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회 개최 도시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의 항구 도시 푸에르토 라 크루스의 시내 풍경.
ⓒ 장혜영
우리는 아직까지도 아메리카 대륙을 이야기할 때 북미, 중미, 남미 이런 지리적인 용어를 많이 쓴다. 하지만 때로는 과학적인 개념보다 문화적인 개념이 더 정확할 수도 있는 법. 아메리카 대륙을 일컬을 때는 지리적인 분류가 의미를 갖기 힘들기 때문에 앵글로 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라는 문화적인 분류를 쓰는 게 통상화 되어 있다. 북미 지역의 미국과 캐나다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영국의 식민 문화가 그대로 남은 앵글로 색슨 문화권인데 반해, 북중미에 걸쳐서 위치한 멕시코와 그 이남의 나라들은 일부 카리브해 나라들을 제외하면 이베리아 반도 나라들의 식민 지배와 혼혈, 독립이라는 동일한 역사와 언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로 엮어주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축구 사랑'이다. 요즈음 지구 반대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코파 아메리카(2007년 6월 26일 ~ 7월 15일, 베네수엘라)는 '아메리카 컵 (copa=cup)' 혹은 '아메리카배' 축구 대회란 뜻으로 그 명칭 그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각국 국가대표팀의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다. 하지만 남미축구협회에서 주관을 하고 있는 만큼 중앙 아메리카 이북의 나라들은 1993년부터 초청 형식으로 참가했는데, 그 2장의 초청장 중 하나는 항상 멕시코의 몫이었다. 나머지 한 장은 올해의 경우 12년 만에 미국이 가져감으로써 앵글로 아메리카 지역까지 문호가 개방되었으나 라틴 아메리카 팀들밖에 없는 이 코파 아메리카에서 미국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이질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법.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짜 통산 3번째 참가에만 의의를 두는 분위기다. 축구 외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3대 강국은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이다. 허나 축구의 3대 강국도 이 세 나라라 말한들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우루과이나 파라과이 등등 멕시코에 견줄만한 실력을 갖춘 다른 축구 강국들도 있지만 이 세 나라는 무엇보다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프로리그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최근에 갈 수록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멕시코의 프로리그다. [멕시코] 남미 축구인에게 매력적인 시장
 작년 독일 월드컵 16강에 진출했을 때 멕시코 사람들의 모습. 16강 진출을 기뻐하기보다는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패한 것을 우려하는 표정들이었다.
ⓒ 장혜영

멕시코는 이번에도 세간의 기대에 부응하듯 한국 시각으로 6월 28일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오르다스에서 열린 대회 B조 1차전에서 강호 브라질을 2-0으로 완파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멕시코는 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남아메리카의 강호들과 만나면 항상 좋은 경기를 펼칠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멕시칸들의 여유 있고 느긋한 기질 때문에 강호들을 만나도 허둥대지 않는다. 대신 약팀을 만났을 땐 여유 부리다가 허술하게 역습을 당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둘째로, 남아메리카 축구 강국들과 상호 교류해 상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것이 가장 큰 이유다. 멕시코 프로리그에는 많은 남아메리카 출신 선수들이 뛰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골드 러시'라 불릴 만큼 아르헨티나 출신 감독들의 리그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독일 월드컵 때 멕시코 대표팀 감독이 아르헨티나 사람 '라 볼페'였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이었던 페케르만이 대표팀 사퇴 이후 다른 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선택한 자리가 멕시코 톨루카 팀의 감독직이었다. 멕시코는 남부럽지 않는 축구의 인기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물가를 바탕으로 선수와 감독들에게 상당히 높은 연봉을 지급한다. 그런 이유로 지난 IMF 환란 이후 자국 화폐의 하락으로 국내 리그의 제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게 된 아르헨티나 축구인들에게 멕시코가 매력적인 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게다가 멕시코 프로팀들은 중앙 이북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아메리카 대륙 클럽 컵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정식으로 합류하고 있다. '리베르타도레스 Libertadores' 는 '해방자들' 이란 뜻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펼쳤던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해방의 영웅들을 일컫는 말이다. 결국 남미축구협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이 프로 대회도 단지 남아메리카만이 아닌, 단일한 문화의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앙 아메리카 나라들의 축구 수준이 아직 남아메리카 팀들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는 만큼, 수준 높은 리그를 갖고 있는 멕시코에만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데 사실 멕시코 팀들로선 리그 경기 사이의 주중에 펼쳐지는 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토너먼트를 치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남아메리카 남쪽의 나라까지 가려면 비행기를 10시간 넘게 타야하며, 계절도 완전히 반대다. 게다가 볼리비아 같은 나라 팀과 붙으면 아무리 고도에 사는 멕시칸들이라도 견디기 힘든 3600m대 이상의 고산 지대에서 경기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멕시코의 축구 선수들은 남아메리카 축구를 더더욱 잘 알게 되고, 그 경험들이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강호들을 만나서도 주눅 들지 않는 저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과르다도, 벨라, 도스 산토스 등 좋은 유망주들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 점도 멕시코의 큰 강점이다. [아르헨티나] 리켈메, 조국이 나를 부른다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국가 대표 유니폼을 평상복처럼 자주 입고 다닌다. 사진은 마라도나의 10번 유니폼을 입고 쿠바에 단체 여행 온 아르헨티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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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코파 아메리카의 우승후보 1순위는 역시 아르헨티나다. 실력이나 선수들의 이름값도 최고지만, 무엇보다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향해 똘똘 뭉치는 그 열의가 우승 후보로 첫손가락에 꼽기에 손색이 없다. 