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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작은 분교
 바다가 보이는 작은 분교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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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초등학교 하소분교의 유치원생들. 사진기를 들이대니 서로 찍겠다고 몰려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한산초등학교 하소분교의 유치원생들. 사진기를 들이대니 서로 찍겠다고 몰려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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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통영까지 와서 여객선터미널로 오세요. 버스로는 오기 힘들고 택시가 편할 거예요. 6천원 정도 나올랑가?

여객선터미널에 정각마다 배가 한 대씩 있는데, 그걸 타고 내리면 바로 버스가 기다려요. 그거 타고 하소분교에 내려달라고 하면 돼요."

경남 통영 하소면 한산초등학교 하소분교장. 어떻게 가는지 물어봤더니 교사 하수정씨는 길고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왠지 머나먼 미지의 아름다운 섬처럼 느껴졌다.

한산도는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 벌어진 곳. 딱 그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이 '긴 칼 옆에 차고 수루에 올라' 보았다는 그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다. 몽롱한 기분이 되어 마을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30분 가량을 달려 나를 조용한 길 어딘가로 데려다 주었다. 그 흔한 푯말 하나 없는 작은 하소분교장. 언덕에 조금 올라서니 나지막한 교문이 보였다.

도착한 시간은 낮 12시 반, 마침 점심 때였다. 배고프던 차에 염치 불구하고 끼여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는데, 기름이 반지르르 도는 자장 소스에 탱글탱글한 묵, 그리고 잘 익은 묵은지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하소분교에서 20년이 넘게 아이들의 점심을 책임지고 있다는 조리사 아주머니는 내가 밥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20년 동안 밥을 먹인 아이가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는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맛있는 밥먹는 모습을 볼 때, 지금은 다 떠나고 없지만 그래도 가끔씩 섬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갈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70· 80년대에는 육지에 뒤지지 않았는데

교무실의 화이트 보드. 1학년, 5학년, 6학년이 각각 한 명씩인 하소분교의 재적 현황이 적혀있다.
 교무실의 화이트 보드. 1학년, 5학년, 6학년이 각각 한 명씩인 하소분교의 재적 현황이 적혀있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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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가 일한 20년의 세월동안 하소분교는 많이 변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육지학교에 뒤지지 않을 만큼 학생 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 땐 양식업도 호황이고 살기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데, 지금은 한산도 전체에 거주하는 사람 수가 1500명. 하소분교가 있는 하소리의 주민은 30명 정도다.

젊은 사람들은 "아이들 학교다" "일이다" 해서 모두 빠져나가고, 남은 사람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자연히 학생 수가 줄어들었고, 지금 하소분교의 전교생은 달랑 3명이다. 더군다나 그 중 5학년인 효선이와 6학년인 진수는 남매다. 하소분교생보다 1명 더 많은 병설유치원생 4명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나마 위안거리다.

하소분교의 나홀로 입학생 김지원(8)은 몇 년간의 긴 터울을 뚫고 오랜만에 나타난 입학생이다.

나홀로입학생 지원이가 운동장에서 주전자로 그림 그리기 수업을 받고 있다.
 나홀로입학생 지원이가 운동장에서 주전자로 그림 그리기 수업을 받고 있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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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짊어진 막중한 임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원이는 부리나케 밥을 먹고는 효선이·진수와 함께 부르마블 게임에 한창이었다.

"오빠야, 그거 내 꺼다 아이가."
"내 꺼다 아이가. 니 30만원 내라."
"알았다."

주사위만 굴리지만 뭐가 그리 재미난지 티격태격 꺌꺌거린다. 그러다 느닷없이 얼굴을 돌리더니 이빨을 보여주는 지원이. 작고 앙증맞은 이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이빨 났어요. 오빠야는 아직 하나도 안 났는데 나는 두 개나 났어요."

수업은 안 하느냐고 물으니 밥 먹고 나면 방과후 수업이 시작된단다. 하소분교엔 총 4명의 선생님(초등학교 3명·유치원 1명)이 있다. 아이들을 아들·딸 같이 아끼는 선생님들은 집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늘렸다.

