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한국시리즈 4차전. 1승 2패로 몰리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먼저 한 점을 뽑아내며 한숨 돌리는가 싶었지만, 6회말 이글스 용병 듀오가 구축하고 있던 고비를 넘지 못하고 다시 역전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점수는 1-1, 데이비스의 적시타로 동점을 허용한 뒤 1사 2·3루 상황에서 등장한 것은 로마이어였다.

90년대 초반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렸던 타선에서 이미 이정훈과 이강돈이 이탈해 있던 그 해, 이글스에서 가장 무서운 방망이를 휘두른 것은 단연 로마이어였다.

3할 3푼에 가까운 타율에 30개의 홈런과 35개의 도루로 외국인선수 최초의 30-30클럽 가입자였던 데이비스도 훌륭했지만, 로마이어는 그 해 무려 45개의 홈런과 109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그가 기록한 45개의 홈런은, 장종훈의 41홈런 기록을 6년 만에 깨뜨린 42홈런의 우즈를 또다시 넘어선 외국인 역대 최다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마이어를 상대하는 투수들의 자세는 분명했다. '최선을 다해 승부한다. 그러나 우선은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본다.'

앞서 그 해 플레이오프 3차전 1회말 무사 만루위기에서 로마이어를 맞이한 두산의 투수 최용호는 고의에 가까운 볼넷으로 밀어내기 한 점을 헌납해 가며 그를 피해갔을 정도였다.

1사 2·3루 상황에서라면 더 선택하고 말 것도 없었다. 더구나 한 점 더 주고 역전을 허용한다면, 결정적으로 승기를 내줄 수밖에 없는 한국시리즈 4차전이었다. 롯데 선발 주형광은 로마이어를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만만한' 후속타자를 맞이했다. 그는 바로 장종훈이었다.

데이비스와 로마이어에 가린 지명타자

▲ 99년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송진우와 장종훈(송진우 오른쪽의 35번)
ⓒ 한화 이글스 그 해 데이비스와 로마이어에 이어 5번 지명타자로 주로 나섰던 장종훈은 그런 불쾌한 정면승부를 종종 경험해야 했다.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뽑아내온 강타자였고, 특히 그 해에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투수들의 정면승부 덕분에 27개의 홈런을 뿜어내며 '회춘'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지만, 역시 데이비스와 로마이어에 견줄 존재감은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 해 데이비스와 로마이어가 연속홈런으로 올린 기세를, 평범한 외야 플라이로 식혀버리며 관중석을 헛기침 소리로 채우는 장면이 되풀이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존심 긁는 정면승부를 응징하기 위해 잔뜩 힘을 주고 공을 때리다보면, 투수들 수에 말려 고의사구로 걸어 나갔던 발 느린 로마이어와 함께 병살당해 덕아웃으로 민망한 동행을 해야 했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게다가 장종훈은 백전노장답지 않게 한국시리즈에서 항상 긴장하곤 했다. 1차전 선발 선동열을 격파하며 먼저 1승을 거두고 2차전에서도 앞서나가며 우승 꿈에 부풀었던 89년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실책으로 타이거즈에 2차전 역전승을 헌납하며 내리 4연패를 당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때 생긴 소심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선 3차전에서도 2루타로 2타점을 올리고도 후속 송지만의 안타 때 3루에서 횡사 당하는 어이없는 주루플레이로 롯데 자이언츠에 기사회생의 빌미를 주었던 것 역시 그였던 것이다.

상대투수는 만루 상황에서 맞상대로 장종훈을 지목했다. 장종훈은 방망이를 꼭 움켜쥐었다. 바로 13년 전, 어머니 손을 잡고 이글스 연습장에 연습생 테스트를 받으러 가던 그 날처럼 말이다.

주형광은 병살타를 노리고 몸 쪽 승부를 해왔다. 왼손 투수의 손을 떠나 오른손 타자의 무릎 쪽으로 대각선으로 파고드는 공. 장종훈은 그 공을 욕심내지 않고 결대로 잡아당겨 좌익수 머리 위로 띄웠다. 그리고 그 사이 3루에 있던 임수민이 홈에 안착해 두점째를 올렸고, 그것이 그대로 그 경기의 결승점이 되었다. 홈런이나 안타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가장 필요한 한 방이었다.