팀의 선수들 대부분이 유럽리그의 주전급들이지만 어느 한 명 피곤하다는 군소리 없이 대표팀에 합류했다. 게다가 2명의 핵심적인 국내파가 포함됐으니 바로 베론과 리켈메다. 베론은 작년 기적 같은 역전극으로 보카 후니오르스를 제치고 라 플라타의 에스투디안테스를 개막 리그(Torneo Apertura)에 우승시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증명했다. 리켈메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리켈메는 지난 월드컵 때도 대표팀의 주축으로 뛰었으나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는 리켈메를 기용하는 게 낫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쟁이 불붙었다. 결국 일부 사람들의 비난을 감당 못한 어머니가 가슴앓이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생겼고 충격을 받은 리켈메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고 소속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소속팀인 비야 레알에서는 또 자신을 향한 감독의 비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축구 선수로서의 자기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낀 리켈메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고향팀 보카 후니오르스로의 임대에 합의를 했고 그렇게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주변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전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우상' 리켈메의 귀환을 반기며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유럽의 서포터들과도 비교가 안 되는 보카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속에서 그는 점차 열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올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며 팀을 우승시키자 '아르헨티나 현역 최고의 선수 리켈메'를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대표팀에 다시 모시고 와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고 때에 맞춰 리켈메도 조국의 부름은 항상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답했다. 이로써 그는 전 국민적 합의 속에 대표팀에 복귀했고 베론, 아이마르, 리켈메의 황금 미드필더들은 이렇게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게 되었다. [브라질] 배구 인기에 역전당하는 축구?
 브라질 살바도르 데 바이아의 한 시민이 만든 브라질의 월드컵 5회 우승을 축하하는 모래 조각품.
ⓒ 장혜영

브라질 축구의 위기론은 단지 브라질 팀의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해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브라질 축구의 뿌리에서 변화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브라질 축구는 오랫동안 가난한 아이들에게 인생 역전의 상징이자 터전이 되어 왔다. 호마리우나 호나우두 모두 빈민가 출신으로 그들의 성공에는 하늘이 준 재능만큼이나 축구로 성공해야만 나도, 가족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1994, 2002년의 월드컵 우승과 그간의 축구 붐 속에서 그동안 굳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힘든 축구를 시키지 않던 중산층 이상 계층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축구계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부모의 좋은 지원을 등에 업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맨발에 재능 하나 만으로 축구계에 턱걸이를 한 아이들 간의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고 결국 브라질 유소년 축구는 점차 중산층화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결과는 축구의 저변을 더 넓힌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빈민가 아이들의 자리를 빼앗은 중산층 이상의 축구 영재들은 언제든 축구를 관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축구 외에는 먹고 살 대안이 없는 빈민가 아이들과는 달리 성공과 출세를 위해 축구를 하는 이들은 언제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브라질 축구 위기론의 다른 근거로는 배구 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브라질 스포츠의 원천은 바로 해안가에 있다. 그런데 저녁이면 모두 뛰어나와 비치 사커를 하던 이 해안가에서 수년 전부터 비치 발리볼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단순히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재미로 비치 발리볼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리우 데 자네이루의 가장 큰 해안인 코파카바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배구 교실이 존재한다. 유소년 및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이 배구 교실들은 예전엔 전부 축구 교실이었다. 그것이 배구 교실들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이후 브라질은 부동의 배구 최강국이 되었고 TV 광고 등에도 배구가 단골 테마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브라질 제 1, 2의 스포츠는 축구와 배구였고 배구가 인기가 있다고 해서 축구가 위축됐다는 주장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축구의 저변을 조금이라도 갉아먹을 수 있는 위험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브라질의 성적이 나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역시 유럽파들의 국가대표팀 합류 거부일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전 멤버가 하늘색 줄무늬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든 것과는 달리 브라질은 카카와 호나우지뉴 등 주축 선수들이 월드컵도 아닌 코파 아메리카를 위해 휴식기에까지 뛰는 것은 좀 피곤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브라질 주축 선수들이 이제 대부분 유럽 생활에 더 익숙해져 있고 브라질 국적과 동시에 유럽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월드컵과 같은 화려한 무대가 아닌 국제 대회에 입는 노란색 유니폼에 그다지 긍지를 갖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브라질의 축구 성격을 바꾸고 있는 요소들이고 그것이 브라질 축구를 위기로 몰고 갈 것이냐 아니면 단지 과도기적 변화에 그치게 할 것이냐는 것은 브라질 축구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근 흔들리는 브라질과 조국 사랑을 목 놓아 노래하는 아르헨티나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축구공은 둥글고, 월드컵 5회 우승의 황제 팀의 저력은 무시 못하는 법. 언제나 그렇듯, 이번 코파 아메리카의 우승컵을 누가 들게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다같이 지켜보는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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