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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우토로 토지 문제가 발생한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토로 마을의 풍경은 2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우토로의 겉모습과 달리 변한 것도 많다.

20년 전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됐다. 20년 전 처녀 총각이었던 청년들은 지금 아버지·어머니가 됐다. 20년 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던 사람들은 지금 손주들을 둔 할머니·할아버지가 됐다.

가장 섭섭한 것은 돌아가신 1세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많은 분들이 '그 날'을 못 보시고 먼저 돌아가신 것이다. 비행장 건설 노동에 직접 종사한 남성(할아버지)들은 이제 다 돌아가셨다. 살아계신 그들의 부인(할머니)들도 지금은 늙고 병들어 역사를 증언하기 힘들다.

우토로, 그 곳엔 13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았다

ⓒ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우토로엔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일제식민지 시기인 1940년 4월, 2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된 교토비행장 건설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일본군부의 요청에 따라 설립된 국책 공업주식회사(이후 41년 합병으로 '일본국제공항공업주식회사'로 변경)가 추진했다. 군용비행장 건설, 비행사양성소·비행기 제조공장 건설 등 약 100만평 정도 되는 대규모공사였다.

이 사업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싼 값으로 동원됐다. 엄밀히 따지면 '모집'됐다. 어떤 이들은 강제연행이나 강제징용과 다른 '모집'이었다는 것 때문에 "강제성이 없었던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당시 조선인들, 재일조선인들의 처지와 환경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방 직전, 우토로의 '함바(노동자 숙소 가건물)'에는 1300여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다. 1945년 8·15 해방 직후에 많은 사람들이 귀국했다. 그러나 대부분 조국에서 모든 것을 잃고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해방을 맞은 이후에도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토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노동자들의 가족과 친척들이며, 그 이외에는 해방 후 조선인 동네를 찾아들어온 사람들이다.

해방 후 우토로에 남은 조선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곳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건설현장에서의 일일노동과 폐품·고철 따위를 주워파는 육체노동이 전부였다. 그곳에선 남자고 여자고, 하물며 아이들까지 밤낮 없이 일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면서도 그들은 언젠가 귀국할 날을 그리며 아이들에게 모국어인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학교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강제 폐쇄됐다.

이후 우토로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52년, 경찰에 의한 강제수색을 두 차례나 당했다. 혐의는 '간첩용의'.

생활보호대상자가 20%에 육박하는 우토로

ⓒ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한편, 한국전쟁이 끝난 뒤 3년. 우토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던 주일 미군기지가 일본에 반환되어 오늘의 일본 육상자위대 오오쿠보 주둔지가 된다. 우토로는 당초 교토부의 토지였으나,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 1961년 토지의 소유권이 닛산차체 주식회사로 승계된다.

우토로 주민들은 그 동안에도 우토로에서 살아왔다.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지만, 생활은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는 초라한 함바가 있었을 뿐이었지만, 주민들은 나름대로 동네를 정비하고 살림집도 만들어 세웠다. 사업이 성공해서 살림에 조금씩 여유가 생긴 동포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포들은 차별과 빈곤 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힘들게 살아왔다. 지금도 우토로는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사회적 약자'층에 속한다.

우토로가 소속된 지자체인 우지시의 생활보호대상자는 1%이지만 우토로의 생활보호대상자는 20%에 육박하고 있다. 또 개호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의 수는 우지시보다 8%가량 많은 23%이며, 50% 이상이 직업적으로 무직 상태다.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세대는 50%에 채 미치지도 못하며 하수시설은 아예 들어와 있지 않다.

그 동안 일본정부의 행정적 조치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 유일하게 있었던 것은 1988년에 부설된 상수도시설 뿐이다.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20년이나 더 늦은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도 행정이 자발적으로 호의적으로 적극적으로 취한 조치는 아니었다.

같은 시기 주민들 모르게 '우토로 토지 매매'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전매사실을 일본행정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생각할 때, 상수도 부설 배경은 매우 의심스럽다.

1989년 촉발된 '우토로 토지문제'

ⓒ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토지문제는 1987년 3월 닛산차체가 당시 자칭 주민회 회장인 허창구에게 3억엔에 토지를 매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같은 해 5월, 허창구는 우토로 토지 재개발을 위해 만들어 놓은 서일본식산 주식회사에 4억 5천만엔에 우토로를 전매한다. 우토로 땅의 소유권이 등기부상에서 서일본식산에 이전 등기된 것은 같은 해 8월이다.

서일본주식회사가 우토로 주민 전원에게 퇴거를 요구하며 주민들을 상대로 토지명도 소송을 일으킨 것은 2년 후인 1989년 2월이다. 우토로 주민들이 토지의 전매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88년 7월이었다.

문제는 우지시를 비롯한 일본 행정이 이러한 사실들을 언제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행정이 우토로 토지 전매 계획을 처음에 안 것은 1986년이다. 그 해 12월, 닛산차체주식회사(당시의 소유권자)는 우지시를 경유해서 교토부에 '국토관리법의 서류'를 제출했다.

