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선풍기를 3단으로 틀면 날아갈 것 같은 연약한 소녀가,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킨다. '국민 여동생'으로 떠오른 '피겨 요정' 김연아 이야기다.

북한에도 김연아만큼이나 큰 사랑을 받은 '인민 여동생'이 있다. 이제 그녀도 어느덧 한국 나이로 30세가 됐으니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북한이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는 유도 57㎏급의 계순희가 그 주인공이다.

'유도 여왕' 료코를 무너뜨린 '인민 여동생' 계순희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유도 종주국 일본은 여자 유도 48㎏급의 금메달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유도 여왕' 다니 료코(결혼 전 성은 '다무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료코는 만 16세의 나이에 출전했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는 국제 대회에서 무려 84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지구상에 료코의 적수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 료코가 애틀란타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가 바로 북한 계순희였다. 당시 만 16세였던 계순희는 올림픽은커녕, 국제 대회 출전 경험조차 없었던 '철저한 무명'이었다. 료코의 올림픽 첫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의기양양하던 료코는 무명의 계순희를 상대로 4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겁없는 계순희가 적극적으로 료코를 공략했다.

계순희는 결국 효과 2개를 따내면서 '난공불락' 료코를 무너뜨리고 북한에 금메달을 안겼다. '인민 여동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계순희가 따낸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북한 선수단의 마지막 올림픽 금메달이다.

12년 만에 북한 선수단에 금메달 안겨줄까

 계순희는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여전히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계순희는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정도로 여전히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 국제유도연맹


애틀란타 올림픽 이후, 계순희는 두 번이나 체급을 올렸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52㎏급에서 동메달을 따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57㎏급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계순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1년 독일 뮌헨 대회에서 52㎏급으로 정상에 오른 계순희는 2003년 일본 오사카 대회부터 57㎏급으로 체급을 올려 3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무려 3개 체급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특히 2006년 2월에 유도 감독 김철씨와 결혼식을 올린 후 도하 아시안게임에 결장하며 은퇴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통산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계순희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12년 만에 금메달을 노리는 북한팀의 간판 선수다. 북한은 여자 축구와 역도 56㎏급 차금철 등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만, 계순희만큼 확실한 금메달 후보는 없다.

올림픽 금·은·동메달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전직 '인민 여동생' 계순희. 이제는 '노장'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인민 주부' 계순희가 12년 만에 올림픽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편 한국은 여자 57㎏급에 강신영이 출전해 대진에 따라 계순희와 '남북 대결'도 기대할 수 있다. 1977년생으로 계순희(1979년생)보다 두 살 많은 강신영은 서울지방경찰청 소속의 현직 경찰관으로 올림픽 출전은 생애 처음이다.

계순희의 제물이 됐던 일본 '유도 여왕' 다니 료코

 일본의 '유도 여왕' 다니 료코

일본의 '유도 여왕' 다니 료코 ⓒ 국제유도연맹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계순희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했던 '유도 여왕' 료코. 그녀는 충격적 패배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쓸쓸하게 현역 생활을 마감했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료코는 더욱 강해졌다. 데뷔 후 꾸준히 48㎏급을 유지하고 있는 료코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메달만 4개(금2·은2)에 이르고, 격년제로 치러지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993년부터 무려 7회 연속 우승(2005년 출산으로 불참)을 차지해 그야말로 여자 유도의 살아있는 신화가 되고 있다.

어느덧 만 32세의 아기 엄마(료코의 남편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다니 요시모토)가 된 료코는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여자 48㎏급의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다. 만약 료코가 베이징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건다면 여자 유도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3연패'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만약 계순희가 체급을 올리지 않았다면 료코의 유도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본과 북한을 대표하는 '유도 여왕'의 맞대결을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다는 점은 스포츠팬들에게는 무척 슬픈 일이다.

베이징 올림픽 계순희 다니료코 여자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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