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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첸동난묘족동족자치주는 중국의 오지 중 오지다. 자신들을 동이족의 한 갈래로 믿고 있는 묘족은 지금도 치우천황을 조상신으로 숭배하며 '아시아의 집시'로 불리는 민족이다. 동족은 오지 산골에 거주하면서 지금도 고대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민족문화의 활화석으로 불리는 첸동난자치구에서 우리 한민족과 유사한 민속풍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소수민족 묘족과 동족의 생생한 문화와 풍습, 끈끈한 삶과 생활의 현장을 7차례에 걸쳐 현지 르포로 전한다. [편집자말]
114명 전교생이 나와 함께 아침체조를 하는 잔리초등학교 어린이들. 1980년대에 태어난 잔리촌 아이들의 출생비율은 남녀가 94:93명이다.
 114명 전교생이 나와 함께 아침체조를 하는 잔리초등학교 어린이들. 1980년대에 태어난 잔리촌 아이들의 출생비율은 남녀가 94:93명이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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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논을 경작하고 아내는 밭을 일군다. 잔리촌에서 남녀평등은 주민의식과 노동, 생활에서 확립돼 있다.
 남편은 논을 경작하고 아내는 밭을 일군다. 잔리촌에서 남녀평등은 주민의식과 노동, 생활에서 확립돼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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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에 한 둥지만 틀면 새는 별 탈 없이 살지만,
한 나무에 여러 둥지를 틀면 새는 (결국) 굶어죽는다.'


'사람은 아이를 (끊임없이) 낳을 수 있지만,
(먹고 살아갈) 땅과 자원은 다시 낳아 만들 수 없네.'


'자식을 많이 낳는 집에는 농사지을 땅을 주지 말고,
자식을 많이 낳는 집의 딸은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
- 무분별한 인구증가를 경고하는 잔리촌 동족대가 중에서


한 마을이 있다.

오지의 깊은 산골에서 1000여 년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소수민족 동족(侗族) 집단거주지. 오랜 세월에 걸쳐 과학적으로 풀기 힘든 약초와 조화로운 자연환경 속에 인구 증가를 철저히 억제한 신비의 마을.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구두(口頭)의 마을 규약을 조상 대대로 지켜온 주민들. 중국정부의 행정조사 이래 형사범죄 발생률 0%인 평화롭고 따뜻한 마을.

세계 최초·최고의 인구계획 촌락 잔리(동족어, 한자 표기는 '占里')다.

신비의 마을 잔리촌, 그 곳에 가다

중국 구이저우성 구이양에서 9시간을 달려서 닿은 총장 현청에서 다시 1시간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잔리촌.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후 오늘날까지 잔리촌은 150~160여 가구 700여명의 인구를 유지해왔다. 1952년 중국 최초의 전국인구조사에서 잔리촌은 가구 168호, 주민 729명이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가구 154호, 주민 739명으로, 가구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국정부는 1979년부터 강력한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농촌 거주의 소수민족은 예외로 두 자녀까지 둘 수 있다. 게다가 개혁개방정책 이전에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마오쩌둥의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중국정부는 적극적인 다산 정책을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950~70년대 중국은 기록적인 인구증가세를 보였지만, 1970년 잔리촌 주민 수는 729명이었다. 18년 전과 비교할 때, 단 한 명의 주민도 늘어나지 않은 것.

'중국 최초의 지화셩위 마을', '중국 인구문화 제1촌', '동족 문화와 풍습의 살아있는 생태박물관'…. 잔리촌은 한 가정에 오직 1남1녀만 낳는 신비로운 비밀을 간직한 마을로 유명하다.

잔리촌의 또 다른 비밀은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을 광란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던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옛 전통과 문화풍속, 생활방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점이다. 잔리촌 동족은 홍위병과 지방 관료의 무자비한 파괴와 시퍼런 감시 속에서도 남몰래 1남1녀의 자녀 낳기와 민족문화를 지켜왔다. 그 전통은 21세기 첨단 현대문명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잔리촌은 마을 집회와 의식행사를 여는 회당인 고루(鼓樓)를 중심으로 150여 가구가 사이좋게 살고 있다.
 잔리촌은 마을 집회와 의식행사를 여는 회당인 고루(鼓樓)를 중심으로 150여 가구가 사이좋게 살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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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리촌을 가로지르는 개천 옆으로 소를 모는 한 할머니. 갓 수확한 찹쌀은 한 달 동안 햇볕에 말린다.
 잔리촌을 가로지르는 개천 옆으로 소를 모는 한 할머니. 갓 수확한 찹쌀은 한 달 동안 햇볕에 말린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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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여 년 동안 한 가정 1남1녀만 낳는 마을

잔리촌은 마을 형성의 역사부터 신비롭다. 우야완(43) 잔리촌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초로 잔리에 뿌리를 내린 일족은 1000여 년 전 전란과 기아를 피해 광시 장족자치구 우저우에서 강을 따라 총장현에 이르렀다.