당시 일본은 토지 값이 무한정하게 높아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국토법의 규정에 따라 큰 규모의 토지를 매매, 전매하는 경우 행정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 당시 주민회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당시 닛산차체가 시에 제출한 서류에는 우토로 땅의 현황이 '공지(빈 땅)'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땅에 자기들이 모집하여 식민지 시기에 일을 시켰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일본행정 역시 그 사실들을 뻔히 알면서 서류를 접수했고 전매 허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서류는 개인정보 침해라는 이유로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당시 주민회는 이 토지관리법의 서류의 공개와 백지화를 요구하며 강하게 항의했었다).

국토관리법의 법적시효는 5년이다. 1991년에 시효가 성립되었다. 만약에 이 국토관리법의 서류가 없었더라면 우토로의 토지전매는 없었고 오늘의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토로에 상수도 부설공사가 시작된 것은 1988년 1월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1987년 8월 우토로 땅은 벌써 서일본식산 측에 이전된 상태였다.

'국책' 사업이지만, 일본정부 책임은 없다?

지난 9월 일본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된 두두디엔씨 보고서에 대한 반론을 제출했다. 그 반론서에 의하면 일본의 공적기관(행정부)은 우토로를 방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가 바로 '상수도 부설'이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토로에는 지금도 하수도 시설도 없고 소화전 시설도 없다.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에 대한 일본정부의 반론서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도 있다.

"일본국제항공공업주식회사는 당시의 국책(나라의 정책)에 따라서 군용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현재 우토로지구라고 불리는 땅을 취득하였다. 우토로는 동사(일본국제항공공업)가 고용하는 조선인건설노동자들의 거주구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정부에 의하여 이 지역에 배치된 조선인 공동체'라는 보고서(두두디엔 보고)의 표현은 부정확하다."

즉, '국책'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고 하면서도 '정부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할 말이 없어진다.

우토로 문제의 본질은 첫째도 둘째도 과거 역사청산이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첫번째 책임은 일본정부에 있다. 하지만 역사청산 관점으로 볼 때, 한국정부의 책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행정이 항상 내뱉는 말이 있다. "전후보상·과거청산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끝났다"고. 다른 전후처리 문제와 마찬가지로 우토로에서도 한일협정이 너무도 큰 걸림돌인 것이다.

2000년, 서일본식산이 땅 소유자로 확정

ⓒ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우토로 문제 해결의 복잡성은 본질에 있어서는 역사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내에서는 다른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토지소유권과 관련해서는 2000년말 최고재판소(대법원)의 상고기각결정으로 인해 주민들이 우토로에서 거주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근거가 없다는 데 있다.

운동상에서는 역사문제를 기본 이념으로 확고히 틀어쥐면서도 주민들을 강제철거의 위기에서 돕기 위해서는 소유권 확보를 위한 현실적 대응을 해야 한다.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고령자와 생활보호세대들을 위한 공영주택 건설, 복지시설의 건설 계획을 세워 여기에 일본 정부를 연루시킴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책임을 다 하게 하여야 한다.

알려진 것처럼 토지소유권자 간에 진행되었던 재판의 최종결론이 나와 서일본식산이 땅 소유권자로 확정됐다. 주민회는 이제부터 소유권자와의 매매 교섭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동시에 주민회는 마을재생계획을 작성해 나가고 있다. 이것들 하나하나가 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민회는 임원들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한걸음, 한 걸음 전진해 나갈 것이다.

우토로 사람들에 희망 있는 건, 조국이 있기 때문

▲ 눈 오는 우토로
ⓒ 임재현
지난 2~3년 동안에 우토로에선 작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사실 6년 전 최고재판소의 상고 기각 결정으로 주민들이 완전 패소한 이후 우토로 주민들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본의 사법부는 우토로의 역사적 경위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함이 없이 모든 주민들을 '불법점유자'로 낙인찍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낼 아무런 전략도 없고, 전술도 없었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비롯한 일본인 지원자들도 있었으나, 그들 또한 문제 해결의 명확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우토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지 않은 변화는 '우리'정신이 주민들 속에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정신의 핵심은 다름 아닌 '민족심'이라고 생각한다. 6년 전 재판에서 완전 패소하여 자포자기하던 시기, 주민들 속에는 '우리'보다 '자기'가 커지기 마련이었다. '우리'가 주민들 사이에 인식된 큰 계기는 한국의 지원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습'을 접하게 되면서이다.

얼마 전 우토로에 취재 왔던 어떤 한국기자가 주민회 임원(2세)에게 "왜 당신은 우리말을 할 수 없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그 임원은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그러나 자기가 어렸을 때 모국어를 배워야 한다, 또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남이건 북이건 자기 조국이란 인식조차 희박했다"며 "그러나 2년 동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우토로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한국의 시민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한국정부의 따뜻한 마음과 모습에 접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부터라도 우리말을 배우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 임원의 말은 우토로 다른 주민들 모두 비슷하게 갖고 있는 심정일 것이다. 오늘 우토로 동포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조국이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에 이역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였던 이들, 해방 후에는 일본은커녕 자기 조국에게도 버림당하였던 이들이지만 그들에게도 희망찬 미래가 반드시 올 것임을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우토로 국제대책회의 리민복(가명)씨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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