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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안개의 성>
ⓒ 황매
한때 롤플레잉 게임에 빠져들었던 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 이야기다. 일본 게임회사인 팔콤(Falcom)에서 나온 이스(YS) 시리즈와 영웅전설 시리즈가 바로 그 게임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게임을 하느라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설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게임 때문에 식음을 전폐했던 시절이었다.

팔콤에서 나온 게임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바로 스토리 때문이었다. 이스 시리즈도, 영웅전설 시리즈도 그래픽이나 각종 효과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게임들에 빠져들었던 것은 뛰어난 스토리 때문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이스와 영웅전설을 능가하는 롤플레잉 게임을 접해보지 못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요즘에도 3차원 그래픽, 화려한 마법과 전투효과로 무장한 게임들이 계속해서 출시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스토리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게임은 언제나 이스와 영웅전설이다. 지긋지긋한 불법복제 때문에 영웅전설 6의 패키지가 한국에서는 출시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허공을 디딘 것처럼 가벼운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명작 게임을 소설화 한 <이코-안개의 성>

미야베 미유키의 <이코-안개의 성>을 읽는 동안 내내 과거에 즐겨했던 롤플레잉 게임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코-안개의 성>은 게임을 소설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코>라는 게임은 소니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플레이 스테이션2 게임이다. 이 게임이 출시되었을 때는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내가 영웅전설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미야베 미유키도 <이코> 게임에 빠져서 식음을 전폐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는 게임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초기에는 주로 사회추리소설을 발표했지만, 2001년 이후로는 영역을 넓혀서 판타지 성향이 강한 작품들도 줄곧 발표하고 있다.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일본 SF대상 등을 비롯해서 일본 문단의 상이란 상은 죄다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미야베 미유키가 게임 <이코>를 소설화한 작품이 바로 <이코-안개의 성>이다.

<안개의 성>의 무대는 전형적인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평온한 마을이 있고, 그 마을 너머에는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거칠고 황량한 산과 벌판이 있다. 그리고 그 산 너머에는 마물들이 우글거리는 성이 있다. 이름하여 '안개의 성'. 안개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성이지만, 이 성에는 어둡고 무서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전설에 의하면 마을에는 몇 십 년에 한 명, 머리에 뿔이 달린 아이가 태어난다. 뿔이 달린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안개의 성에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 그래야지 인간 세상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이코'는 바로 그 제물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아이다. 이코가 13살이 되는 해에, 이코는 안개의 성에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뿔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서 건강하다. 아프지도 않고, 잔병치레도 없다. 사슴처럼 달리고 토끼처럼 뛰고 다람쥐처럼 나무를 오른다. 그리고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신체적 능력이 바로 제물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평온한 마을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라지만, 그것도 13살이 될 때까지 만이다.

13살이 되는 그 해에, 뿔이 달린 아이는 모든 사람들과 생이별을 해서 안개의 성으로 끌려간다. 끌려간 이후에 그 아이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는 안개의 성으로 끌려가자마자 죽는다고 말하고, 또 누구는 안개의 성에서 평생동안 갇혀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공포의 대상인 안개의 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다만 안개의 성에는 거대한 악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 세상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개의 성으로 끌려간 이코, 싸움을 시작하다

<이코-안개의 성>은 이렇게 시작한다. 평온한 인간 세상과 악의 소굴인 안개의 성. 그리고 그 성으로 끌려가는 13살의 남자아이. 이 정도면 흥미로운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의 무대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이코는 안개의 성으로 끌려가지만,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약한 아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인한 전사로 성장해간다. 처음에는 부서진 의자 다리를 휘두르며 마물과 싸우지만, 시간이 지나면 봉인의 검을 두 손으로 들고 악의 소굴로 뛰어들어간다. 이코는 결국 안개의 성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정체를 밝히고, 그 정체와 최후의 전투를 벌여서 승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은 선이고 마물은 악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을 거부한다. 안개의 성에 들어간 이코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점이다. 이 성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성은 어떻게 유지되는지, 자신에게 나타나는 끊임없는 환영은 무엇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코의 능력은 점점 강해지지만, 동시에 점점 의문이 짙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몇 차례의 반전.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바로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화차>, <이유>, <모방범> 같은 굵직한 추리소설 속에서도 미야베 미유키는 흔들리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현대인의 내면을 묘사했다. 그리고 그런 특징은 <드림 버스터>, <이코-안개의 성> 같은 판타지 성향의 작품들에서도 여전하다. 이코는 갈등하고 좌절하고 회의에 젖는다. 그리고 펑펑 울기도 한다. 인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일까?

<이코>라는 게임을 플레이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미야베 미유키의 능력은 판타지의 무대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개인적으로는 미야베 미유키가 다시 <모방범> 같은 추리대작을 발표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판타지 성향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바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추리이든 판타지이든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재미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만들어내는 인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코-안개의 성>도 마찬가지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기나긴 소설이지만,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마물과 싸우면서 바람의 탑을 걸어 올라갔던 이코도 지루함 따위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미야베 미유키 지음 / 김현주 옮김. 황매 펴냄.


이코 - 안개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현주 옮김, 황매(푸른바람)(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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