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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유치환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던 중 흥미를 끄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이 책의 제목은 <러일전쟁 때 군자금헌납잡건>(日露戰爭役ニ際ツ軍資金獻納雜件)이다.

이 책은 러일전쟁(1904년) 당시 미국·중국·남미·유럽 등지에서 군자금을 보낸 헌납자들의 명부와 관련 문서를 묶어 놓은 것이다. 특히 관심을 유발시키는 부분은 <한국부(韓國ノ部)>에 게재된 한국인들의 면면들이다. 대한제국의 고위관리에서 말단 순검(巡檢, 지금의 순경)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일본군에 군자금을 헌납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일본군에 군자금까지 헌납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당시 한국정부 내에는 친일파·친러파·친미파·중립파까지 다양한 세력들이 복잡한 역학관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군자금을 헌납한 자들은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일까.

그럼 지금부터 100년 전, 러일전쟁 당시 군자금을 헌납하여 훈장까지 받은 한국인들을 추적해 보자. 고위급 한국관리가 일본으로부터 기밀비와 접대비를 받아서 일본군을 위해 헌신한 사실,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본 황군을 고종의 특사들이 위문한 내용도 살펴보고자 한다.

청일전쟁 당시 경복궁이 점령당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고종은 러일전쟁도 피하고 나라를 지키려고 했을까. 또 한 번의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위기 상황을 맞은 고종은 외국공관으로 피신하거나 중립국을 선언하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바로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에 고종은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한일의정서를 맺고 일본이 승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길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황실을 보존하기 위한 궁여지책은 아니었을까. 러일전쟁 당시 고종이 보인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진보회(일진회 전신)의 군자금 헌납 일진회는 일본군 자금 헌납, 직접 전투에 참전, 간첩활동까지 펼쳤다.
▲ 진보회(일진회 전신)의 군자금 헌납 일진회는 일본군 자금 헌납, 직접 전투에 참전, 간첩활동까지 펼쳤다.
ⓒ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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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자금 헌납에 앞장선 한국인

러일전쟁은 청일전쟁(1894년)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륙침략의 야욕을 실현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자 나선 제국주의 전쟁이다.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년 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얻은 요동반도를 놓고 일본을 압박한 일)을 통하여,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또한 러시아는 요동반도와 한국의 남쪽(마산포·거제도 등지)을 조차하려고 일본과 외교전·토지매매 경쟁 등으로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와 결전을 벌이기로 하고, 영국과 손을 잡고 군사원조자 미국과도 화친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뤼순 군항을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일본과 일전을 벌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 낀 한국은 중립을 선언하겠다고 고종의 밀서를 각국 영사관에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해군을 거제도에 주둔시키고, 인천 등지에 육군을 상륙시키며 북진해 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의 친일파 세력은 일본군의 승리를 낙관하면서 군물자와 군자금을 헌납하고 참전도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조직적으로 일본군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일부 자본가와 정부 관료, 지역 유지 등이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노력(?) 때문일까. 일본군은 러시아의 무적함대인 동양함대를 물 속에 잠재우면서 한국을 보호국 즉 식민지로 삼았다. 또한 러시아의 패배는 유럽을 경악게 하였다.

그럼 일본군에 군자금을 헌납한 한국인들을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은 주로 인천, 평안남북도 지역의 한국인들이 대부분으로,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한국인의 일본군자금 헌납 기록을 통해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초기인 1904년 3월 1일 김태상(金泰相)·김태첨(金泰添) 양씨가 1383원 19전(군사비 757원, 육군혈병금 317원, 해군혈병금 298원)을 인천 일본영사관에 직접 헌납한 사실을, 인천주재 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김태첨은 인천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군사비 헌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2월 말부터 헌납운동으로 수금한 금액은 군사비 1450원 50전, 혈병금 968원에 이르렀다.

