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올해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을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전형적인 ‘영화제용’ 라인업에 가깝다는 것이 눈에 띈다. 좋게 이야기하면 그만큼 괜찮은 작품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독한 작가주의에의 동참이나 영화제 트로피를 위하여 만들어진 영화들이 많다는 의미도 된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굳이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영화제는 영화제이되, ‘아카데미’라는 무대의 전통적인 취향에 어울리는 작품들이었는가 하는 부분. 작품상을 수상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 보더라도, 왠지 아카데미보다는 냉소적이고 유니크한 감수성을 선호하는 유럽이나 비주류 영화제의 취향에 더 잘 어울릴만한 작품처럼 보인다.

 

코엔 형제는 폭력의 악순환을 소재로 인간사를 풍자하는 부조리한 상황극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난해한 영화를 좋아하는 평론가들의 극찬과는 별개로, 아마도 이 영화는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통틀어 가장 관객들이 대중적인 ‘감정이입’이 안 되는 영화중 하나로 남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체 저기서 왜 저러고 있는지 전혀 공감 안 되는 캐릭터들과 부담스러운 헤어스타일, 기승전결이나 반전의 클라이맥스가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일방통행식 전개는 관객들의 정서적 동참보다 폭력의 악순환을 주제로 한 비디오 교육 자료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가뜩이나 대사도 적고 심심함을 달래줄만한 음악도 없으니 만드는 입장에서 OST 제작비용은 안들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마틴 스콜세지의 한풀이무대가 되어버린 지난해의 <디파티드>나, 걸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물먹였던’  재작년의 <크래쉬>에 이르기까지. 최근 들어 아카데미의 선택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다. 보수적이고 대중성 짙은 영화를 편애하기로 유명한 아카데미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썰렁한 잔혹개그에 열광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코엔 형제의 전작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영화는 아니다.

 

<파고>나 <바톤 핑크> <레이디 킬러>같은 전작들에서 보듯, 코엔 형제는 늘 그런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는 썰렁한 잔혹 유머와, 직접적인 감정표현을 최소화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화법,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으로 4차원적 행동패턴을 고집하는 엉뚱한 인물들은 코엔 형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코엔 형제의 테마는 언제나 ‘동정없는 세상’에 관련된 이야기다. 낭만이나 휴머니즘, 현실에 대한 미화같은 배부른 감정 따위는 적어도 ‘코엔 형제다운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성이나 양심,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가치관에 대한 실종은, 문명과 이성의 껍질 뒤에 가려진 현실 속 야생의 지옥도에 대한 고발이다.

 

갑작스런 사건 속에서 각기 다른 인간군상들이 실타래처럼 얽혀들고, 쫓기 쫓기는 복마전도 등장하지만 그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반전도 없고, 극 전개나 캐릭터들의 운명은 언제나 예측불가능한 곳으로 흘러가지만 객관화된 카메라는 감정을 배제하고 한발 떨어져서 대상을 냉정하게 관조할 뿐,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과정 없는 직설적이고 잔혹한 폭력으로 누군가 끊임없이 죽어나가다가 끝에는 예고 없이 허무하게 마무리짓는 코엔 형제식 결말은 기승전결의 전통적 영화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이야기 와중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유머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빚어진 허탈한 웃음을 유발한다. 감당할 수 없는 폭력과 운명의 무게 앞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는 인간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세상을 잘못 만들어놓은 것인지, 세상이 인간을 버려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장면들을 가장 시니컬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차갑게 만드는 힘이 있다. 괴팍한 취향도 그쪽으로 한 우물만 파다보면 고유의 스타일이 되는 법이다.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감독이라 할지라도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고집하기란 쉽지 않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아카데미 수상은, 코엔 형제가 전작에서 보여준 염세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전작에서  축적되어온 스타일이 하나의 진화를 이룬 데 대한 찬사라고 할만하다.

2008.02.26 11:48 ⓒ 2008 OhmyNew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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