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내 나이 19세 고3이었다. 학교를 하루 무단결석하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반복해서 3번(당시 인천은 좌석제가 아니었다) 보았다. 평일 낮이라 텅 빈 극장 안에서 그야말로 이를 악물며 울었다.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때 나이 딱 두 배이자 18년이 지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고3의 나이 때는 나에게 ‘키팅’과 같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억울해 울었으며, 현재는 ‘키팅’과 같은 선생님이 있었는데 몰랐던 것이 아쉬워서, 또 다른 닐, 토드, 낙스, 찰리, 믹스, 리차드와 같은 친구들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 현실이 안타까워 눈을 붉혔다.

 

 '카르페 디엠'의 중요성을 망자의 사진 앞에서 일깨우는 키팅

'카르페 디엠'의 중요성을 망자의 사진 앞에서 일깨우는 키팅 ⓒ 터치스톤 픽처스

이 영화는 ‘키팅’이 ‘현재를 즐겨라’라는 라틴어인 ‘카르페 디엠’을 학생들에 가르치며 시작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키팅’은 학생들이 현재 죽어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해 하려고 하는 것, 감정과 열정 없이 이성만 있다고 느낀 것이다.

 

또한, 월트 휘트먼의 시를 인용해 삭막한 도시에서 아름다움을 가지기 위해서는 ‘네가 거기에 있다는 것 /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이 답이라고 했다.

 

하지만 키팅은 학생들이 ‘익살, 공포, 타락, 배설’이라고 바꿔 부르는 ‘전통, 명예, 규율, 최고를 강조하는 '웰튼 아카데미'와의 사고차이로 결국 쫓겨나게 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학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클럽을 학생들이 부활시킨 것과 닐의 자살이 원인이 되었다. 그보다 자유를 꿈꾸게 했다는 것이 근본 이유일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를 피해 그들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

어른들의 세계를 피해 그들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 ⓒ 터치스톤 픽처스

 

그 클럽 멤버들이 모인 '동굴'이란 어둡고 좁은 장소는 바로 학생들의 이상의 공간이며, 꿈의 공간이며, 낙원의 공간이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의 땅이었다. 그 환상의 공간이 어찌 초라한 비밀스런 동굴이어야 하는가?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러한 공간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며, 낙원이 아닌 타락이며, 꿈이 아닌 몽상이며, 이상이 아닌 현실 부정이었기 때문이다.

 

작년과 똑같은 선물을 하는 부모님을 둔 토드, 연극배우가 꿈이지만 부모의 욕심으로 인해 좌절하여 자살하는 닐, 기존 질서에 반항하여 퇴학당하는 찰리, 기존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진 리처드. 이 모든 학생들이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 낸, 어른들이 옳다고 정의 내린 것에 희생당하는 바로 청소년의 모습인 것이다.

 

 닐이 진정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였을 때의 밝은 모습. 아버지와 사회는 그 웃음을 앗아갔다.

닐이 진정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였을 때의 밝은 모습. 아버지와 사회는 그 웃음을 앗아갔다. ⓒ 터치스톤 픽처스

 

닐의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희생이란 다름 아닌 일류대 나온 의사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번 돈을 교육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너는 잘 입고 잘 먹고, 직업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강요요, 억압이요, 폭력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진정한 희생이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이란 걸 모른다. 아니 알아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바로 학생들을 어른들의 사고에 갇혀 살게 하는 이 사회의 모습을 말한다. 자유와 상상력과 사랑과 자아가 없는 시는 시가 아니며 그러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죽은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없는 사회는 바로 죽어 있는 사회인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에 대한 꿈이 계속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에 대한 꿈이 계속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터치스톤 픽처스

 

이 사회가 살아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모든 학생을 한 사람과 같은 집단 자아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 개개인이 모두 자아를 지닌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바로 교육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나온 지 18년이 지난 지금, 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언제쯤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로 바꿔 불릴 수 있을 지 아득하기만 하다.

2007.12.14 09:39 ⓒ 2007 OhmyNews
죽은 시인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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