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SK와이번스 대 우리 히어로즈의 9회초 2아웃 상황.

타석에는 히어로즈의 정기영이, 마운드에는 7회 초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윤길현이 있었다. 윤길현은 선발투수인 김광현이 교체되며 올라온 이후, 단 한 명의 타자도 1루로 출루 시키지 않는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수는 지난 8월 31일 한화이글스 전에서 부상을 입은 박경완 대신 전날(2일)부터 꾸준히 출장한 정상호. 전날에 이어 3일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윤길현의 5번째 공이 정상호 포수의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깔끔한 삼진이었다.

이 순간만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다는 듯, 1루 쪽 SK와이번스 측 덕아웃과 응원석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SK와이번스를 이끌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국내 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로 100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38발의 축포가 문학구장을 뒤덮었다. SK와이번스로 오면서 '삼삼하고 팔팔한 야구감독'을 생각하며 새롭게 정한 배번 38번과 일치하는 축포였다. 좌측 대형 전광판에는 올해 66세 노인으로 한 평생을 야구에 투신한 그의 과거 영상이 이어졌고, 영상이 끝나자 1000승 기념 티셔츠를 입은 김성근 감독이 나타났다.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 직전 9월 3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이번스 대 히어로즈 프로야구 경기의 9회초 2아웃 상황. 타석에는 히어로즈의 정기영이, 마운드에는 7회초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윤길현이 서 있다. 윤길현은 5구째에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8-0 SK와이번스의 승리로 마치며, 김성근 감독 1000승을 자축했다.

▲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 직전 9월 3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이번스 대 히어로즈 프로야구 경기의 9회초 2아웃 상황. 타석에는 히어로즈의 정기영이, 마운드에는 7회초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윤길현이 서 있다. 윤길현은 5구째에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8-0 SK와이번스의 승리로 마치며, 김성근 감독 1000승을 자축했다. ⓒ 이준혁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마술 같은 변신술

2008년 9월 3일 21시 12분. 김성근 SK와이번스 감독이 히어로즈를 8-0의 점수로 압도적으로 이기며 프로야구 통산 1000번째 승리를 일궈냈다.

감독으로 있던 17시즌 동안, 1941경기를 치러 892번 지고, 49번을 비기며 일궈낸 값진 성과. 김응용(현 삼성라이온즈 사장, 전 해태타이거즈·삼성라이온즈 감독) 전 감독이, 1983년부터 2004년까지 총 21시즌에 걸쳐 이뤄낸 1476승(2679경기)에 이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일궈낸 1000승의 기록이기도 하다.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 '야구의 신'이다. 축약형으로 '야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2년의 한국 시리즈 때 상대팀 사령탑이었던 김응용 당시 삼성라이온즈 감독이 우승 소감으로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운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전년도에 하위권에서 맴돌았다 하더라도, 그가 팀을 맡은 이후로는 '아무리 운이 안 따라도' 포스트시즌의 진출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게 변했기에 '야신' 별칭은 더욱 굳어져갔다.

단 한 번 팀을 옮긴, 그것도 강팀에서 강팀으로 이적한 김응용 사장과 달리, 김성근 감독은 여섯 시즌 이상 같은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다. 그나마도 태평양, 쌍방울, LG 등 그때 그때의 약팀들만을 도맡았다. 지난 2007년부터 지금까지 있는 SK와이번스의 경우, 직전 시즌(2006년)의 성적은 6위, 승률이 5할조차도 안되는 하위권팀이었다.

팀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전력을 낸 김 감독이지만 그는 그동안 자주 내쳐졌다. 2002년에는 포스트시즌 준우승을 일궈냈음에도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는 구단과 맞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야구계 주류에 속해 있지 못했다. 거기에 '재일교포'라는 꼬리표가 마치 주홍글씨처럼 야구 인생에 따라다녔기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더했다.

