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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육에 이르는 병>
ⓒ 시공사
추리소설의 용어 중에서 '서술트릭'이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작가가 독특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를 속이는 기법을 가리킨다. 추리작가가 독자를 속이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을 어떻게 속이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설 구성의 3요소를 흔히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 한다. 이 3가지 요소는 아마 추리소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추리작가는 이 3가지에 대해서 각각 트릭을 적용할 수 있다.

일반적인 추리소설(특히 고전추리소설)에서는 트릭의 대상이 주로 사건에 한정되었다. 범인이 탐정을 속이기 위해서 사건현장을 고의로 조작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즉 현장에 엉뚱한 단서를 남겨두거나, 침입이 불가능한 밀실로 꾸며두거나, 마치 자살로 보이게끔 위장하는 등의 조작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사건에 대한 트릭은, 작품 내에서 범인이 탐정을 속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트릭인 경우가 많다. 작가가 독자를 속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3요소 중에서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트릭은 어떨까? 서술트릭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 바로 인물에 대한 트릭과 배경에 대한 트릭이다.

그리고 작가는 의도적으로 (조금) 편향된 서술방식을 이용해서 독자들의 판단을 한쪽으로 쏠리게 한다. 그렇게 계속 독자들을 속여오다가 마지막에 진상을 밝히는 형식이다. 반전(反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독자를 속이기 위한 작가의 기법, 서술트릭

하지만 이런 서술트릭이 쉽지는 않다. 인물과 배경을 가지고 계속 독자를 속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배경에 대한 트릭은 다시 시간트릭과 공간트릭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 트릭은 좀 난해하기 때문에 여기서 제쳐두고, 인물에 대한 트릭 그러니까 인물트릭으로 한정해보자.

이 인물트릭의 초보적인 방법은 인물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죽었는줄 알았던 인물이 마지막에 살아서 나오거나, A라는 인물로 행세해 왔는데 알고보니 B라는 인물이었다거나, 또는 여러 명의 인물인줄 알았는데 한 명의 다중인격자이거나 하는 방식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 한 인물의 정체를 바꾸어버리는 방법이다.

인물트릭을 이용한 작품에서 반전은 언제나 인물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서술방식은 영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반전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인 <식스센스>, <유주얼 서스펙트>를 생각하면 된다. 이 두 영화는 인물트릭을 극단적으로 끌고 간 경우이다. 관객들은 내내 인물에 대해서 속아오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무릎을 치게 된다. 인물의 정체성이 바뀌는 순간, 온전한 반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추리작가들 중에서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한 인물은 우선 '존 딕슨 카아'를 꼽을 수 있다. 밀실과 괴기의 대가였던 카아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막판에 인물 바꿔치기를 한다. 첫 작품인 <밤에 걷다>를 포함해서 <해골성> <흑사장 살인사건>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화형법정> 등의 작품에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물론 카아 이외에도 이런 기본적인 인물트릭을 사용한 작가는 많다. 코난 도일의 <공포의 계곡>, 로버트 블록의 <싸이코>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좀 더 현대로 와서는 제프리 디버의 <코핀 댄서>도 인물트릭을 사용한 작품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추리작품들을 가리켜서 '인물트릭의 기법을 이용한 서술트릭 작품'이라고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위의 작품에서 인물트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건자체에 얽힌 정황과 논리적 인과관계,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리작품 중에서 인물트릭을 극대화시킨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비코 다케마루의 92년 작품 <살육에 이르는 병>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서술트릭의 반전이 돋보이는 <살육에 이르는 병>

마치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 제목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가리켜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지칭했다. 그렇다면 살육에 이르는 병은 어떤 병일까?

심각한 제목처럼, 이 작품 곳곳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시신의 모습과 범인의 엽기적인 행각이 등장한다. 보는 이에 따라서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독자에게 한눈 팔게 하기 위해서 작가가 이렇게 잔인한 장면들을 설치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서술트릭을 사용한 작품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하나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서술트릭이라는 것을 알고 읽는다고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에서 트릭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대반전.

서술트릭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추리소설을 읽을 때, 사건에 관한 트릭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심을 인물 쪽으로 기울여서 읽더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가 교묘하게 이끌고 가는 서술의 방향을, 독자들은 알게 모르게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설치해 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차리고 행간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작품들을 읽을 때는 그냥 무장해제한 상태에서 긴장을 풀고 읽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살육에 이르는 병>도 마찬가지다. 트릭이니 뭐니 다 때려치우고, 그냥 작품의 분위기에 푹 빠져서 읽어가는 것도 좋은 감상 방법이 될 것 같다. 트릭에 집착하다가는 오히려 다른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은퇴해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의 심정,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노력, 살인행각을 거듭하는 범인의 내면, 그리고 범인을 심리분석하는 학자의 모습.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읽다보면 이런 풍경을 모두 접할 수 있다. 물론 마지막 페이지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되지만, 그거야말로 어찌보면 독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 중에 하나는 바로 작가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 권일영 옮김. 시공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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