김태첨과 김태상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인천 지역의 지방유지 또는 자본가였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김태첨의 권유로 군자금을 헌납한 인천 지역의 한국인은 강봉현(姜鳳賢, 인천 용동, 10원), 김정곤(金正坤, 인천 전동, 15원), 최봉진(崔鳳振, 인천 상현내동, 8원) 등이다.

다음으로 1904년 4월 15일에는 김완영(金完永, 개성, 군사비 20원 혈병금 20원 20전), 서상하(徐相夏, 경성 남서동현, 군사비 500원, 혈병비 246원 50전) 등이 일본군 개성병참 사령부와 12사단병참 경리부장에게 군자금을 직접 납부했다. 서상하는 대구 출신으로 1902년 헌릉참봉(獻陵參奉), 1906년 봉상사제조(奉常司堤調) 등을 지냈다.

참고로 1903년 당시 최상품 쌀값이 한 섬(144kg)에 1원 8전이니, 100원이면 쌀 100섬 남짓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한국관리들도 군자금 헌납에 앞장서 대표적인 한국관리인 이재곤, 김가진, 민영휘 등은 일본군자금을 헌납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기도 했다.
▲ 한국관리들도 군자금 헌납에 앞장서 대표적인 한국관리인 이재곤, 김가진, 민영휘 등은 일본군자금을 헌납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기도 했다.
ⓒ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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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이지용 등 1급 친일파와 친일단체도 납부

당시 한국정부의 고위 관리들도 일본군 군자금 헌납에 앞장섰다. 1904년 8월 10일에 찬정 김가진(金嘉鎭)이 100원, 주일대사와 학부 협찬에 있던 고영희(高永喜)가 50원, 민상호(閔商鎬)가 100원, 민영소(閔泳韶)가 100원, 궁내부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이 100원, 이재곤(李載?)이 50원, 예식원 부장 민영린(閔泳璘)이 50원, 육군 부장 이인영(李寅榮)이 50원, 장례원 김종한(金宗漢)이 50원 등을 육군 군자금으로 헌납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다.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농상공부대신 김가진은 1904년 4월 1일 의정부참정 조병식(趙秉式)에게 "러일전쟁을 위해 평양 이북 지방에서 일본군에 협조할 수 있도록 관원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후에 남작을 수여받았다. 또한 법부대신 고영희는 훈1등 욱일대수장과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후에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 이지용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장본인이며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혔다. 왕족 출신인 이재완은 일본보빙대사로 활약하다가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과 후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또 민영린은 훈2등 서보장(瑞寶章)과 백작을 받았고, 이재곤과 민상호는 남작, 민영소는 자작을 수여받았다.

군자금 헌납자에는 특히 경찰쪽 관리들이 많았는데, 1904년 11월에 박기호(朴淇昊, 경무관), 유진세(劉鎭世)를 비롯한 총순(總巡), 권임, 순검 등 36명이 49원을 육해군 혈병비로 원산 일본영사관에 납부했다. 1904년 10월 당시 순검의 월급이 15원 정도였으니 이들이 낸 금액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박기호는 뒤에 1905년 함남 고원군수를 지냈고, 유진세는 뒤에 1908년 원산경찰서 경부, 1910~13년 함남 삼수군수, 1928~37년까지 전남 무안 삼양면장을 지냈다.

각 지방 군수도 헌납 대열에 앞장섰다. 1905년 6월에 평양군수 이승재(李承載, 10원), 평양개시장 감리서 주사 심원명(沈遠明, 10원)·김훈(金薰, 10원) 등이 일본군자금을 헌납했다. 15원을 군자금에 헌납한 백낙삼(白樂三) 선천군수(1904~06년)는 군수 재직시 일본군 철도 부설에 참여하여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심지어 1908년 일본훈장(勳六等旭日章)을 패용할 수 있도록 관보에 게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일진회 등 친일적 단체들의 수장들도 부지런히 회원들의 돈을 걷어 헌납했다. 1904년 12월 19일 일진회의 전신인 진보회 함경도 지회장인 한남규(韓南奎), 부지회장 유창일(柳昌一)·백사원(白士元) 등이 200원을 육해군 혈병금으로 냈다.

