들만큼 싫어하는 그런 평범한 지구인이 되어 있었다.

26살 생일에 만난 26살 축구캐스터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MBC ESPN 김민아 아나운서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MBC ESPN 김민아 아나운서 ⓒ 곽진성



그런데 '너, 다시는 안 볼래'하며 축구라는 녀석을 뻥~ 차버렸던 내가, 그 축구란 녀석의 '동반자' 격인 축구 캐스터를 인터뷰 하러 가고 있었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MBC ESPN 김민아 아나운서였다. 그는 <김민아의 유럽축구 GOALS>라는 자기 이름의 축구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열정의 축구 캐스터이기도 했다.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축구팬이 현재의 축구 캐스터를 만나러 간다는 것, 마치 옛 꿈을 찾으러 가는 기분마저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 냉담자인 내게 축구 캐스터 인터뷰는 너무 벅찬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저 2시간 정도의 인터뷰일 뿐이라고 내 스스로 의미를 한정시켰다. 그저 물처럼 지나가는 힘든 취재 일의 연장선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10월 17일 인터뷰 약속이 잡혔을 때 살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17일은 공교롭게도 내 26살 생일이었다. 별로 특별한 것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생일 날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축구장에 가지 않게 된 고1, 그 후 하게 된 9년 동안의 아마추어(?) 학생 기자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내심 재밌는 일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26살 생일 날, 26살 축구캐스터 김민아 아나운서를 인터뷰하게 됐다. 한 작은 카페에서 인터뷰는 진행되었다. 그는 친절한 배려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는 것 같다'는 칭찬과 함께 "쓴 (피겨)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는 힘이 되는 말을 전해주니 말이다. 그 하나하나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런 배려 속에 2시간의 짧은 인터뷰는 끝이 났다.

좀 더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상대방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배려가 인상적이었던 김민아 아나운서, 그의 제안이 빛을 발했다. 그 제안은 내 26번째 생일 날의 소중한 선물이기도 했다.

"아, 혹시요, 인터뷰 내용이나 사진이 부족하다면요. 저 K리그 리포팅하는데 같이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아나운서, 해설위원분들하고 만나보고요."

그의 따뜻한 배려는 10년 '축구 냉담자'를 다시 '축구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축구 캐스터와 K리그 관람하기

며칠 뒤 수원 빅버드(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수원과 전남의 컵대회 결승전 경기가 열렸다. 그 결승전을 축구 캐스터와 동행하면서 (아니, 사실 막 쫓아다니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환상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깊이 있는 중계로 유명한 신승대 캐스터와 국가대표 선수 출신의 유쾌한 해설가 이상윤 해설위원과 만났다는 사실은 가슴 설렌 추억이 됐다. 단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짜로 반겨주는 ESPN 두 중계진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유명한 명사들 만날 때도 애써 담담했던 나지만, 이때 만큼은 어찌나 떨리던지 촌스럽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하하).

결승전에는 비가 내렸다. 가을밤에 내리는 비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경기 시작 전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경기장을 리포팅하는 김민아 아나운서는 카메라가 켜져 있거나, 켜져 있지 않거나 진정 웃으며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나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정한 축구 팬은 역시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문득 나도 한때는,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기억을 무시해 버렸다.

서포터 리포팅이 끝난 후, 중계석으로 돌아와 결승전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현장의 분위기가 어찌나 뜨겁던지 응원 소리 때문에 중계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역시 친절한 김민아 캐스터가 이어폰 한쪽을 나눠주며 들어보라고 줘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김민아 아나운서

김민아 아나운서 ⓒ 곽진성


신승대 이상윤 두 해설위원은 경기 내내 서서 중계를 진행했다. 좋아하는 일을 즐긴다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그 열정이 좋아보였다. 그런 열정 가득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왜 축구장 가는 것을 포기했을까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덕분에 생각나는 것은 유년 시절의 우울한(?) 기억이다. 어릴 적 아버지 말에 속지만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열혈 축구 팬일 것이기 때문이다. 열혈 축구 팬을 포기하게 된 동기. 그 이유는 다소 황당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셨던 아버지가 고1 때 축구장만 가서 공부는 안 하고 놀던 날, 한번에 낚아 버린 것이다. 그 환상의 떡밥은 '83년도에 나타난 별'이었다.

어느날 하루는 아버지가 생뚱맞게 이런 말을 했다. 평소 그런 유치한 말을 안하던 사람인데, 그날 따라 꽤 진지한 모습으로 말해서 나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을 빌자면 83년도에 밤하늘 위로 큰 별이 떴다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 뭔가 클 사람이 나타날 징조라고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 말은 너무 유치찬란해서 '점점점'으로  대신하겠다.

의도는 뻔했다. 너도 좀 공부 좀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낡은 떡밥, 아들을 공부시키려는 사람들의 오래된 수법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한 번 만나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성공하거나, 잘난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사람에게 배우고자 했다. 그 후, 고등학생 때부터 기자를 꿈꿨다. 단지 공부만 하는 기자 지망생이 아니라,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 믿고 이사람 저사람 인터뷰 부탁하던 어리버리 리포터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유치한가. 그 후 9년이 흘렀다. 바뀐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꿈을 좇고 있다. 하지만 알게 된 것은 능력의 부족이었고, 그래서 꿈에서 깨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의 말은 어리버리한 날 꾀었던 낚시였던 것이다.

 축구장에서 만난 이상윤 해설위원, 신승대 캐스터

축구장에서 만난 이상윤 해설위원, 신승대 캐스터 ⓒ 곽진성


꿈에서 깨어보니 다시 현실이다. 밤 늦은 우천경기. 그리고 컵 대회 결승전. 짖궂게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와 서포터스 열정에 덕분에 그라운드는 찬 기운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경기는 2대 0 수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긴 수원 선수나 진 전남 선수나 모두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어 보였다. 목청껏 소리 높였던 양쪽 서포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러웠다. 그들은 즐거웠고, 또 행복해 보였다. 나도 한때는……,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내리는 비 속에. 작은 기억들을 자꾸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다 문득, 고개들어 옆을 봤다. 그런데 옆에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있었고 TV에서만 보던 너무나 좋아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 하나가 내 가슴에 남았다. 그렇게 축구는 다시 내 마음의 '열정'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MBC ESPN 스포츠 아나운서 김민아(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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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축구(스포츠) 아나운서가 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or 무작정 떠나서 프랑스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2. 축구(스포츠) 아나운서의 매력:
말이 필요없죠. 우선 경기마다 짜릿짜릿한 엔돌핀을 만들어주잖아요.

3.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려면 갖춰야할 것 세가지:
1. 선수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체력
2. 좋은 소리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목소리
3.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
중계방송은 기본 두 시간, 길 때는 5시간을 넘을 때도 있어요. 선수들과 그 경기를 함께 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적재적소에 그 상황을 표현해낼 수 있는 소리와 멘트가 있어야 하죠. 방송은 정말 협업이에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하거든요.

특히 중계방송에서 스포츠캐스터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림에 인공호흡기처럼 숨을 불어넣는 작업을 할 뿐이거든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이란 커다란 퍼즐판에 저는 단 한 조각일 뿐이에요.

4. 스포츠 아나운서 지망생들에게 해주고픈 말:
언제나 직업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죠. 방향을 정했다면 누군가의 도움보다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방법들이 더 많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무언가를 준비한다면 '노력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김민아 축구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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