김성근 감독의 '강팀 만들기' 진가는 지금은 없어진 쌍방울레이더스에서 빛을 발했다. 1991년 창단 이래 7-8-7-8-8 순으로 하위권에서 맴돌던 쌍방울레이더스는, 1996년에 김성근 감독 선임 후 정규시즌 2위, 포스트시즌 3위로 변화했다. 이는 여기저기 다른 팀에서 유니폼을 벗어야 할 위기에 처한 선수들을 끌어모아 그들을 주축으로 이룬 성적이기에 더욱 값지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의 실현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는 2005년, 한국프로야구 통산 1000승의 꿈을 접고, 일본 지바롯데마린스 코치로 떠난다. 사리사욕이 아닌 야구와 선수를 위해 구단과 갈등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이, 그를 '고집불통' 이미지로 만들었다. 결국 더 이상 다른 구단은 그를 찾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국프로야구 통산 1000승을 이루지 못하는 줄 알았다.

인터뷰 중인 김성근 감독 한국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의 1000승 감독이 된 김성근 감독. 경기를 마치고 방송사와 인터뷰 촬영중이다.

▲ 인터뷰 중인 김성근 감독 한국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의 1000승 감독이 된 김성근 감독. 경기를 마치고 방송사와 인터뷰 촬영중이다. ⓒ 이준혁


경쟁유도 강훈련의 뒤에 느껴지는 사람냄새

김성근 감독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언제나 '혹사'라는 단어가 나온다. 하지만, 그들이 '혹사'라고 주장하는 선수들은, 비록 지금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김 감독을 '스승'이라고 여기며 감사해 한다. 김 감독의 야구에는 '주전 보장'이 없다. 매일매일 타순을 예측할 수 없는 '플래툰 시스템'은 그의 야구의 특징. 1군 주전으로 뛰던 선수들이라면 김 감독에게 불만을 가질 법하나 그런 목소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김성근 감독은 27세의 나이에 선수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30세 나이인 1972년 기업은행 야구팀 감독을 맡았다. 37년 동안의 오랜 지도자 생활. 그는 팀을 위해 선수를 키우기도 했지만 선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했다. '임호균 각서파동'과 '쌍방울레이더스 감독 시절의 사비로 선수들의 숙식을 마련한 일' 등은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사건들이다. 이 사람 냄새 나는 김성근 감독의 일화는 오랜 지도자 생활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선수들은 김성근 감독의 헌신과 믿음에 실력으로 보답했다. 지금도 명경기로 유명한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당시 LG트윈스 감독) 때에는 '대퇴골두무혈괴사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뛰는 것조차 힘들던 김재현 선수(현 SK와이번스 선수)를, 그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선수생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으로 대타로 기용했다. 그는 역전의 적시타를 뽑아내며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 김 감독을 만나기 전에는 평범한 투수였던 김현욱과 신윤호 선수는 '구원투수'임에도 각각 20승과 15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을 혹독하게 대하지만 유니폼만 벗으면 온화한 미소로 '야구인 선배'가 되는 김성근 감독. 2002년 LG트윈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의 환갑잔치를 성대히 열어준 것도 그렇게 혹독히 경쟁체제로 내몰던 제자들이었다. LG트윈스 시절 제자들부터 쌍방울레이더스, 태평양돌핀스, 삼성라이온즈, OB베어스 등 당시 그가 맡았던 경험이 있던 팀의 제자들은 물론 LG트윈스 일부 직원들까지 그의 환갑잔치에 찾아와 "프로야구팀 두 팀 신설이 가능할 정도"라는 농담까지 나왔다.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기념 동영상 김성근 감독의 배번인 38번에 맞춘 38포의 축포로 인해 뿌옇게 된 문학구장에서 좌측 대형전광판에 상영중인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기념 동영상.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의 내용을 깔끔한 화면에 담아 상영했다.

▲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기념 동영상 김성근 감독의 배번인 38번에 맞춘 38포의 축포로 인해 뿌옇게 된 문학구장에서 좌측 대형전광판에 상영중인 김성근 감독 1000승 달성기념 동영상.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의 내용을 깔끔한 화면에 담아 상영했다. ⓒ 이준혁


'천상 야구인' 김성근

김성근 감독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야구만을 생각했고, 야구라는 세계 속에서 변화했다는 표현이 맞는 천상 야구인이다.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야구로 유명한 학교 대신 공립학교(가츠라고등학교)를 택해야 했다.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하며 안장에 앉지 않고 페달을 돌리며 양발의 스피드를 키웠고, 막노동 현장에서 남은 벽돌로 피칭하며 연습을 했다. 기업은행 야구단의 강력한 요청을 받은 1964년에 조국에서 야구를 하고자 가족을 뒤로 하고 한국에 영구귀국하며 평평 울었다고 한다. 투수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당시 투수의 체계적 관리 자체가 없던 상황에서 혹사당하다 27살에 선수로서의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서투른 한국어로 은행창구 일을 볼 수 없었기에 지도자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야구 지도자로 최고가 되고자 노력했다.