한남규는 1906년 함남 명천군수, 1907년 함남 관찰사, 1907년 의병전쟁 당시 선유사로 의병토벌에 앞장섰으며, 1908년 일본으로부터 명치훈장 훈7등 서보장을 받기도 하였다. 병탄 이후에는 1919년 함남 도참사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일진회 출신의 관찰사로 일본연호 명치(明治)를 사용했다 하여 세간에 친일파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유창일은 일진회 통영지회장으로 러일전쟁 당시 참전하여 일본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29년 2월 11일 일본 건국절(기원절)을 맞아 통영신사에서 참배하고, 통영경찰서 연무장에서 재향군인 통영분회 정기총회 석상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한 한남규를 비롯한 함경남북도·강원도 진보회 회원 3588명이 339원 73전, 원산 출신 최명신(崔明信) 외 56명도 38원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1905년 7월 5일 원산 출신 사태균(史泰均) 상업회의소장도 25원을 육군혈병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에 대해 "이토공은 한국을 위해 밤낮 진력(盡力)하였을 뿐 아니라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에 있었으므로 내가 가장 경의를 표해야 할 사람인데 이번과 같은 흉변(兇變,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한 사건)을 보았으니 한국 장래를 위해 크게 걱정이 된다"라고 애석해 마지않았다.

계란까지 군자금으로 낸 한국인

개전 초기인 1904년 3월 6일 평양의 유지들은 계란까지 일본군에게 바쳤다. 평양의 대표적 유지인 황갑영(黃甲永)은 오리 깃털 2포대와 계란 200개, 장용건(張用鍵)은 계란 300개와 난국주 3되, 팽한주(彭翰周) 평양 군수는 생우(生牛) 1두 및 조선소주 200병, 윤일성(尹日性)은 닭털 10포대 등을 헌납했다.

팽한주는 1904년 평양군수로 재직당시 탐학과 횡포로 면직되었을 때, 일본 공사 하야시(林勸助)가 "일본 군대가 서쪽 지방으로 들어갈 때 팽한주의 공로가 크므로 그를 파직하지 말라"고 요청하여 복직되기도 했다. 그 뒤 팽한주는 러일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8월 10일 일본국으로부터 훈6등 욱일장을 받았다.

한편 1905년 1월 3일 개성의 부인회는 혈병금을 모집하여 466원을 헌납하였고, 5월 3일 평양일어학교 황원영(黃遠永), 정두현(鄭斗鉉, 1919년 숭덕학교 교감) 등 5명의 학생들이 82원 등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냈다. 또한 1904년 5월 진남포 보동학교 오대규(吳大圭) 외 20명이 육군 혈병금을 냈다. 이처럼 일본군의 군자금 헌납운동에는 학생들까지도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 간첩으로 활동한 한국인 러일전쟁 당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일본군에 소속되어 간첩 또는 밀정으로 활동했다. 1907년부터 발발한 의병전쟁에도 일본군은 한국인을 간첩으로 활용했다. 밀정 등은 일본군의 기밀비를 받았다.
▲ 일본군 간첩으로 활동한 한국인 러일전쟁 당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일본군에 소속되어 간첩 또는 밀정으로 활동했다. 1907년부터 발발한 의병전쟁에도 일본군은 한국인을 간첩으로 활용했다. 밀정 등은 일본군의 기밀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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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기밀비 받은 한국인

한국인들은 러일전쟁을 지원하고자 일본군의 철도 부설에도 참여했는데, 이들은 일본군으로부터 기밀비를 받아 활동했다. 1904년 4월 24일 일본 한국주차군사령관이 참모총장에게 기밀비 증액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면, 강홍대(康洪大) 임시군용철도사무위원, 최상돈(崔相敦)·강영우(康永佑) 임시철도 종사원 등이 월 300원의 기밀비를 받았으며, 일본육군소장을 지낸 이희두도 월 150원의 기밀비를 받은 내용이 나와있다.