사흘 뒤 잠실에서 벌어진 5차전 9회말에도 장종훈은 빛나는 희생플라이를 날렸다. 2-3으로 뒤지고 있던 9회초 1사에서 데이비스의 안타와 로마이어의 3루타로 동점을 이룬 상황에서 장종훈은 이번에는 우익수 쪽으로 멀찍이 공을 띄워 자이언츠를 4-3으로 누르는 넉 점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점수로 이글스는 처음이자 유일한 우승 축배를 들 수 있었다.

'고졸 선수', 다이너마이트로 자라나다

82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충북지역 고교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룬 팀이었지만, 그 우승을 혼자 일구다시피 했던 송진우가 팔꿈치 부상으로 빠져있던 83년에 세광고는 다시 전국 각지 강호팀들의 '밥'으로 전락했다.

그 해 세광고에 입학했던 유격수 장종훈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나마 충청지역을 연고로 창단한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가 있었기에 연습장에 찾아가 문이라도 두드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출범 첫 해인 86년 채 3할 승률을 채우지 못했던 이글스의 형편없이 부족한 선수사정 때문에 장종훈은 2군이나마 정식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고, 이듬해인 87년에는 주전 유격수 이광길이 부상으로 이탈한 사이 1군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에게 주어진 기가 막힌 행운의 연속이었다.

아직 '고졸 선수'가 흔치 않았던 그 무렵, 장종훈이 나서는 곳마다 '고졸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화면에 잡힐 때마다 '한국야구의 미래'이라는 입 발린 칭찬이 얹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맞지도 않는 듯한 헬멧과 유니폼에 어딘가 어색한 폼으로 방망이를 움켜쥐고 선 작고 앳된 소년에게 깊은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87년, 그 한 해 동안 장종훈은 모든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입단 당시보다 키가 8㎝나 자라면서 체격이 당당해졌고, 재일교포 출신의 팀 선배 고원부에게 하나 둘 얻어 배운 타격기술이 드디어 몸에 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2할 7푼에 8개의 홈런으로 장종훈은 주전자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12개, 그 이듬해에는 18개로 늘어난 홈런이 점점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1990년. 그는 홈런 28개를 날려 앞 세대 홈런왕 이만수를 한 개 차로 물리치고 첫 번째 홈런왕에 올랐다. 그리고 1991년. 그 해의 장종훈과 비교하려면 아마추어 시절의 김재박 정도를 데려와야 할 것이다. 그 해 장종훈은 홈런(35), 타점(114), 득점(104), 안타(160), 장타율(0.640) 1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팀 동료 이정훈과는 타율, 장효조와는 출루율 1위를 다투었다. 결국 타격 7관왕에 근접한 5관왕이었다.

(김재박의 경우 77년 실업야구 종합시상에서 7관왕을 달성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타격, 홈런, 타점, 도루 외에 신인상, MVP, '삼관왕상(타율,타점,홈런)'까지 포함한 '트로피 개수'를 의미했다. 같은 기준에서라면 골든글러브와 정규리그 MVP에 뽑힌 장종훈 역시 '7관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92년에는 41개의 홈런을 때려내 한국야구에 최초로 40홈런 시대를 열고 말았다. 그 시절 91, 92년 연속으로 타격왕을 차지했던 이정훈, 89, 90년 연속 최다안타왕을 차지했던 이강돈과 함께 버티고 있던 이글스의 타선을 사람들은 '다이너마이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학 가고 싶지만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 92년 정규리그 MVP로 선정된 장종훈
ⓒ 한화 이글스 학력과 능력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아니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못난 고집은 그를 무던히도 들볶았다. 그저 '대단하다'면 좋을 것을 '고졸로서, 대졸도 하지 못한 일을…'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댔고, 대전의 어느 4년제 대학에서는 특례 입학을 제의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장종훈은 담담히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사실 난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대학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 그런데 나마저 대학을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 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일요신문과의 인터뷰 중에서, 05.7.3)

