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가짜로 꾸민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삵 모습입니다.

▲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가짜로 꾸민 사진이 아니라, 실제로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삵 모습입니다. ⓒ 황윤


 1 . '길죽음'을 다룬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

대한민국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아니 사람들한테 자기 삶터를 고스란히 빼앗긴 채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들짐승이 있습니다. 우리들 사람은 들짐승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을 뿐더러, 틈만 나면 어떻게든 마지막 한 마리까지 잡아먹어서 몸기운을 높이고자 침을 흘리고 있는데, 이런 악다구니 같은 삶터에서도 대한민국 들짐승은 끝끝내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모두들 하느님 계신 하늘나라로 떠나는 편이 나을지 모를 텐데, 들짐승들은 섣불리 이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들 삶터가 오그라들어도, 자기들 삶터가 끔찍이 짓눌려도 눈물 한 방울 똑 흘리고는 다시 일어섭니다.

허구헌날 쫓기고 날이면 날마다 죽어나가는 들짐승입니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흘러넘쳐도 죽는 들짐승이요 바다목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건사고’가 없어도 나날이 죽어가는 목숨들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길죽음’, 영어로 하면 ‘로드킬(road kill)’입니다.

길에서 죽으니 ‘길죽음’입니다. 길죽음에 시달리는 짐승 숫자는 통계로 잡힌 적이 없습니다. 그저, 지리산 둘레에서 국립공원 돌봄이를 하는 연구원 몇 분이 여러 해에 걸쳐서 조사를 했을 뿐입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길죽음을 다룹니다. 지리산 둘레에서 길죽음을 연구하는 분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면서 자연 삶터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숨김없이 영화 한 편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2006년 5월 5일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내보입니다. 세 번째 서울환경영화제 때로, 서울 광화문에 있는 역사박물관에서 106분짜리로 내걸립니다. <어느 날 그 길에서> 를 찍은 황윤 감독은 <작별>(2001)과 <침묵의 숲>(2005)이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작별>은 철창에 갇힌 들짐승들 눈길과 눈높이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동물원에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는 들짐승이 어떤 마음이며 어떤 처지인가를 보여줍니다. <침묵의 숲> 은 가파르게 산업주의로 치닫는 한국땅에서 사라진 범이며 여우며 온갖 들짐승들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똑같이 사라지는 모습을 담습니다.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파르게 산업주의로 치닫고 있거든요. 그리고 2006년에 내놓은 작품이 바로 <어느 날 그 길에서>. 황윤 감독은 2005년에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에서 주는 환경예술인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6년 5월 5월 처음 사람들 앞에 선보인 <어느 날 그 길에서>는 포항환경운동연합, 서울대 수의대학교, 경북 울진 왕피천 생태학교, 대구 평화영화제, 충북 제천 살레시오의 집, 11회 부산국제영화제, 6회 인디다큐페스티벌, 강원대 수의학과, 전남 영광 송학중학교, 강릉 인권영화제, 광주 인권영화제, 서울 독립영화제, 3회 부안영화제, 인천녹색포럼, 한겨레문화센터 다큐제작교실, 녹색연합 회원총회, 원주 판부 문화의 집, 진주 독립영상미디어센터, 남원 청소년 민주영화제, 울산 미디어연대, 춘천영상공동체, 강릉 생명의 숲 시민자연교실, 숭실대학교 환경동아리 푸른하늘, 인디포럼 2007, 지리산 뱀사골 산내마을, 동국대 예술대학 대동제, 1회 대청호 환경영화제, 제주 참여환경연대, 서강대 철학과현실 수업, 13회 안성죽산 국제예술제, 곡성군 고사리영상 상영회, 9회 정동진 영화제, 문화관광부 독립예술전용관 상영, 전북 독립영화제, 전주환경운동연합 초록시민강좌, 건국대 동물행동학 수업, 세종대와 생협, 전주사대부고 상영 들을 거쳤습니다. 영화를 찍은 황윤 감독은, <어느 날 그 길에서>에 담았던 그림만큼이나 발품을 팔면서 전국 곳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손수 영화를 걸었고, 몸소 관객을 만났습니다. 영화를 함께 보고 영화 이야기를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3월 27일, 나그네처럼 전국을 돌면서 영화를 걸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고, 첫 ‘극장 상영’을 합니다. 서울, 대구, 광주, 부산, 대전 들에서.