일본군은 강홍대를 비롯한 3명이 "우리(일본) 철도 업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정부로부터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로 월 300원의 기밀비 지출을 신청한다"고 기밀비 신청 이유를 적고 있다. 이들 강홍대 외 4명에게 특별히 서훈을 추서해야 한다고 임시군용철도익사무소가 참모차장에게 요청한 결과, 1908년에 강홍대(훈3등 서보장), 서상돈(훈3등 서보장), 강영우(훈6등 서보장), 홍순찬(洪淳瓚, 육군참위,임시군용철도검찰사, 훈3등 서보장) 등이 훈장을 받았다.

강홍대(이명 강영균)는 1867년생으로 함경 북청 출신이다. 그는 1904년 4월 5일 임시군용철도 사무위원, 8월 20일 경의간임시군용철도 검찰사를 지내고 1908년 4월 일본으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한 일진회 평의원으로 3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에 관여했다고 집에 폭탄투척을 받기도 하였다.

강영우(康永祐)는 1873년생으로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다. 그는 1896년 7월 관비 유학생으로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보통과를 졸업하고 1904년 4월 임시군용철도 검찰위원, 6월 철도원 기사, 1907년 12월 제실재산정리국 주사 등을 지냈다.

최상돈은 1869년생으로, 1895년에 관비유학생으로서 일본 체신성과 철도사무를 견습한 후 1904년 임시 군용철도 검찰원을 지내고 1906년 6월 일본으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10년부터 1916년 사망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로 활동했다.

당시 기밀비는 일본군이 간첩이나 밀정들을 운영하는 데 쓰이는 돈이었고 일본군은 꾸준히 기밀비 증액을 요청하였다. 한 사례로 함경도 대산상동에 거주하는 남삼진(南三晋)은 일본 보병제37연대 제3대대의 간첩 및 밀정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가 1904년 3월 31일 제3대대장으로부터 받은 기밀비 영수증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함흥에서 일어나는 폭도들의 봉기 및 지방의 정보 수집 활동을 펼쳤고 3월 20일부터 31일까지 원산 등지에서 간첩으로 활동하며 기밀비 15원 50전을 받았다.

이처럼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간첩 또는 밀정으로 활용하고자 기밀비를 대폭 증액하였으며, 1907년 의병전쟁 때에도 한국인들을 간첩 또는 밀정으로 활용했다. 이들 한국인 117명이 1908년 일본으로부터 훈장 또는 상금을 받았다. 이들 중 일진회 관련자들이 안덕원(安德源, 지회장), 유문경(柳文卿, 지회장, 서천군수), 윤상익(尹相翊, 지회장, 명천군수), 이문삼(李文三, 지회장), 이문표(李文豹, 지회장), 윤갑병(尹甲炳, 검사. 평의원, 관찰사) 등 29명에 이른다. 그 외에는 밀정 8명, 경찰 및 한국군인 20명, 한국 관리 16명, 나머지 철도건설 노동자 44명으로 나오고 있다.(첨부파일: 러일전쟁 당시 간첩 및 밀정 서훈자 명단 참고.)

일본군용 철도에 참여한 한국인 일본군용철도 건설에 참여한 한국인은 일본으로부터 기밀비를 받아 활동했으며, 이후 훈장을 받기도 했다.
▲ 일본군용 철도에 참여한 한국인 일본군용철도 건설에 참여한 한국인은 일본으로부터 기밀비를 받아 활동했으며, 이후 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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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일본 승리를 원했다?!

