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호건의 인기

 

<인크레더블 헐크> 액션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

▲ <인크레더블 헐크> 액션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 ⓒ 마블 코믹스 유나이티드

어린 시절 내가 '헐크'를 처음 접한 것은 만화책이나 TV시리즈 <두 얼굴의 사나이>가 아니라 AFKN에서 방영하는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월드 레슬링 페더레이션)'를 통해서였다.

 

WWF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비롯해,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영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우리는 WWF의 캐릭터나 그들의 관계를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친구 셋 이상만 모이면 프로레슬링이 가짜다, 진짜다 토의하곤 했다.

 

그런 WWF의 캐릭터 중 많은 아이들의 인기를 얻은 건 단연 '헐크 호건'이었다. 그는 WWF의 조잡한 이분법적 세계에서 나름 '선'의 역할을 맡았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센 캐릭터였다. '얼티밋 워리어' 등이 그의 인기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래도 최고의 인기는 역시 헐크 호건의 몫이었다. 심지어 그는 영화의 주연배우로도 활약하지 않았던가.

 

좀 더 젊고 잘생긴 얼티밋 워리어 등을 제치고 헐크 호건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의 이름 '헐크'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항상 경기 초반, 상대편에게 흠씬 두드려 맞았다. 동양인으로서 그의 나이를 가늠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지만, 얼핏 봐도 그는 다른 레슬러들에 비해 늙은 편에 속했기에, 그가 맞는 장면은 그만큼 보기에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다시 일어났다. 헐크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의를 찢고 포효를 내지르며 자신이 화가 났음을 모든 이에게 알렸고, 그 후에는 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의 괴로워하는 표정에 가슴 아파했고, 그의 극적인 승부에 열광했다.

 

헐크 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헐크 호건

▲ 헐크 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헐크 호건 ⓒ WWE 홈페이지

 

결국 많은 이들이 헐크 호건을 사랑한 것은 그의 굽히지 않는 용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 마주치건 포기하지 않았고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분노를 분출시켜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

 

그에게 헐크란 단순히 내 몸 안의 괴물이나 이중성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 내재되어 있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잠재력'이었다. 비록 그것은 상의를 찢는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식으로 조잡하게 표출됐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보면서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지 모르는 헐크를 떠올리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현대 사회의 온갖 억압 속에서 분노조차 마음내로 분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헐크는 하나의 로망이요, 우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헐크가 이제 영화로 돌아왔다. 헐크 호건이 어느덧 쉰을 훌쩍 넘겨 더 이상 분노의 표출이 미덕이 되지 않는 이 시점에, 헐크가 원작에 충실한 모습으로 CG라는 기술적 향상과 함께 스크린으로 귀환한 것이다. 스크린 속 헐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헐크는 과연 20년 전의 헐크 호건처럼 사람들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스크린에서의 헐크

 

<헐크> 작가주의의 경향이 짙었던 이안 감독의 <헐크>

▲ <헐크> 작가주의의 경향이 짙었던 이안 감독의 <헐크> ⓒ 유니버설픽쳐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이번 스크린 속 헐크의 귀환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헐크는 이안 감독의 영화 <헐크>를 통해 관객들에게 선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헐크의 탄생 배경과 그 이중성을 고민하는 인간, 그리고 헐크를 탄생시킨 아버지와 헐크가 된 브루스 배너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재구성한 영화 <헐크>.

 

그러나 이안 감독의 <헐크>는 평단이나 대중들에게 양극단의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혹자들은 이안의 작가주의가 묻어 있는 영화로 <헐크>를 반겼지만, 또 다른 자들은 영화 <헐크>가 그 소재만 차용했을 뿐 기존의 헐크와 너무나도 다른 헐크를 탄생시켰다고 힐난했다.

 

헐크라면 분명히 자신에게 주어진 억압으로부터 분노를 표출하며 변신하는 과정과 선과 악의 대결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이안의 영화에서는 배너의 이중성과 아버지와의 갈등을 강조하면서 이 부분이 상대적으로 간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불분명함이 헐크의 영웅성을 앗아감은 물론, 배너의 정체성 강조가 액션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반면 이번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의 헐크는 그 원작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헐크의 기존 이미지를 복원하는 데 큰 의미를 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블은 작가주의의 영향이 짙었던 이안 감독의 헐크를 뛰어넘어, 원작에 가까운 헐크를 스크린으로 옮김으로써 헐크를 영웅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액션영화의 쾌감을 선사해 흥행에 성공코자 했다. 그것은 마블이 차후 그들의 히어로를 모아 속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블스의 이와 같은 계획은 어쨌든 성공한 듯하다.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는 무난하게 흥행했으며, 헐크는 다시금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헐크>와 <인크레더블 헐크>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배너(에드워드 노튼 분)의 내면세계는 영화 <헐크>처럼 복잡하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고민하던 전작과 달리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배너의 명제는 간단명료하다. 바로 헐크의 제거. 그는 끊임없이 치료제를 구해 다니며, 심장박동수가 올라가 헐크로 변할라치면 명상이나 깊은 심호흡 등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고자 한다. 