아이들의 <이수일과 심순애>, 참맛이 모자라

요즘은 10월 말에 있는 학예회 연습에 한창이다. 한산초등학교 본교생들과 분교생들이 모두 모여서 일 년에 한 번씩 마을 축제를 여는데, 하소분교 어린이들이 준비한 연극은 <이수일과 심순애>. 아이들은 "저를 용서해 주심~미" "것이었던 것이어~었다" 등을 흉내 내며 제법 연습에 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수일과 심순애>의 포인트는 간드러진 비음과 능청스럽고 촌스러운 연기인데, 연극을 본 거라곤 작년 학예회뿐인 아이들이 '숙성된 참맛'을 내는 데는 조금 힘들어했다.

아이들이 연극이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섬과 육지를 갈라 놓은 넓고 깊은 바다가 이 때만은 조금 원망스럽다.

수업을 끝나자 아이들은 낮잠 자던 유치원생 동생들을 깨워서 우르르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재빨리 뒤쫓아갔지만 따라잡을 재량이 없었다. 겨우 유치원생들을 따라 미끄럼틀을 몇 번 타다보니, 초등학교 학생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휑하고 적막한 교문 앞에 잠시 기다리고 서 있자니 자전거로 나를 데리러 왔다. 아이들이 내 손에 묵직하게 매달렸다.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 연습을 하는 아이들. 오빠, 언니보다 작은 지원이가 옆에서 귀엽게 눈을 흘긴다. 연기 실력만은 오빠, 언니 못지 않다.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 연습을 하는 아이들. 오빠, 언니보다 작은 지원이가 옆에서 귀엽게 눈을 흘긴다. 연기 실력만은 오빠, 언니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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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들. 왼쪽이 지원이. 오른쪽이 다설살백이 시광이다.
 아버지가 사준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아이들. 왼쪽이 지원이. 오른쪽이 다설살백이 시광이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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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의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지원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제주도까지 가서 고기를 잡는 아버지 김호영(35)씨는 두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내가 찾아간 날이 마침 집에 오신 날이었다. 팔에는 거친 20㎝가 넘는 길고도 깊은 상처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처에서 파도가 느껴졌다.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 검게 그을린 바다 사나이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부름에는 살뜰하게 반응했다. 건전지가 떨어진 장난감을 보자 아무 말 없이 드라이버를 꺼낸다. "아이들 많이 못 봐서 섭섭하시겠어요"라는 나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 떨어뜨린다. 왜 보고 싶지 않을까.

다음 달에 있을 지원이 생일 선물로 미리 커다란 곰인형을 챙겨온 아버지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원이와, 같은 학교 유치원생인 시광이는 곰 인형에 올라타고 구르며 장난을 쳤다.

허리가 좋지 않아서 고기잡이가 어려울 때도 있지만, 아이들 생각하면 쉴 수가 없다며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평생을 도시처녀로 살아오다가 눈 맞은 남자와 어찌어찌 섬까지 오게 되었다는데, 그 삶이 힘들 법도 하지만 한산도가 좋다고 했다.

검게 그을린 아이들이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아름다움 섬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면서 검게 그을린 아이들은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숙제공책을 폈다. 책상이 없어서 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숙제지만 진지했다.

하소분교의 8살 난 지원이는 숙제도 빨래도 청소도 알아서 척척이고, 유치원에 다니는 6살 난 도현이는 벌써 3명의 동생을 둔 똑순이다.

뒤늦게 마음을 연 지원이의 동생 시광이(5)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중 8할이 뛰고 구르는 통에 정신이 없었지만 좋았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처음엔 외부인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 안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학생이 단 세 명뿐인 '초미 니학교'지만, 그보다 더 많은 유치원생과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있는 한, 이곳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자마자 숙제 공책을 펼치는 지원이. 반듯한 글씨가 깔끔하다.
 오자마자 숙제 공책을 펼치는 지원이. 반듯한 글씨가 깔끔하다.
ⓒ 이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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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나홀로 입학생, #하소분교, #한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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