러일전쟁 초기 고종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먼저 고종은 두 가지 방법을 고려했는데, 하나는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하거나 또 하나는 전쟁에서 중립노선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우선 고종은 미국공사 알렌에게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가 거절당했다. 다음으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에게서는 긍정적인 답을 얻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니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거나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하자고 주장했지만, 고종은 이미 아관파천(1896년)을 경험한 일본이 그걸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은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해도 궁궐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동시에, 고종이 경솔하게 행동할 경우 황실의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1904년 1월 21일 외부대신 이지용의 명의로 전시중립을 선언했다. 고종은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선언 접수를 통보하자 자신의 중립노선이 승인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오히려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의 중립선언이 힘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기만의 외침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중립선언과 상관없이 원정군을 한국으로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러시아와 프랑스 공사관에게 서울만을 중립지대로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월 8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한 후 서울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말았다. 고종이 추진했던 외국공사관 피신이나 중립선언조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에 고종은 결국 황실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 굴복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기에 이른다. 1904년 2월 12일 <각사등록(各司謄錄)>을 보면, 고종은 의정서 체결 이전부터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토록 하는 지시를 각계에 내리고 있다. 전국의 각 군수들에게 이지용의 명의로 공문을 보내, "일본군대가 통과할 때 요구사항을 제공할 것"이며 "숙사 및 군수품 등을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2월 20일에는 '북진하는 일본군대의 행렬에 요구사항 제공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각 도의 관찰사와 군수들에게 "각 지역의 거쳐가거나 경계를 벗어날 때까지 인부나 우마차, 선박, 군수품 등을 공급해 줄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2월 23일 양국의 친교 유지, 동양평화의 확립, 대한제국의 독립 및 영토보전 등을 내세운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의정서 체결 이후 고종은, 일본군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출전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휼병금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1904년 5월 6일에는 창덕궁 주합루 앞마당에서, 고종과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 대신들, 그리고 수백 명의 일본군 장교들이 모인 "황군 전승 축하회"가 거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일본군의 압록강에서의 첫 승리를 자축하고 황군 전사자를 위로하는 자리였다. 

7월에는 만주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본군을 위한 위문사절단이 파견되었다. 4월 14일 한국정부 의정부 회의에서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위문하기로 결정하여 그 뜻을 하키하라 일본공사에게 전달하였고, 하키하라는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 내용은, 고종이 만주에 있는 일본군의 노고를 진념(軫念)하고자 육군부장 권중현(權重顯, 이명 權在衡)을 대표로 위문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권중현은 고종의 어의를 받들어 1904년 10월 8일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용암포행 이세마루[伊勢丸]을 타고 요동으로 출발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11월 12일 서울로 돌아왔다. 또한 1905년 8월 13일 고종은 경의선 공사에 참여한 야마네(山根武亮) 임시군용철도감 육군중장을 비롯한 일본인 7명에게 한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문사절단 파견 고종은 만주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군을 위해 위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장은 친일파 권중현이다.
▲ 일본군 위문사절단 파견 고종은 만주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군을 위해 위문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장은 친일파 권중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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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상처, 나라는 무너지고...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한국도 제국주의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고종과 일부 한국인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군자금을 내고, 만주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일본군대에 위문사를 파견하고, 서울에 무력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위해 군수품과 술까지 대접했으니, 중립국이라고 선언한다고 해도 어느 누가 알아줬을지 의심스럽다. 고종이나 집권층 세력들은 일본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투항하지 않았는가. 민중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일본에 투항한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데 열을 올렸다.

러일전쟁 때 간첩과 밀정들은 의병들을 잡고자 일본군의 하수인으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또한 일진회와 자위단 등의 친일단체들도 의병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일본군 뒤를 따라다니면서 '토벌'했으니,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해 있었다.

결국 전쟁의 결과는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과 불법적인 1910년 병탄으로 이어진 원인이 되었다. 100년도 지난 사건들이지만 지금까지 기억하고 또 되짚어봐야 할 역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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