이주민이었던 선조들은 원주민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풍수가 좋고 농사지을 땅이 알맞은 산골 오지인 잔리로 보금자리를 정했다. 대대로 잔리 주민들은 단결심이 강하고 상부상조하면서 화목하게 지내왔다. 최초 5가구에서 시작된 잔리의 역사는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100여 가구로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농사지을 땅을 무차별적으로 개간하고 하나둘 느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상황을 낳았다. 한 집안에 조부모부터 손자손녀까지 3대가 화목하게 살던 잔리의 대가족엔 토지 개간과 부족한 양식 문제 때문에 심각한 분쟁과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300여 년 전 잔리 선조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마을과 촌민의 미래와 생존을 위해 한 부부 간에 오직 두 명의 자녀만 낳도록 한 것.

청나라 초기 잔리촌 최대의 성씨 집단인 우씨 최고어른은 마을 전체회의를 고루(鼓樓)회당에 소집하여 인구계획을 실행하는 마을 규약을 선포했다. 그 자리에서 잔리촌 주민들은 인구계획 규약을 엄숙히 따를 것을 맹세하면서, 위반한 가정은 마을에서 쫓아내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4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문서화되지 않은 마을 규약을 그 누구도 어기지 않았다. 류화린(40) 총장현 인구·지화셩위국 주임은 "잔리촌에서는 갓 결혼한 가정을 제외하고 100% 한 가정에 자녀 둘만 두었다"고 소개했다.

놀라운 것은 98%의 가정에서 1남1녀의 자녀를 둔 점이다. 1980년대 태어난 잔리촌 아이들의 출생비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 94명, 여자 93명으로 거의 50대50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잔리촌의 가족 구성원은 자녀가 각각 남자·여자아이 하나씩 있고, 아이의 아버지는 누나나 여동생이 있으며 어머니도 오빠나 남동생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류 주임은 "극소수의 가정에서 남자만 둘, 여자만 둘 낳은 가정이 있긴 하지만 성비율은 1남1녀로 균형을 보인다"면서 "전체 총장현에서 오직 잔리촌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잔리촌에서 환화초를 조제할 수 있는 약제사 우나이카 할머니. 82세의 고령에도 약초를 다듬는 일은 직접 한다.
 잔리촌에서 환화초를 조제할 수 있는 약제사 우나이카 할머니. 82세의 고령에도 약초를 다듬는 일은 직접 한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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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를 짧게 잘라 바구니를 손수 만드는 한 중년남자.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형성된 자급자족 경제체제 때문에 잔리촌에서는 누구나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됐다.
 대나무를 짧게 잘라 바구니를 손수 만드는 한 중년남자.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형성된 자급자족 경제체제 때문에 잔리촌에서는 누구나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가 됐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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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영약 '환화초'로 성별을 조절할 수 있을까

1990년대 들어 잔리촌의 놀라운 1남1녀 자녀생육 현상은 중국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국가지화셩위위원회, 중국인구정보센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인민대학 인구연구센터, 구이저우대학 인구연구센터 등 중국 중앙기관과 각지 대학에서 전문가가 파견되어 잔리촌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인류학·민속학·의학·유전자 분야에 걸친 다양한 연구와 조사를 벌였지만, 지금도 그 의문을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전문가들이 추측한 1남1녀 비밀의 원인은 대체로 3가지다. 첫째, 종족 보존과 균형적인 1남1녀를 갖기 위한 성별조절약 '환화초'의 복용이다. 잔리촌에서 임신한 여성은 첫 아이의 경우 자연출산을 하지만 둘째는 첫째와 반대로 환화초를 먹어 성별을 조절한다.

환화초는 태아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비의 영약으로, 중국 내에서 오직 잔리촌에서만 채취하고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잔리촌에는 환화초를 조제하는 약제사가 따로 있는데, 지금은 우나이카(82·여) 한 사람만이 남아있다. 환화초 약제사는 조제 비법을 오직 여성에게만 전수하고, 마을 촌장도 조제실에 들어가거나 조제법을 강제로 알아낼 수 없다.

우나이카는 "환화초는 임신한 지 1~2개월 내에 복용해야 약효가 있다"면서 "3개월이 지나면 약효가 없다"고 밝혔다. 우 약제사는 "환화초는 단 두 종류의 약초"라며 "환화초를 끓인 물을 임산부가 하루 3번씩 1주일 동안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우야완 촌장은 "깊은 산속에서 환화초를 캐오는 사람은 우나이카의 아들이고 조제할 때 돕는 사람은 그의 며느리라 마을 주민 누구도 조제법을 알지 못한다"면서 "약제사는 임산부의 자녀 상황을 듣고 아들이나 딸을 낳아야 할 상황에 맞춰 환화초를 조제해준다"고 말했다.