영화 한 대목 영화를 보면, 지리산 연구원들이 길죽음을 살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들이 연구하는 일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인데, 자기 목숨을 내놓고, 길에서 목숨 잃은 짐승 넋을 기리어 줍니다.

▲ 영화 한 대목 영화를 보면, 지리산 연구원들이 길죽음을 살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들이 연구하는 일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인데, 자기 목숨을 내놓고, 길에서 목숨 잃은 짐승 넋을 기리어 줍니다. ⓒ 황윤


 2 . 내가 겪은 들짐승 죽음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고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군대살이를 하고자 강원도 양구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낸 뒤 다시 서울에서 지내다가, 충북 충주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네 해 반쯤 살면서 서울로 볼일을 보러 갈 때면 자전거를 타고 오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4월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서 동네 도서관을 꾸리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몸 가까이 붙인 때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지낼 때(1995)로, 새벽에 신문돌리기를 하면서 짐자전거를 탔습니다. 짐자전거는 1999년 8월 7일, 신문돌리기를 그만둘 때까지 탔습니다. 그런 뒤 충주로 살림을 옮기고 찻삯을 아끼고자 2004년부터 자전거질을 하는데, 국도를 달려 서울을 오갈 때면, 하루에도 열둘∼스물둘쯤 되는 들짐승 주검을 보곤 했습니다.

들짐승 주검을 이때 처음 보지는 않았습니다. 새벽에 신문돌리기를 할 때에도 차에 치여 죽은 비둘기와 고양이와 개를 심심치 않게 보았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밤새 치여 죽은 도시 짐승 주검을 거의 못 봅니다. 부지런한 청소부 아저씨들이 깨끗이 거두어 가니까요. 다만, 새벽 배달일을 하는 신문딸배와 우유딸배는 지겹도록 볼 뿐입니다.

그런데, 국도에서 만나는 짐승 주검은 도시에서 만나던 주검과 사뭇 다르더군요. 국도에서 만난 주검은 하나같이 찰떡 콩떡 개떡 팥떡처럼 진득하게 아스팔트나 시멘트에 들러붙어 있는데, 인절미를 집어먹으면 떡고물이 솔솔 흘러서 바닥에 떨어지듯이, 차들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이백 번 밟고 지나간 짐승들 핏자국이 데굴데굴 굴리고 밟힌 횟수만큼 길쭉하게 늘어져 있습디다. 몸뚱이 작은 짐승이라면 퍼진 핏자국이 조그맣습니다. 몸뚱이 큰 짐승이라면 핏자국도 크고 바퀴에 끄달려 질질질 곱곱이 자국으로 남는 길이도 길어요.

짐승들 주검은 찻길 복판에만 있지 않습니다. 자전거가 달리고 시골사람이 이웃마을을 오가며 걷는 길섶(갓길)에도 있습니다. 아니, 길섶에 드러누운 주검과 한복판에 드러누운 주검 숫자가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고, 자전거를 달리다가 주검을 밟을까 깜짝깜짝 놀라며 뒷거울로 재빨리 뒷차 형편을 헤아린 뒤 찻길 쪽으로 휙 들어가서 주검을 비껴난 뒤 다시 길섶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뒷차들 빵빵질이 얼마나 대단하든지 ……. 자동차꾼들로서는 저놈 자전거가 왜 저러느냐 싶었을 텐데, 자전거 타는 저로서는 ‘나도 살고 짐승 주검도 밟기 싫어서 찻길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국도 길섶은 무척 좁아서 길섶 안쪽으로 갔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논바닥에 쿵떡 하고 찧어야 하거든요.

