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의 모습.

야구팬들의 모습. ⓒ 이충섭

 

한나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어느 테니스 동호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아래와 같은 글이 올라왔다.

 

"이명박·박근혜 누가 되어도 좋다. 왜냐면 둘 다 열렬한 테니스 마니아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되어도 한국 테니스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무슨 공약이나 어떤 정치철학이건 간에 내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사람이면 좋다는 것은 비단 스포츠 마니아만의 입장이 아닐 것이다. 유리봉투를 받는 회사원이 세금을 감면하는 공약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농민이나 자영업자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포츠 팬들이라면 당연히 모든 국민이 맘껏 누릴 수 있는 스포츠와 여가활동의 가치를 아는 대통령이 탄생하길 바랄 것이다.

 

전쟁 중에도 야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던 루즈벨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스포츠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스포츠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 위키피디아

스포츠 활동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존중했던 대통령을 꼽자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절망 속에 빠졌던 미국 경제를 되살렸고 2차 세계대전도 승리로 이끈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야말로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들에게 스포츠가 필요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이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프로야구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최고 관리자. 한국의 경우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였던 랜디스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했지만 그래도 야구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루스벨트의 이같은 결정은 1918년 윌슨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을 이유로 경기일정을 축소하도록 지시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조치였다. 미국 야구계는 루즈벨트의 이 공문을 '직진 신호의 편지(Green-light letter)'라고 부르고 있다.

 

"야구경기를 계속하는 것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미국 국민들은 어려운 가운데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고 따라서 과거 어느 때보다 레크레이션이 더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300개의 야구팀이 좋은 경기를 펼쳐 2000만 명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편지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런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인들은 전쟁 중에도 정규 야구리그를 즐겼고 야구가 이때부터 '국가적인 여가(National pastime)'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야구팬은 물론 미국인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안목 때문이다.

 

국민의 여가 생활을 배려하는 대통령

 

우리는 언제쯤 이런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여당이나 야당이나 선거 때만 되면 온갖 장밋빛 공약을 열거하지만, 오히려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고달프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오르기만 하는 물가와 세금, 증가하는 이혼율과 인구감소, 방만한 국민연금 운용으로 인한 불안감, 끊이지 않는 노사분규, '이태백'이라는 자조적인 유머가 현실이 되었고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신분 갈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국민들의 여가를 윤택하게 만들어줄 공약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스포츠 심리학에서는 선수나 관중이 스포츠에 참여함으로써 무미건조하고 틀에 박힌 일상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것도 없고 감동적인 일도 없는, 긴장의 연속선상에 사는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열광과 환희를 느끼기 때문에 어려울 때일수록 스포츠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스포츠 경기가 인정받고 있다.

 

2002 월드컵이 그 좋은 예다. 사람들은 한국팀의 경기력 향상에만 고무된 것이 아니라, 386세대 민주화 시위의 격전지로만 기억되었던 시청 앞 광장에서 모르는 이들과 얼싸안고 하나되면서 처음으로 축제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의 색이라 해서 금기시되던 붉은색, 50년간 짓눌렸던 레드 콤플렉스를 멋지게 극복한 것은 정치나 이념교육이 아니라 바로 스포츠였다.

 

행정수도를 옮기고 대운하를 건설하기에 앞서, 동네마다 저렴하게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보완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저렴하게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해방 이후 온 국민의 여가시설이었고 프로야구의 태동을 가능케 했던, 한국야구의 젖줄과도 다름없는 동대문 구장을 아무 대안 없이 철거하고 있다.

 

반면 88올림픽 이후 변변한 체육행사를 치르지도 못한 잠실 종합운동장은 종교집단 행사로나 활용되고 있다. 겨울철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만여명이 이용하는 야구장은 30년이 지나도록 재건축이 되기는커녕 골프장을 더 짓겠다는 정책만이 나오고 있다.

 

귀빈석에 앉았다가 시구만 하고 자리를 뜨는 대통령은 이제 가라. 고향팀인 아칸소 주립대학을 응원하고자 귀빈석을 마다하고 일반석에서 열렬히 응원을 하던 클린턴이나 전쟁 중에도 국민들의 여가를 소중히 여겼던 루즈벨트같은 대통령을 보고 싶다.

 

이제는 진정으로 스포츠를 즐길 줄 알고, 건강하고 풍요로운 여가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공약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차기 대통령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07.10.26 14:35 ⓒ 2007 OhmyNews
루즈벨트 대통령선거 공약 스포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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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선수협의회 제1회 명예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전임강사 <저서>면접잔혹사(2012), 아프니까 격투기다(2012),사이버공간에서만난아버지(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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