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옥이 언제 쌍방울로 왔지?"
"김성근이 따라 온 거겠지 뭐"
"그런 게 아니라, 술먹고 사고치는 바람에 삼성에서 잘린 걸 김성근이 구해줬다던데?"


1996년, 레이더스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오봉옥은 야구장 관중석 곳곳에서 벌어지던 팩소주 파티의 만만한 안주거리가 되곤 했다. 그리고 좁다란 전주 구장, 관중석 코앞에서 몸을 풀던 오봉옥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모자를 고쳐 쓰고, 이를 악물었다.

1994년과 1995년, 두 해 연속 4할에도 못 미치는 승률로 홀로 아득한 밑바닥을 헤매고 있던 레이더스는 1996년, '돌풍의 설계사' 김성근을 감독으로 모셔오며 의욕을 부리고 있었다.

당시 외부의 전문가들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15억을 쏟아부으며 신인 영입에 열을 올렸지만 두드러지는 즉시전력감이 마땅치 않았고, 주포 김기태는 시즌 초반부터 몸이 성치 못했다. 그 해 김원형이 부진했던 마운드에서는 성영재가 간신히 10승을 채웠고, 김기태가 주춤했던 타선에서는 김광림이 홀로 3할에 턱걸이(.303)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해 레이더스는 승률을 무려 2할이나 끌어올리며 정규리그 2위까지 솟구쳐 올랐고, 사람들에게 사라진 비운의 팀 레이더스를 '들러리'가 아닌 '돌풍'의 팀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1989년 돌핀스보다도 더 암울한 조건에서 쏘아올린 더욱 찬란한 비상의 전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 유명한 '벌떼작전'이었고, 그 한 마리의 일벌로서 가장 희생적으로 구르고 달렸던 것은 다른 팀에서 용도폐기되어 흘러들었던 외인부대들이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끼어있던 것이 오봉옥이었다.  

억세게 운 좋은 신인, '무패 승률왕'에 오르다

라이온즈 시절의 오봉옥

▲ 라이온즈 시절의 오봉옥 ⓒ 삼성 라이온즈 웹진


1992년, 제주도 출신으로 영남대 1학년을 중퇴한 특이한 경력으로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은 오봉옥은 시즌 초반부터 거침없이 승수를 모으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가 승리보다는 세이브나 홀드(당시는 홀드 기록을 집계하기 이전이긴 했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할 구원투수라는 점이었다.

4월 28일 레이더스 전에 구원등판해 1.2이닝만을 던지며 가뿐하게 첫 승을 올린 오봉옥은, 이틀 뒤 다시 레이더스에게 한 점 뒤진 9회 초 2사에 등판해 한 개의 아웃카운트만을 잡아내고도 곧장 말 공격에서 타선이 2점을 뽑아준 덕에 역전에 성공하면서 2승을 거두었다.

한 주를 건너 자이언츠와 맞선 5월 6일 경기에서는 한 점차로 앞선 9회 초 2사후에 등판해 박정태와 장효조에게 3루타와 2루타를 맞으며 승리를 날리고도 곧바로 이어진 공격에서 같은 팀 김용국의 끝내기 안타가 터져 나오면서 패전을 승리로 바꿔 챙기는 행운으로 3승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전반기 내내 32이닝만 던지고도 6승을 올리는 행운을 자랑했다.

언제나 공포의 타선을 자랑하는 라이온즈였지만, 그 해 만큼은 김용철과 장태수, 김성래와 이종두가 줄줄이 슬럼프의 도미노에 휩쓸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오봉옥만 등장하면 얼어붙어있던 방망이가 신들린 듯 춤을 추며 동점타와 역전타를 날려댔고, 그 억센 행운이 반복되며 만들어낸 자신감은 투박한 직구에 한결 묵직한 무게를 싣곤 했다.

180㎝가 넘는 신장에 100㎏ 가까운 당당한 체중을 실어 뿜어내는 묵직한 직구가 일품이었고, 슬라이더도 괜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인답지 않은 배짱과 정면승부가 행운으로 덮을 수 없을 만큼의 대량 실점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반기 내내 반복된 행운은 점차 자신감과 신바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라이온즈 김성근 감독은 후반기 들어 오봉옥의 승률왕 타이틀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그런 배려 속에 오봉옥은 체력을 아껴야 하는 불펜 투수의 본분을 벗어나 승패와 무관한 경기에 집중 투입되어 투구 이닝 수를 늘려나갔다. 그 시점에서, 승률왕 타이틀 획득을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승수가 아닌 정규이닝 충족을 위한 이닝 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닝을 소화하기 위해 '이제 한 번쯤 져도 좋다'며 선발로 나서 배짱의 완투를 해대는 그의 공을 상대 타자들은 좀체 때려내지 못했다. 특히 9월 10일 베어스 타자들은, 유인구를 생략하고 가운데로 윽박지르는 오봉옥의 배짱에 기가 질린 듯 무기력한 헛손질을 거듭한 끝에 완봉승을 헌납하기도 했던 것이다.