제 어설픈 짐작입니다만, 차들이 들짐승을 일부러 치여 죽였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습니다. 모든 차가 이러하다는 소리가 아니고, 때때로 이렇게 해서 치여 죽이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자전거로 한창 달리다가 만나는 짐승들 주검을 보고는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주검 생김새나 핏자국 들을 살펴보면서(그때는 사진을 안 찍었습니다. 가엾어서.), 짐승을 친 바퀴자국이 아스팔트길에 남은 자취를 죽 짚어 나가는데, 일부러 길섶으로 차가 파고들어서 짐승을 치곤 했더군요. 찻길에서 120킬로나 140킬로로 빨리 달리던 차가 갑자기 옆으로 틀면서 달릴 때면 길바닥에 고무가 직 글리기도 하잖습니까. 고런 자국이 짐승들 주검 앞에 어김없이 있더군요. 길섶에서 치여 죽은 짐승들 주검 앞에 말입니다. 일부러 들짐승을 치여 죽이고 이 녀석들 주검을 거두어서 고기로 쓰든 가죽으로든 쓸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심심풀이로 치여 죽이든지. 핏자국은 흥건한데 주검은 온데간데없을 때가 많고, 벌써 죽은 짐승인데 그 짐승을 거듭 밟고 지나간 자국이 또렷할 때가 퍽 많았습니다.

길에서 소쩍새를 충주에서 지내던 때,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충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쉬려고 하다가 소쩍새 주검을 만났습니다. 눈물로 보내어 주고 풀숲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 길에서 소쩍새를 충주에서 지내던 때,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충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쉬려고 하다가 소쩍새 주검을 만났습니다. 눈물로 보내어 주고 풀숲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 최종규


3 . 산에서 못 보는 소쩍새를 만나는 국도

국도에서 길죽음으로 떠난 들짐승을 볼 때마다 슬펐습니다. 괴로웠습니다. 온통 피떡이 된 녀석을 풀숲으로 던져 주거나 묻어 주고 싶어도, 싱싱 달리는 차 사이를 뚫고 주검을 거두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길섶에 놓인 주검 가운데 오롯한 녀석도 드물어 손댈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분들 말을 들어 보면, 길을 달리며 돌멩이 하나가 바퀴에 닿을 때에도 느껴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짐승들처럼 부피가 있는 무언가를 밟을 때에야 모르겠습니까. 아니, 모를 수 있겠지요. 무디어지면서. 자기가 모는 자동차에서 얼마나 많은 일산화탄소와 불완전연소물과 중금속 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 배기가스들을 ‘길을 걷는 사람’과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들이마셔야 하는가를 못 느끼듯이.

제가 자전거를 타고다니며 이런저런 길죽음 들짐승을 보았노라 이야기하면, 제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으레, “그래요, 국도는 참 위험해. 그러니까 자전거 타지 말아요. 그러다가 죽으면 어떡해?” 하고 이야기해 줍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렇구나, 내가 국도나 고속도로에서 달릴 때에는 좀더 둘레를 살펴야겠네. 잘못해서 짐승을 치거나 거듭 밟는 일은 없어야겠네. 그리고 시내에서도 자전거를 조금 더 마음써 주어야겠네.” 하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들한테 “그러니까 더 자전거를 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위험하니까 더 타야지요. 위험해지지 않을 때까지 타야지요. 길이란 사람이 다니라고 놓은 자리인데, 자동차를 탄 이도 사람이고 자전거를 탄 이도 사람이며 걷는 이도 사람이에요. 자전거를 타는 이는 걷는 이를 헤아리고, 자동차를 탄 이는 자전거와 걷는 이를 헤아려 주면 좋겠어요. 자전거를 달리면서 느끼지만, 앞에 있는 사람 옆으로 살며시 스쳐 지나가고자 빠르기를 줄인 다음에 다시 페달질을 해도 거의 늦춰지지 않아요. 자동차도 그렇잖아요. 잠깐 빠르기를 줄여서 걷는이와 자전거꾼 옆을 살며시 지나간 다음 다시 악셀을 밟아도 늦춰지지 않아요. 빨리 간다고 해 보아야 얼마나 빨리 가겠어요. 빨리 가려고 하면 빨리 죽거나 남을 빨리 죽일 뿐이라고 느껴요.” 하고 이야기를 보태어 줍니다.

길에서 만난 소쩍새 산이 아닌 길에서 만난 소쩍새입니다. 2006년 12월 21일, 17번 국도에서 만났습니다.

▲ 길에서 만난 소쩍새 산이 아닌 길에서 만난 소쩍새입니다. 2006년 12월 21일, 17번 국도에서 만났습니다. ⓒ 최종규


이렇게 자전거질로 충북 충주와 서울을 오가던 어느 겨울날, 지난 2006년 12월 21일입니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용인을 거쳐 17번 국도를 타고 충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42번 국도에서 17번 국도로 갈아타며 달리는 길에 힘들면 딱 한 번 쉬는 고갯마루가 있는데, 이날도 바로 이 고갯마루에서 쉬려고 자전거를 멈추는데, 이곳에 고요히 죽어 있는 소쩍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국도 길섶에 누운 소쩍새라니?