어차피 그를 키운 것은 대학이 아니라 빈 연습장에 널려있던 허드렛일, 그리고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겠다며 꼭 움켜쥔 배트와, 비 오는 날에도 기어이 그것을 휘두르다 온통 벽지를 긁어먹은 좁은 단칸방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것 그대로의 싸움터에서 건강하게 굵은 뼈가, 돼먹지 못한 학벌의 덤 위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자는 절대 보지 못할 것까지 볼 수 있는 지혜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90년부터 92년까지 3년 연속 홈런과 타점 타이틀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90년대 내내 그는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냈고, 거의 한 해 걸러 한 번씩은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그 사이 평균 타율은 3할에 육박했고, 200루타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무려 7번이었다. 92년 당한 무릎 부상 때문에 부족한 훈련양과 잊을 만하면 돌아와 신경을 건드리는 통증을 안고 기록한 것들이었다.

장종훈의 말, 말, 말
"그때는 몸이 좀 잘았다. 키가 168㎝, 몸무게도 55㎏ 정도였는데, 그래서 매일 밤마다 키 좀 크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팀에서 유명한 선배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연습생으로 입단했을 때의 느낌을 묻는 질문에)

"그 때 홈런을 좀더 치고 싶어서 타율을 좀 까먹었는데, 그 때는 나이도 젊었기 때문에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좀더 잘 해서 7관왕을 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타격 7관왕에 도전하다가 결국 5관왕으로 마무리되었던 91년을 회상하며)

"프로야구에서 감독을 꼭 한 번 해보고 싶다. 그래서 공부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

- CBS 라디오 '파워스포츠'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 한 전화 인터뷰 내용 중에서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체력도 떨어졌고, 2001년 시즌 초반 엄지손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이 겹치며 부진이 길어졌다. 그래서 2년 넘게 2군을 전전해야 했던 그 때, 팀에서 더 이상은 자신의 빈 자리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2005년 9월 15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오랜만에 지명타자로 출장한 장종훈은 헛스윙 삼구삼진을 당한 뒤 다음 타석 무사 2,3루 기회에서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곳 대전구장에 몰려든 1만이 넘는 팬들은 끊임없이 '장종훈'을 연호했다. 그 경기는 장종훈의 은퇴경기였다.

5회말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레드카펫이 깔렸고, 그 위에서 수줍은 듯, 떨리는 듯 고별사를 읽는 장종훈의 목소리는 중간 중간 끊어졌고, 그 사이를 대전 팬들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채워 넣었다.

"긴 시간, 과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다시 야구선수가 되겠습니다."

팬들은 'forever 35'라는 문구가 새겨진 수건을 흔들었고, 그 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 수건에 새겨진 번호 35는 영구 결번되었다.

영구 결번된 '35'

▲ 은퇴식에서 후배 정민철과 함께
ⓒ 한화 이글스 월급 40만원짜리 연습생으로 시작해 20년, 그리고 정식 프로선수로서 열아홉 시즌동안 그는 1950경기에서 6292번 타격에 나서 340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 모든 것이 아직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프로야구의 최다기록이다.

그 외에 1771개의 안타와 1145개의 타점, 그리고 1043개의 득점을 기록했다. 그 역시 양준혁과 전준호 같은 후배들이 넘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록이다.

운이냐 실력이냐를 따지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정말 중요한 건 '끈' 이요 '배경'이라는 이야기가 별 수 없이 설득력을 가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물론 몸뚱이로 말하는 운동장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생살이 별 것 없다고, 결국 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라고 끈적끈적한 웃음 흘리며 술잔 내미는 팔뚝을 볼 때마다 나는 장종훈을 떠올린다. 물론 그런 기회만 있다면야 대개는 '그럼요, 그럼요'하며 깨끗이 비운 술잔 두 손으로 받쳐 되돌릴 것이 내 모습인 것도 별 수 없다만, 그래도 오로지 실력, 그리고 사소한 일상의 행운들을 놓치지 않은 의지와 노력만으로 일군 성공의 전설 하나쯤 가슴에 품지 않고서야 이 밥맛 떨어지는 세상을 어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2007-04-11 09:41ⓒ 2007 OhmyNews

야구 연습생 대학 장종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