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12일 서울 리즈칼튼 호텔에서는 한 야구인의 회갑연이 열렸다. 회갑연의 주인공은 그해 LG 트윈스를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끌고도 해임당한 김성근 감독이었다.

시즌이 끝나자마자 LG트윈스에서 중도 해임을 당한 그였기에 회갑연 또한 썰렁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중략)… 그러나 놀랍게도 옛 OB, 태평양, 쌍방울, 그리고 삼성과 LG트윈스의 전현직 선수와 코치들이 모두 모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를 잘랐던 LG트윈스 프런트 직원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동아일보>는 김성근의 회갑연을 이렇게 표현했다.

놀랍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세간에서 바라보는 김성근은 '구단과 항상 마찰이 있는 감독, 비주류, 재임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잘리는 감독'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SK를 1위로 이끌고 있는 2007년 현재도 김성근의 야구는 그렇게 비치고 있다.

재일동포 출신의 영원한 '비주류'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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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SK 감독에게는 항상 논란이 따라다닌다. 지독한 관리 야구와 무리한 투수 기용에 대한 비난이 그를 따라다닌다. 하위팀을 이끌고 기적을 연출하는 능력에 대한 찬사 역시 그의 몫이다.

프로야구 통산 900승을 넘게 거둔 감독이면서도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더 가까운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 김성근, 지독한 관리야구와 치밀한 데이터야구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김성근의 야구, 그러나 김성근의 야구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있다.

김성근은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교시절까지 일본에서 야구를 했다. 사회인야구팀에서 투수로 활약을 했던 김성근은 '교통부 야구단' 창단멤버로 참여하게 되면서 1961년 한국에 정착을 하게 된다.

'학연과 지연'과 같은 인맥이 미덕이 되던 한국 사회에서 이 땅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성근은 시작부터 '비주류'였던 셈이다. 김성근이 자신이 맡은 팀 코치로 유난히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챙기면서 생겨난 '김성근 사단'도 김성근 스스로 '비주류'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김성근 감독이 해임되면 동반 사퇴를 해야 했다.

 "나를 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OB의 감독을 거쳐 1989년 태평양의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은 그해 만년 하위팀 태평양을 포스트시즌까지 끌어 올리며 단숨에 스타급 감독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인천 연고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0년 태평양은 5위에 머물렀으며 김성근은 팀을 떠나게 된다. 김성근의 퇴진은 성적 하락 때문이 아니었다. 내막은 '임호균 각서'에 있었다. 1990년 시즌을 앞두고 태평양은 노장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성근 감독은 신동관(작고) 당시 구단 사장에게 찾아가 '임호균이 90년 시즌에 5승을 올리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쓴 뒤 사장실을 나왔다고 한다.

김성근이 전성기가 지난 투수 임호균의 5승에 감독직을 걸었던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다. "사실 임호균이 없어도 됐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보는 것은 나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김성근이 임호균의 5승에 감독직을 건 이유다.

그러나 김성근은 자신이 '감독직을 유지하려고 임호균을 억지로 승리 투수로 만들어주려고 한다'는 루머가 떠돌아다니자 시즌 중반부터 임호균을 아예 등판시키지 않았다. 임호균은 결국 5승을 거두지 못했고 김성근은 미련 없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당시 선수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며 만족스럽다는 말을 남긴 채….

부상당한 김재현의 호쾌한 역전타, "그의 스윙을 믿었다"

99년 쌍방울 감독을 끝으로 1군 감독직을 맡지 않았던 김성근은 2001년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을 하면서 다시 그라운드 전면에 등장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90년대 강팀 LG가 아니었던 탓에 김성근은 부임 첫해 6위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성적보다 더 큰 문제는 '김성근의 야구와 LG의 야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란이었다.

이른바 '자율 야구'로 대변되던 팀 LG와 지독한 '관리야구'의 대명사 김성근이 만났으니 당연한 논란이었다. 당시 LG의 구본무 구단주까지 이 문제를 언급했을 정도니 팬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2002년 김성근은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약팀으로 지목한 LG를 한국시리즈까지 끌어 올리는 돌풍을 일으켰다. 2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김성근의 야구는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6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최고의 감동을 선물한 LG를 패배자로 부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김성근의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2002년 11월 11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6차전. 5회까지 삼성과 엘지는 긴장의 고삐를 한 순간도 놓을 수 없을 만큼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팽팽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6회초, 엘지는 조인성의 적시타로 5-5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주자 두 명이 루상에 나가 있는 절호의 역전 기회를 맞았다. 바로 그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대타 김·재·현"

김재현은 그해 6월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고관절이 썩어 들어가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김재현은 달리는 것은 물론,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김재현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 있고 절박한 상황에서 타석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

김재현은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 자신을 한국시리즈에서 뛰게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고 김성근은 두 말 없이 투수 최향남을 빼고 김재현을 엔트리에 집어넣었다. 수술 결과에 따라서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제자' 김재현의 부탁을 김성근은 외면하지 못했다. 철저한 관리야구와 데이터야구는 거기에 없었다.

대타로 들어선 김재현은 기적 같은 역전 2타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펜스까지 굴러가는 2루타성 타구였지만 김재현은 1루까지 다리를 절며 간신히 도착한 후 대주자로 교체가 되었다. 김성근은 김재현을 엔트리에 집어넣은 것에 대해 단지 "김재현의 스윙을 믿었다"라고 짧게 대답을 했다.

혹자는 김성근의 대타 작전이 또 한 번 귀신같이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작전이 될 수가 없었다.

사람냄새 물씬 나는 김성근의 이야기

올 시즌도 김성근 감독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SK를 이끌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은 시즌이 끝난 후에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2007년 SK의 야구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냉혹한 야구를 구사한다는 고집불통 김성근의 야구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야구 이야기가 아닌 사람냄새 물씬 나는 그런 이야기를….

2002년 12월 12일 서울 리즈칼튼 호텔에서는 한 야구인의 회갑연이 열렸다. 회갑연의 주인공 김성근 감독은 그날 한국으로 온 이후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1964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을 하던 날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에 첫 번째 눈물을 흘렸고, 야구를 함께 해온 제자들이 마련해 준 회갑잔치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오늘 여러분을 다시 보니 38년 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한 것은 생애 최고의 결정이었다는 자부심이 든다. 감독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여러분과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려고 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성근의 야구는 비겁하고 냉혹하다고 하지만, 필자는 김성근의 야구에서 진한 사람 냄새를 맡는다.

김성근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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