주검을 가만히 들어 보니 벌써 죽은 지 여러 날 되었습니다. 제가 한 주에 한 번씩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지난주에는 못 보았으니 꼭 한 주가 못 된 주검이었을 텐데, 밟혀 죽은 주검은 아닐 터이고, 날아가다가 버스나 큰 짐차에 치여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여기에서 죽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나마 다시 밟혀서 떡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벼워진 소쩍새를 풀숲에 얌전히 놓아 두고 위에는 마른 가랑잎을 덮어 줍니다. 이즈음 제가 지내던 충주 산골마을에는 소쩍새가 씨가 말랐습니다. 2004년 가을께에 마지막 소쩍새 울음을 들은 뒤로는 구경을 못하고 있었는데, 정작 산골마을에서는 씨가 마른 소쩍새를 국도 길섶에서 다시 보게 되니. 싱숭생숭.

극장 앞 알림판 극장 앞에는 딱 요만한 알림판만 놓여 있는데, 이 알림판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이런 알림판으로 '훌륭한' 영화들이 인천사람들한테 자꾸만 자꾸만 잊혀져 갑니다.

▲ 극장 앞 알림판 극장 앞에는 딱 요만한 알림판만 놓여 있는데, 이 알림판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이런 알림판으로 '훌륭한' 영화들이 인천사람들한테 자꾸만 자꾸만 잊혀져 갑니다. ⓒ 최종규


4 . 영화를 보면서

지난 4월 18일(올해입니다), 인천에 있는 <영화공간 주안>에서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보았습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전국 곳곳을 돌면서 ‘공동체상영’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날짜와 자리 맞추기가 어려워서 이태가 가도록 못 보며 조바심만 내었습니다.

더욱이, 올 3월 27일에 전국 개봉관 몇 군데에서 영화를 건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인천에서는 걸어 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바로 인천사람들 마음가짐과 눈높이 탓이거든요. 이만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눈썰미가 없으며, 이와 같은 영화를 마음껏 즐기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가슴이 모자라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다가 4월 15일부터 걸어 놓는다는 새소식을 듣기 무섭게 <영화공간 주안> 인터넷방에 들어가서 시간표를 살피는데 상영시간이 안 나오더군요. 전화를 걸어 여쭈니 그제야 알려주면서 우물쭈물 얼버무리기만 할 뿐. 애써 영화를 걸어 놓으면서 자기 극장 시간표에 영화 소식을 올려놓지 않으면 누가 와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요. 영화는 낮 두 시와 여섯 시에 두 번 겁니다(인천에서만). 낮 네 시와 여덟 시에는 황윤 감독 다른 작품인 <작별>을 걸어 줍니다. 이 시간표가 또 마음에 걸립니다. 이 시간대에 이곳에 와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영화를 보라는 소리인지, 이런 ‘훌륭한’ 영화를 걸어 놓았다는 발자취만을 남길 생각인지.

저는 옆지기하고 동네이웃하고 함께 보러 갔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무리는 셋이지요. 극장에 들어가니 우리 말고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딱 한 분. 그분으로서는 우리가 안 왔으면 혼자서 영화를 즐기셨을 테고, 우리로서는 그분이 안 왔으면 오로지 우리끼리만 영화를 즐겼을 터입니다.

영화에 빠져들면서 텅 빈 극장은 잊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썰렁한 안쪽을 둘러보면서, 참말 이리 해도 되나? 이래 놓고도 ‘극장’이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느냐? 인천 영화 눈높이는 이것밖에 안 되나? 인천사람들 눈길과 마음밭은 요만한 그릇일 뿐인가? 하는 생각에 속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5 . 황윤 감독이 길죽음 들짐승 목소리로 들려준 이야기

영화를 보는 내내 부지런히 볼펜질을 했습니다. 사이사이 자막으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스쳐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머리에, 몸에, 두 팔과 다리에 새기는 한편, 종이에도 새기고 싶었습니다. 쪽지에 흘려 쓴 대목을 옮겨 봅니다. 따옴표를 붙인 말은 영화에 나온 연구원이 우리한테 들려주는 말입니다.