둘째, 잔리촌 주민들은 피임 효능을 지닌 약초를 복용하여 생식을 막는다. 잔리촌에는 환화초 외에도 아이를 낳게 해주거나 피임을 가능케 해주는 약초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화초와 마찬가지로 잔리 사람들은 신비한 약초의 존재와 제조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셋째, 조혼 풍습이 만연한 다른 소수민족 촌락들과 달리, 잔리촌은 일정한 연령을 넘어야 결혼토록 하고 아이를 늦게 낳는 규율이 엄격히 정해져 있다. 마을규약에 따르면, 남자는 20살이 넘고 여자는 19살이 지나야 결혼을 할 수 있는데 보통 23~24살에야 혼인한다. 또한 잔리촌 주민끼리만 서로 결혼하여 타 촌락민과의 통혼을 철저히 막고 있다. 가족 내의 근친결혼도 엄금하고 있다.

주택 바깥에서 말린 동족 전통의복인 '민감'의 옷감을 거두는 한 여인. 지금도 전통제조방식 그대로 만들어지는 민감은 방수·방풍이 뛰어나고 색감도 아름답
 주택 바깥에서 말린 동족 전통의복인 '민감'의 옷감을 거두는 한 여인. 지금도 전통제조방식 그대로 만들어지는 민감은 방수·방풍이 뛰어나고 색감도 아름답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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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익은 볍쌀을 거두는 한 부부. 잔리촌에서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작업 파트너다.
 다 익은 볍쌀을 거두는 한 부부. 잔리촌에서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작업 파트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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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에 깊은 산, 맑은 물까지... 채식 위주로 먹으며 건강생활

그러나 환화초를 비롯한 약초 복용, 만혼만육, 내부통혼 만으로는 잔리촌의 1남1녀 자녀 낳기 신비를 풀 순 없다. 기자를 잔리촌에 태워다준 총장현청 주민은 "환화초가 영험하다고 해서 몇몇 현청 주민과 외지 사람들이 약제를 얻어갔지만 아무런 효능을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양준창 구이저우대학 인구연구센터 부교수도 "환화초의 효능은 '잔리현상'의 여러 요소에서 한 부분일 뿐"이라면서 "잔리촌의 전체적인 자연환경, 주민들의 문화풍속과 생활습관, 내부통혼에 따른 유전자적 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잔리촌의 자연입지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다. 오지 깊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자락은 외부세력의 침탈을 막고 있고, 마을 좌측에 흐르는 개천은 하루도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기름진 땅에서는 윤기 흐르는 찹쌀과 미곡이 수확되고 산속에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인구조절을 해온 덕택에 잔리의 1인당 토지경작 면적은 1.5묘로 중국 평균 1.4묘보다 높다. 인구계획 규약을 실시한 이래 잔리촌은 일찌감치 배불리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잔리촌의 식생활은 수백여 년 이래 전승된 전통 동족 음식 제조법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잔리촌 동족은 절대 과식·과음을 하지 않고 채식 위주 식단에 적절한 육식을 섭취한다. 우리의 김치처럼 몇몇 채소는 고추와 소금에 절여 한 달 이상 독에 넣어 발효시킨 뒤 식탁에 올린다.

잔리의 발효 음식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양식한 물고기를 잡아 내장을 발라낸 뒤 갖은 양념을 넣어 찹쌀과 함께 밀봉 상태에서 최소 1년, 최고 수십 년 동안 발효시키는 옌위다. 기자가 현지에서 먹은 닭백숙·닭죽과 발효 무김치는 우리의 그것과 똑같았다.

철저한 남녀평등 풍습... "여자아이 더 좋아한다"

예부터 철저한 남녀평등 사상과 생활풍습을 지닌 점도 주목된다. 잔리촌의 가족사회는 여전히 대가족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 가옥에서 조부모·부모·자녀 등 3대와 고모 혹은 삼촌 가족이 함께 살지만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은 남녀가 분담한다. 농사일도 부부가 함께하고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에도 여성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

우야오페이(吳耀飛·여)는 "집안 어른들은 여자아이를 낳으면 집안에 풍요가 깃드는 징조라며 더욱 좋아하신다"면서 "지금도 잔리 여자들은 타 촌락민과 결혼하면 집안과 바깥 일이 고되고 다산과 양육 부담에 늘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볍쌀을 고르는 여인. 일부 현대문명의 생활이기를 제외하고 잔리에서의 작업 방식은 수백여 년 동안 변한 것이 없다.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볍쌀을 고르는 여인. 일부 현대문명의 생활이기를 제외하고 잔리에서의 작업 방식은 수백여 년 동안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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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 건조대 밑에 자리 잡은 돼지우리와 그 아래에서 양식되는 물고기. 잔리촌에서는 한 톨의 쌀과 돼지먹이도 낭비되는 일이 없다.
 미곡 건조대 밑에 자리 잡은 돼지우리와 그 아래에서 양식되는 물고기. 잔리촌에서는 한 톨의 쌀과 돼지먹이도 낭비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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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동족, #잔리촌, #1남1녀, #산아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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