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과 SK는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 빈볼 시비로 인해 집단 난투극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다.

두산과 SK는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 빈볼 시비로 인해 집단 난투극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다. ⓒ MBC 화면 캡쳐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가 맞붙은 200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시작 전 여러 가지 닉네임이 붙었다. 양 팀 모두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을 대거 보유했다고 해서 '발야구 시리즈'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각각 인천과 서울을 연고지로 하고 있어 '경인선 시리즈'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3차전이 끝난 지금, 2007 한국시리즈는 '빈볼 시리즈' 혹은 '격투 시리즈'라 불리고 있다. 1차전에서 SK의 유격수 정근우가 주자로 나가 있던 두산 이종욱의 다리를 팔로 감싸더니, 2차전에서는 두산의 안경현이 SK의 선발 채병용의 사구(死球)에 맞고 손가락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25일에 열린 3차전에서는 두산의 두 번째 투수 이혜천의 빈볼 시비로 양 팀 선수들이 집단 난투극 일보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다. 2차전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만 두 번째 벌어진 '벤치 클리어'(양 팀 벤치의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 나오는 상황)였다.

승리욕을 넘어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올해의 한국시리즈를 지켜 보고 있노라면,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컵라면 건네던 마음 착한 부산 아저씨

 95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는 롯데를 4승 3패로 꺾고 원년 이후 13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95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는 롯데를 4승 3패로 꺾고 원년 이후 13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국시리즈는 OB 베어스(현 두산)와 롯데 자이언츠가 맞붙었던 1995년이었다. 벌써 1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OB는 패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고, 3위에 오른 롯데는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를 4승 2패로 꺾고 OB의 파트너가 됐다. 당시 필자는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었고, 그 중에서도 연고팀인 OB를 응원했다.

마음 같아선 1차전부터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전 경기를 관전하고 싶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은 학교의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발이 묶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 열리는 2차전 경기 밖에 갈 수 없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편리한 인터넷 예매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오직 부지런한 사람만이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오로지 '열정' 하나만 가지고 오후 2시 경기를 보기 위해 친구와 함께 새벽 3시부터 잠실 야구장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섰다.

경기 시작 11시간 전에 잠실 야구장에 도착했음에도 매표소 앞에는 이미 100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대부분은 롯데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상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부선을 가로 지른 열성팬들답게 노련하게 텐트, 먹거리, 화투(?) 등 많은 준비물을 챙겨 왔지만, 매표소 앞에서 밤을 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필자와 친구는 바닥에 깔고 앉을 만한 신문지 한 장조차 없었다.

10월의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으며 매표소 문이 열리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문이 열리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추위에 배고픔까지 더해졌다. 쪼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는 필자와 친구의 꼴은 노숙자가 따로 없었다.

'야구 경기 한 번 보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쯤 어디선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 앞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리고 있던 아저씨 한 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 두 그릇을 우리에게 건넨 것이다.

"마이 춥재? 뜨듯한 국물이라도 좀 들이키 그레이~"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걸 보니, 롯데를 응원하러 부산에서 올라 온 분인듯 하다. 태어나서 수백 그릇의 컵라면을 먹었지만, 그렇게 따뜻하고 맛있는 컵라면은 없었다.

그 때부터 경기장에 입장할 때까지 그 아저씨와 우리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필자가 "롯데는 '마림포'(마해영-임수혁)가 정말 무서워요"라고 말하면 그 아저씨는 "OB는 김상호, 심정수가 있으면서…"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나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응원하는 팀도 다르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통했기에 우리들은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한 번도 불미스런 일이 없었던 깨끗한 '95 한국시리즈'

 한국시리즈에서 아쉽게 패한 롯데도 OB와 명승부를 펼치며 팬들을 감동시켰다.

한국시리즈에서 아쉽게 패한 롯데도 OB와 명승부를 펼치며 팬들을 감동시켰다.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드디어 매표소 문이 열리고 3루측(롯데 응원석)으로 가는 부산 아저씨와 헤어진 필자와 친구는 새벽부터 고생을 한 덕분에 1루측(OB 응원석)의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막대 풍선을 두드리고 응원가를 부르며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OB의 응원 단상에 롯데의 응원 단장이 올라 왔다. 상대팀의 응원 단장이 우리쪽 단상에 올라오다니, 이 무슨 희한한 일이란 말인가.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을때 롯데의 응원 단장이 갑자기 OB팬들에게 큰 절을 올렸다. 동서남북으로 네 번의 큰 절을 올린 후 롯데의 응원단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됐지만, 우리는 모두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기분좋은 잔칫날, 서로 얼굴 찌푸리지 말고 사이좋게 응원합시다!"

그제서야 어리둥절하던 OB쪽 팬들은 우렁찬 박수 갈채를 보냈다. 건너편을 보니 3루측에서는 OB의 응원 단장이 단상에 올라가 롯데팬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구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고,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상대방에 대한 야유나 비방없이 시종일관 질서있는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치러졌다.

95년의 한국시리즈는 어느 해보다 치열했다. 골수팬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OB와 롯데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4승 3패 OB 우승)을 벌였고, 그 중 두 번의 연장 승부와 한 번의 끝내기 승부가 있었다.

그럼에도 양 팀의 선수와 팬들은 한 번도 불미스러운 사태를 만들지 않고 '경부선 시리즈'를 깨끗하게 마무리했다.

볼썽 사나운 꼴은 이제 그만!

12년 전과 비교해 보면 올해의 한국시리즈는 정말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선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업자 정신'은 이미 그들의 머리속에서 가출한 듯 하다. 

한국시리즈는 3만이 넘는 관중이 지켜 보고 있고, 공중파 방송에서 생중계를 한다. 그 중에는 남자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야구장을 찾은 여성팬도 있고, 훗날 한국시리즈 무대에 서기를 꿈꾸는 어린 '야구 소년'도 있다. 

한국시리즈를 통해 이들에게 야구의 매력을 가르쳐 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볼썽사나운 꼴만 보여 준다면 패넌트레이스에서 11년 만에 400만 관중을 돌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양 팀의 팬들 역시 자제해야 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커뮤니티를 보면 부적절한 플레이를 펼친 선수에 대한 적절한 비판보다는 논리와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원색적인 비난들이 난무한다. 그런 행동들이 선수들의 흥분을 더욱 부추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차전이 모두 끝난 현재, 두산이 여전히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앞서 있다. 앞으로 몇 경기를 더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경기에서는 선수들에게도, 팬들에게도 12년 전의 한국시리즈처럼 '즐거운 가을 잔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야구 한국시리즈 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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