― 평소 보고 싶던 새들을 고속도로에서 다 본다.
― 산에서도 보기 힘들어진 멧토끼를 산업도로에서 보았다.
― “짓밟히는 것 치울 때 바삭바삭 해.” (연구원 말)
― 아홉 번째 희생자는 멸종위기종 삵이었다.
― “산업도로가 무섭지. 너무 세게 달리니까. 조사하다가 죽어버리면 동물들과 똑같지.” (연구원 말)
― “차가 싱싱 달리면 나도 쓸려들어가는데, 왜 안 무섭겠어요.” (연구원 말)
― 어미 고라니가 차에 치여 죽었다. 배속에 새끼가 …….
― “온전한 사체가 그대로 있는 것은 사람들이 줏어가 버려.” (연구원 말)
― “도로 위에서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연구원 말)
― “걸레조각인 줄 알고 밟고 지나가지만” (연구원 말)
― 음료수 깡통 옆에서 오목눈이를 보았다.
― 저 위험한 동물(자동차)이 지나갈 때까지 풀밭에 숨어 있자.
― “봄에는 10미터 구간에 (두꺼비가) 100여 마리 죽었더구만.” (연구원 말)
― 최동수는 1년 동안 섬진강변 10킬로미터 구간에서 1000마리가 넘는 두꺼비 주검을 발견했다.
― “능사, 유혈목이, 살모사 …… 한국땅에 있는 뱀은 다 죽어. 로드킬에서.” (연구원 말)
―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아파.
― “일단 야생동물이 한 번 들어오면 살아나올 수 없는 구조지. 옹벽, 가드레일, 수로.” (연구원 말)
― 교통사고 없는 좋은 초원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지리산 둘레, 길 120km에서만 길죽음을 살핀 연구원 세 사람은 ‘서른 달 동안 5769건’을 찾아내어 자료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도로공사에서는 ‘1년에 3천 여 건만 있다’고 공식발표를 합니다. 지리산 둘레에서 서른 달에 걸쳐서 길죽음을 살피던 연구원은 ‘지리산을 뺀 우리 나라 다른 데’는 어떠한가가 궁금해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통째로 바쳐서 전국 고속도로를 죽 누비면서 길죽음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 하루 동안, 연구원 세 사람은 ‘모두 천 건이 넘는’ 길죽음 주검을 찾아냅니다.

녹색연합이 밝혀내기를, 우리 나라가 ‘새 길 닦기’를 ‘중복투자’하며 쓰는 돈이 자그마치 9조 6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2006년까지 우리 나라에 닦인 길이 모두 10만km인데, 정부는 2020년까지 20만km에 이르는 길을 더 닦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화를 응원하는 목소리 전국 개봉관 곳곳에서 두루 내걸리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본 분들은 한결같이, "더 많은 사람들이 두루두루 보면서 우리 삶터와 삶을 깨닫는 데에 생각 한 자락 얻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서> 인터넷방에 올라와 있는 조수미 님 응원편지입니다.

▲ 영화를 응원하는 목소리 전국 개봉관 곳곳에서 두루 내걸리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본 분들은 한결같이, "더 많은 사람들이 두루두루 보면서 우리 삶터와 삶을 깨닫는 데에 생각 한 자락 얻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 길에서> 인터넷방에 올라와 있는 조수미 님 응원편지입니다. ⓒ 조수미/황윤


차로 움직이는 분들도 느끼실 테고, 저처럼 전국 곳곳을 자전거로 다녀본 분도 느끼실 텐데, 우리 나라 국도 가운데 길막힘이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길막힘이 있다면 서울 시내, 또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뿐입니다. 그런데 자꾸자꾸 새 길을 닦습니다.

정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미래 교통량 수요 예측’에 따른다고 하는데, 지금 길형편으로도 ‘차를 세워둘 자리’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곱절이 더 늘어나면 훨씬 많이 늘어나는 차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그리고 온 나라 사람이 죄다 자가용을 끌고다녀야 할까요. 더구나, 이렇게 새 찻길을 많이 닦을 생각이면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물길까지 새로 뚫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기름값은 어떻게 짐지울 생각이지요.

