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벤더의 연인들> 포스터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 포스터 ⓒ (주)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사 구안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은 나를 세 번 놀라게 했다.
 
첫 놀람은 관객들이었다. 평일 오전 11시 40분에 시작하는 영화라면, 아무래도 오전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중장년들이 많이 보는 시간대이긴 하지만 '이거 예매도 안했는데 못 보는 거 아냐?'할 정도로 영화관 입구에는 중년과 머리 희끗한 노년 여성들이 가득했다.
 
청년 두 명을 제외하고 둘 혹은 셋이 함께 온 여성 관객들로 120개의 좌석은 빈 곳이 없었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영화의 내용 때문인지 개봉 이후 줄곧 중장년 여성들로 거의 매회 자리가 다 찼다"고 했다.
 
정말 '요즘 공연은 중년 이후 관객을 겨냥하면 된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10대, 20대일 때 엄마들의 영화 관람이란 아주 특별한 사람을 빼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엄마들이 어느 새 알아서, 찾아서 영화를 즐기는 세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두 번째 놀람은 칠순의 여배우들이었다. 두 주인공 '주디 덴치(우슐라 역)'와 '매기 스미스(자넷 역)'는 모두 1934년 생. 영화가 2004년도에 만들어졌으니 촬영할 때 이미 나이 70세였다. 주름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 섬세한 연기라니. 어떤 과장도 꾸밈도 지나침도 없는 그들의 웃음, 손짓, 눈빛 하나하나가 그들의 삶이자 연기였다.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의 한 장면 할머니 자매로 분한 매기 스미스(왼쪽)와 주디 덴치

▲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의 한 장면 할머니 자매로 분한 매기 스미스(왼쪽)와 주디 덴치 ⓒ (주)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사 구안

요즘 우리에게도 나이 들어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여배우들이 많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 늘 2% 아쉬움을 주는 배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년 이후'가 눈길을 끈다는 시대 흐름에 무조건 맞추다 보니 과장된 혹은 만들어진 이미지에 기대 자신의 연기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면 씁쓸하다. 좋은 작품이 계속 나온다면 달라질 거란 기대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세 번째 놀람은 노년에 찾아온 가슴 설렘과 사랑에 함께 가슴 아프고, 나 역시 거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용한 해변 마을에 살고있는 노년의 두 자매 자넷과 우슐라. 언니는 책을 읽고 동생은 뜨개질을 하고 함께 잠들고 같이 정원 손질을 한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이들의 일상은 이렇게 평온하게 이어질 것 같았다.
 
폭풍우가 갠 아침, 해변에 쓰러져 있는 청년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정성껏 간호하고 돌본다. 아무 일도 없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나고 생기가 돈다. 청년 '안드레아'의 회복과 함께 두 자매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더 나아가 우슐라는 감정의 폭풍을 겪는다.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동생을 보며 언니는 탄식한다.
 
"널 어쩜 좋니!"
 
그러나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안드레아는 피치 못할 사연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 한 마디 못하고 떠나가고...
 
아들도 아닌 손자뻘 되는 청년에게 끌리는 마음. 꿈 속에서까지 갈망하는 사랑. 한 마디에 행복해지고 무심한 행동에 토라지고, 노년의 사랑 역시 다른 사랑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에서 남다름이 드러난다. 그가 떠날 수밖에 없음을, 또 보내야 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받아들일 때 아픈 가슴은 오히려 더 쓰라리지만 바람에 날려보내듯 파도에 실어보내듯 참아낸다. 보내는 것 역시 사랑임이 분명해서일 것이다. 삶의 경험과 살아온 인생의 경륜이 그것을 분명히 알고 그 때를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의 한 장면 꽃미남 쳥년 안드레아의 바이올린 연주에 박수를 치는 두 할머니

▲ 영화 <라벤더의 연인들>의 한 장면 꽃미남 쳥년 안드레아의 바이올린 연주에 박수를 치는 두 할머니 ⓒ (주)데이지엔터테인먼트, 영화사 구안

 

그래서 두 할머니는 안드레아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이름을 얻고 제대로 된 연주 무대에 섰을 때 뿌듯함으로 지켜보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연주회가 끝난 후 더 오래 보고 싶고 더 깊이 안아주고 싶었겠지만 바쁜 안드레아를 '기꺼이' 놓아주고 돌아서는 할머니들.

 

연주회장의 회랑을 걸어나가는 그들의 나란한 뒷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사랑은 사랑이되, 줄 때와 거둘 때를 제대로 알고 행했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시종 잔잔했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멋진 풍경, 노년의 일상이 함께 어우러져 충만한 기분을 맛보게 해주었다. 노년의 사랑도 역시 사랑이다. 그러나 그 원숙함만은 젊음이 도저히 따르지 못할 것이다. 모처럼 만난 좋은 노년 영화 덕에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행복했다.

덧붙이는 글 | 영화 <라벤더의 연인 Ladies in Lavender, 영국 2004>(감독 : 찰스 댄스 / 출연 :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다니엘 브륄 등)

2008.08.05 17:14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영화 <라벤더의 연인 Ladies in Lavender, 영국 2004>(감독 : 찰스 댄스 / 출연 :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다니엘 브륄 등)
라벤더의 연인 노년 영화 노인 노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