경기 막판까지 패전의 위기에 몰리다가도 기적 같은 역전타로 회생하기를 수차례, 결국 그는 13승 무패, 2세이브를 기록하며 사상 초유의 100% 승률로 승률왕에 올랐다. 126.2이닝을 던지면서 기록한 3.55의 평균자책점은 준수했지만, '무패'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수치였다.

'김성근식 벌떼야구'의 중심, 오봉옥

레이더스 시절의 오봉옥

▲ 레이더스 시절의 오봉옥 ⓒ 쌍방울 레이더스 팬북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행운이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결코 성실한 선수가 아니었고, 인생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는 이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묵직한 구위와 배짱을 바탕으로, 라이온즈 불펜의 핵심으로 성장해나가던 그를 나락으로 밀어낸 것은 방만해진 자신이었다. 1995년 133.1이닝을 던지며 2.90의 평균자책점으로 생애 최고의 해를 보낸 그는 시즌 뒤 만취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동승자를 사망하게 하는 사고를 내고 구속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두 달 간의 구치소 생활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팀은 더 이상 그를 반기지 않았다. 1994년과 1995년, 두 해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싸늘해진 라이온즈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일대 물갈이를 단행했고, 성실한 편이 못되었던 데다 질나쁜 사고를 친 오봉옥 역시 '쇄신대상'으로 찍혀 방출통보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데뷔 4년 만에 부닥친 선수생활의 막다른 길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신인 시절 라이온즈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던 김성근이었다. 그가 쌍방울 레이더스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오봉옥을 포용했고, 오봉옥은 기꺼이 한 마리의 부지런한 일벌이 될 작정으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집중적인 혹사'를 시킬 대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 해의 레이더스에서 김성근 감독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벌떼작전'을 밀어붙였다. 마무리 조규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보직과 로테이션을 보장받지 못했고, 따라서 매일 거의 모든 투수가 몸을 풀며 출격을 준비하는 일종의 '토털 베이스볼'이 시즌 내내 이루어진 것이었다.

총력전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물론 막판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과 끝내 포기하지 않는 투지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더 꼽자면 팀 전체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마당쇠의 역할이다.

그 해 오봉옥은 에이스 성영재에 이어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이닝을 감당해냈고, 두 번째로 많은 승수를 올렸다. 팀의 모든 투수들이 나누어 져야 할 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소화해내며 중심을 형성했던 그의 존재는, 엄청난 체력소모를 감수해야 하는 극단적인 전술을 시즌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었던 힘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 해 오봉옥은 선발과 중간, 마무리를 정신없이 오가면서 135.1이닝을 던지며 평균 3.06점의 자책점으로 버텨냈으며, 9승(7패)과 4세이브를 기록했다. 데뷔 후 13연승의 신화를 만들며 승률왕에 올랐다가 나락으로 내던져졌던 황태자가, 외인부대의 단단한 톱니바퀴로서 헌신하며 거친 승부사로 거듭나던 순간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떠돌이 돌하루방 투수'

타이거즈 시절의 오봉옥

▲ 타이거즈 시절의 오봉옥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그의 결코 평탄하지 못한 선수생활은 15년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다섯 팀의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전국을 떠돌아야 했다.

1996년과 1997년, 레이더스가 짧은 전성기를 지나 곧바로 팀 해체의 비운을 맞게 되자 해태 타이거즈로 옮겼고, 해태가 다시 매각되자 기아 타이거즈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가, 2004년에는 한화 이글스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더 이상의 타이틀이나 기록은 없었다. 그리고 신인 시절만큼의 주목을 받을 일도 다시는 생기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근거로 한 기대에 늘 조금씩 못 미치는 성적이었고, 한 발의 전진과 두세 발의 후퇴가 거듭되기도 했다. 유니폼을 갈아입을 때마다 각오를 새로이 다지며 반짝 떠오르기도 했지만, 길게 상승곡선을 그리지는 못했다. 그는 늘 잊힐 때쯤 나타났고, 주목하려고 보면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항상 제 몫은 해내는 투수였고, 마음만 먹으면 거듭 재기해 타자를 압도하는 강한 투수이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피할 수 없었던 외로움과 허전함이 잠재력을 갉아먹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승부사이기도 했다.

결국 2006년 시즌 단 두 번의 등판을 끝으로 프로무대를 떠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제주제일중학교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를 우상으로 바라보는 중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매일 20년 전의 자신을 대면하며 파란만장했던 선수생활을 하나하나 복기해 곱씹고 있을지도 모른다.

15년 동안 그가 남긴 것은 63승 68패 56세이브, 그리고 3.99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데뷔 이후 최다연승 기록과 최초의 무패 승률왕이자 최초의 제주도 출신 야구선수라는 기록이다.

김은식 야구의 추억 오봉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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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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