 

따라서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는 영화 <헐크>에 비해 액션에 충실할 수 있다. 액션영화의 공식대로 고민은 짧게, 액션은 화끈하게 선사한다. 오프닝을 통한 짧은 배경설명과 영화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드는 초반부의 골목 추격신, 그리고 마지막 헐크와 어보미네이션과의 결전 등은 액션영화로서의 <인크레더블 헐크>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배너의 파트너 베티 헐크의 조력자 베티

▲ 배너의 파트너 베티 헐크의 조력자 베티 ⓒ 마블 코믹스 유나이티드

 

또한 이와 같은 배너에 대한 명료한 해석은 영화 속 잔재미를 더해주는데 배너가 베티와 사랑을 나누던 중 심장박동수가 올라가자 헐크로 변할까 봐 그만두는 장면과 뉴욕에서 거친 택시 기사를 만난 뒤 흥분을 조절하는 배너와 과격하게 반응하는 베티의 기막힌 조화는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름 아닌 강력한 상대방의 유무에 있다. 두 영화가 액션 영화를 표방한다면 주인공만큼이나 그 상대 악역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헐크>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되지 못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그와 상대할 만한 호적수가 없기 때문이다. 헐크라고 한다면 한 사람의 이중성만큼이나 그 강한 파괴력 또한 중요한 특징일 텐데, 뚜렷한 적을 가지지 못한 헐크의 원맨쇼는 싱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헐크인데, 일반 군인들이 아무리 좋은 총을 갖고 덤벼봤자 그 싸움이 어찌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배너의 아버지가 헐크의 호적수로 등장하여 한판 대결을 벌이지만, 그것은 선악 간의 대결이라기보다 정체성 문제의 연장선에 가깝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극복의 장엄한 서사인 것이다.

 

헐크의 맞수 어보미네이션 헐크를 헐크답게 만드는 맞수

▲ 헐크의 맞수 어보미네이션 헐크를 헐크답게 만드는 맞수 ⓒ 마블 코믹스 유나이티드

 

반면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는 막상막하의 호적수와 선명한 선악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데, 헐크의 맞수 어보미네이션의 강력함은 다름 아닌 헐크가 보장한다. 영화 <아이언맨>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 아이언 몽거가 아이언맨의 그림자였듯이, 어보미네이션 역시 헐크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의 극대화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80년대 냉전이 끝나고 붉은 군대가 사라진 요즘, 영웅의 내부 안에서 그 적을 찾는 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강력한 맞수의 등장과 선과 악의 대결. 결국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가 가지는 힘은 그 명징함이다. 분명한 선과 악 앞에서 관객들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권선징악의 그 뻔한 스토리가 어떻게 구현되는가 만을 감상하면 된다. 비록 헐크의 겉모습이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정도는 못되지만 혐오스러운 어보미네이션보다야 백배는 낫지 않은가.

 

피아간 명확한 구분의 중요성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90년대 강력한 공공의 적이 사라진 이후 지리멸렬했던 사회운동이 2008년 그 상대방이 확실해지자 다시 활기를 띄듯이, 강력한 상대방의 존재와 그에 따른 선명한 줄긋기는 현실을 해석하고 행동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 내가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의 어보미네이션을 보며 끊임없이 시청광장의 공권력을 떠올렸던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뉴욕에서 싸우고 있는 헐크 도시적 캐릭터 헐크

▲ 뉴욕에서 싸우고 있는 헐크 도시적 캐릭터 헐크 ⓒ 마블 코믹스 유나이티드

 

두 영화의 또 다른 차이점은 바로 공간의 문제이다. 영화 <헐크>에서 헐크의 주 무대는 결코 도시적이지 않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군사실험을 하다가 탄생했기에 사막이 주요 배경이 되며, 도시에서도 짧게 소란을 피우지만 그 도시는 소도시의 느낌이 강하다.

 

이에 반해 <인크레더블 헐크>의 주요 공간은 도심, 그것도 자본주의의 핵심 뉴욕이다. 그 속에 떨어진 헐크는 한 손에 베티를 쥐고 <킹콩>의 오마쥬를 따르는데, 덕분에 헐크는 기존의 고질라나 킹콩 등 뉴욕에 등장한 괴물들과 스파이더맨, 슈퍼맨 등의 영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 헐크의 이중성이란 한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괴물과 영웅의 경계선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헐크 그 자체의 이중성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이 아닌 뉴욕에 등장함으로써 헐크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단순히 헐크의 탄생배경을 통해 그리스 비극을 그려낸 전작과 달리,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는 액션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그 주인공을 도심에 떨어뜨림으로서 관객들에게 많은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

 

앞서 어보미네이션을 보며 광장의 공권력을 떠올리듯, 우리는 헐크를 통해 이미 그 수용의 한계를 넘겨버린 도시문명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 배너가 숨어있던, 나무 한 그루 없이 숨 막힐 듯한 브라질 어느 도시의 모습은 도시문명의 이면이며, 동시에 한계인 것이다.

 

괴물과 영웅의 이중성을 간직한 헐크. 그래도 나는 헐크를 지지한다. 그는 소시민적인 우리와 달리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흥분하지 않고 논리만 따지는 것이 올바름이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그의 거칠 것 없는 분노의 표출은 오히려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의롭지 않은가? 그럼 분노하라.

 

분노하는 헐크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헐크

▲ 분노하는 헐크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헐크 ⓒ 마블 코믹스 유나이티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7.09 15:51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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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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