전국에 큼직하게 지어 놓은 공항이 무척 많습니다만, 다들 놀고 있습니다. 새로 지은 큰 항구도 꽤 많아졌는데 다들 놀고 있습니다. 새 찻길도 끊임없이 닦고 있는데 다들 비어 있습니다. 밤에만 비지 않고 낮에도 비어 있습니다. 도로공사 사람들은, 또 정치꾼은, 또 대통령과 산업자원부 사람들은, 스스로 차를 타고 전국 국도를 다녀볼 일입니다.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 널따란 길투성이인데, 그 옆에 새로운 길을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또 깔아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놓아야 하는 길’이라면 놓아야 합니다만, 굳이 안 놓아도 되는 길을 자꾸 놓으면서 들짐승들 삶터도 무너지지만, 우리들 사람 삶터도 무너집니다. 논밭이 아스팔트길로 바뀌고 집자리가 시멘트길로 바뀝니다. 조용하고 한갓지며 아늑했던 고향마을이 시끄럽고 배기가스 흩날리며 갖은 먼지로 찌들면서 잿빛으로 바뀌어 갑니다. 시골도 도시도 한동아리로 죽어 넘어집니다.

6 . 멧토끼 주검을 만난 산업도로가 도심지에도 뚫리면?

동네를 두 동강으로 쪼개는 길 인천시는, 옛도심지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그예 뚫어내려고 모든 수단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오로지, 당신 삶터를 폐허로 만드는 이러한 길이 놓이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맨몸뚱이로 맞섭니다. 동네 한복판에 이러한 길이 뚫리면, 이 동네에서는 누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 동네를 두 동강으로 쪼개는 길 인천시는, 옛도심지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그예 뚫어내려고 모든 수단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오로지, 당신 삶터를 폐허로 만드는 이러한 길이 놓이도록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맨몸뚱이로 맞섭니다. 동네 한복판에 이러한 길이 뚫리면, 이 동네에서는 누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 최종규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보면, 큰 짐차가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산업도로에서 멧토끼 주검을 흔히 만납니다. 산에서 살 곳을 잃은 멧토끼가 보금자리와 먹이와 물을 찾아서 길가로 나왔다가 숱하게 치여 죽습니다.

제가 사는 인천 배다리에도 ‘사람 사는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놓는다며 인천시장님(안상수)과 건설교통국장님(홍준오)과 종합건설본부장님(조영하)이 한목소리로 외칩니다.

주민들이 반대를 해도, "시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길"이라는 말씀만 들려주십니다. 여기에다가 "시에서 하기로 원칙을 잡았기 때문에 재검토는 없다"는 말씀만 덧붙입니다. 주민들은 안전권과 생존권과 교육권과 문화권을 외치지만, 그 어느 권리에도 고개만 내저으시고 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는 멧토끼 주검을 만나는 산업도로입니다. 조촐하게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삶터에 놓이는 산업도로에서는 누구를 만날까요?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50톤 덤프에 치여 죽는 초등학교 아이들 주검을 보게 될까요(이곳에 뚫으려는 산업도로에 맞닿은 초등학교가 네 군데입니다)? 왕복 6차선 건널목을 건너자면 30초로는 턱없이 모자란 허리 구부정한 할머님 주검을 보게 될까요(이곳에는 나이 예순다섯을 넘긴 어르신이 대단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에는 다닐 수 없어서 찻길에서 아슬아슬 다녀야 하는 장애인 전동휠체어가 박살이 난 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까요(이 동네에 사는 장애인 숫자가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도 우리 살림터를 아름다이 가꾸며 고이 돌보는 데에 쓰도록 하지도 못하다가 그예 찻길에서 이슬로 스러져야 하는가요?

덧붙이는 글 황윤 감독 영화는 "공동체상영"으로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서 막을 내린 뒤라도, 학교나 단체에서 '한 자리에 모여서 영화잔치'를 연다고 할 때에 함께 즐길 수 있으니, 황윤 감독님 인터넷방에서 신청을 하시면 됩니다. 먼저 황윤 감독님 인터넷방에 들어가서, 앞서서 신청했던 사람들 발자취와 이야기들을 살펴보시고, 찬찬히 신청서를 써 보시면 됩니다. (http://www.OneDayontheRoad.com)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로드킬 어느 날 그 길에서 황윤 길죽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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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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