1969년에 첫 지도자를 맡을 때부터,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와 같은 선수 분업화 야구를 구상해 실제화했다. 이후 지금도 김 감독을 따라다니는 단어 중 하나인 '데이터 야구'를 국내에서는 처음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팬을 향한 야구선수의 쇼맨십 행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던 그는 바비 밸런타인 감독과 함께 일본에서 코치로서 생활한 후, SK와이번스가 주창하는 '팬 퍼스트, 해피 베이스볼(Fan First, Happy Baseball)' 방침에 적극 동참했다. 넉살 좋고 입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과거와 달리 인터뷰에 적극 임했고 현재 각종 야구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늦깍이 개그맨'으로 불릴 정도로 그는 계속 진보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 오랫동안 생활했음에도 그는 아직까지는 우승과 1000승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의 SK와이번스는 그 전 시즌의 6위팀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규시즌 1위' 및 '포스트시즌 우승'이라는 성과를 일궜고, 어제 드디어 결코 못할 것 같았던 1000승을 이뤘다. 2002년에 LG트윈스 감독에서 물러나며(당시 866승, 최고 성적 '정규시즌 2위' 및 '포스트시즌 준우승') 포기해야 했던 일들을, 2007년 SK와이번스 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두 시즌만에 모두 이룬 것이다. 올해도 2위팀(두산베어스)과 압도적 승차(9.5게임차)로 1위를 달리고 있기에 SK와이번스의 정규시즌 1위와, 포스트시즌 우승 가능성은 높다.

김성근 감독은 현재 SK와이번스와 2년간의 계약을 맺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2년 계약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고, 그의 나이는 66세이다. SK와이번스 팬들은 일관되게 김 감독과의 재계약을 바라며 구단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릴레이 건의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김 감독 또한, 그를 불러줬고 그의 1000승과 우승에 바탕이 된 SK와이번스에 고마운 마음이 크고, 구단도 그 동안의 타 구단과 달리 김 감독을 매우 융숭히 대우한다는 후문이다. 연령과 능력을 고려한 현재 상황에서 그의 앞에는 다양한 선택의 길이 열려 있다.

김성근 감독 통산 1000승 축하 사진촬영 2008년 9월 3일 21시 12분. SK와이번스가 히어로즈를 8-0으로 이기며 김성근 SK와이번스감독 통산 1000승이 달성됐다.

▲ 김성근 감독 통산 1000승 축하 사진촬영 2008년 9월 3일 21시 12분. SK와이번스가 히어로즈를 8-0으로 이기며 김성근 SK와이번스감독 통산 1000승이 달성됐다. ⓒ 이준혁


끊임없는 그의 인생의 변화 과연 어디로 갈까?

김성근 감독의 내년은 어떻게 될까? 실력은 실력대로, 감각은 젊은 감독만큼의 젋은 감각으로 꾸준히 발전해온 그이기에, 많은 야구 팬들은 그의 향후 행보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난 2002년 LG트윈스 감독 해임 후 2년 동안 사회인 야구단을 돌며 많은 것을 전수한 전례가 있다. 또 SK와이번스 감독 계약 무렵, 감독을 그만 둘 경우 야구 꿈나무를 육성하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때문에 설령 재계약 포기 및 프로야구 감독 은퇴를 택해도 평생 '현역 야구인'으로 살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SK와이번스의 '정규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직행'의 사실은 이변이 없어 보이지만 아직 정규 시즌이 남아 있고, 김성근 감독은 남은 경기에 더욱 집중하는 듯하다. 그에게는 1000승이라는 대기록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SK와이번스의 다음 경기 승리와 한국시리즈 우승이 더욱 중요하다. 김성근 감독은 오늘의 경기를 제대로 치르는 것이 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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