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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겉표지
ⓒ 창해
일본인이 중국의 역사를 소설로 다뤘다면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까? 변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본이든 중국이든 또한 우리나라든 간에 이럴 때 소설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왜곡'이다. 감정적인 면에 치우쳐 사리분별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괴상한 역사를 내놓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일본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아사다 지로가 <창궁의 묘성>(창해)에서 청나라 말기를 소설화했다는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부터 나왔다. 아사다 지로가 지나치게 고국의 독자들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는 걱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작가 이름에 기대를 걸고 책을 살펴 보기로 하자. 소문만 듣고 판단하는 것 또한 사리분별이 의심스러운 일일 테니까.

예언에 휩쓸린 두 청년, 이춘운과 양문수

4권으로 구성된 <창궁의 묘성>은 두 명의 청년이 이끌고 있다. 첫 번째는 시골농가의 가난한 아이 이춘운. '춘아'라고 불리는 그는 똥을 주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소문난 예언가 백태태로부터 노불야(서태후)의 보물을 갖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묘성도 있다는 말도 듣는다. 한마디로 똥 줍는 아이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춘아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명문가의 자제로 불량기 가득한 양문수도 예언을 듣는다. 높은 자리에 올라 고단한 삶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양문수는 그 어느 것도 믿기가 어렵다. 자신만 해도 장원 급제할 실력이 안 된다. 그래서 헛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그렇지가 않다. 믿기지 않는 체험으로, 평생 자신을 무시하던 아버지가 뒤로 쓰러질 정도로 당당하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양문수는 백태태의 예언이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춘아의 예언을 떠올린다. 양문수는 춘아에게 묘성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춘아를 칼잡이집에 데려가 겁을 준다. 환관이 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헛바람이 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운명이란 것이 묘한지라, 그 일이 춘아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만든다. 춘아가 묘성을 믿고, 자신의 남성을 제거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창궁의 묘성>은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변법파의 중심이 되는 양문수와 서태후의 측근이 되는 이춘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좋은 두 친구가 신세력과 구세력의 중심이 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궁의 묘성>의 내용을 예감하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난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그런 내용으로.

서태후는 광서제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가 누군가? <칼에 지다>에서 보여줬듯이 역사를 그렇게 뻔하게 다루지 않는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그리지 않는다. 불행조차 눈물겨운 행복으로 그리는, 말 그대로 이야기꾼 중의 이야기꾼이다. 그렇기에 <창궁의 묘성>은 그렇게 녹록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게다가 노파심이었던 것들, 괴상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도 단번에 훌훌 날려버린다. 비결은 무엇인가. 작품을 이끄는 이춘운, 양문수라는 주인공은 물론이고 서태후, 광서제, 건륭제 등의 인물들까지 '선'을 위해 살아간 것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대립관계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가 춘아와 양문수, 그리고 서태후와 광서제다. 하지만 정작 이들 스스로는 자신의 '선'을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선' 또한 이해하고 있다. '대립'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제3자의 등장으로 기인할 뿐이지 실상 자신들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립이 성립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춘아와 양문수는 결코 부딪치지 않는다. 남들은 이러쿵저러쿵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어느 순간에도 그것을 잊지 않기에 뻔한 구도가 사라지게 된다. 서태후와 광서제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아사다 지로는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해 참으로 신선한 해석을 하고 있는데 서태후의 경우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 광서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건륭제의 뜻에 의한, 즉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마녀가 됐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광서제의 경우는 어떤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서태후와 개인 대 개인으로는 부딪치지 않는다. 그들이 대립구도는 제3자에 의한 것으로 그려질 뿐이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창궁의 묘성>에 등장하는 조연들 대부분도 그렇다. 그들은 자신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까지 포용할 줄 안다. 비록 그것이 표면적으로 싸움처럼 보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마음까지 피로 물들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가. <창궁의 묘성>에서는 악인을 찾기가 힘들다. 수많은 조연이 등장하지만 악인의 뒷모습은 쉽사리 찾기가 힘들다. 아사다 지로가 1%라도 존재하는 착한 마음을 찾았고, 그것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뻔한 선악구도를 넘어섰기에, 인간에 대한 극진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창궁의 묘성>은 작품 초반 '예언'이라는 것으로 운명적인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 또한 스스로 무너뜨렸다. 인간이 원한다면, 간절히 꿈꾼다면 운명마저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리라. 아사다 지로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차고 넘치는 소설

<창궁의 묘성>은 지나쳤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너무 지나쳐서 작품을 뜨겁게 만든다. 감정적인 면을 자극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허황되게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맞서 벌이는 인간의 투쟁을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그려놓았기에 감정이 자극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지라 작품을 냉정하게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이제껏 아사다 지로의 어느 작품보다도 가슴뭉클하게 만든다.

인간의 희로애락부터 광활한 청나라 말기의 역사까지 담아낸 <창궁의 묘성>은 작가의 한 절정이다. 후에 또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뜨겁고 단단한 절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만큼 아사다 지로의 팬이라면 만족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사다 지로를 모르더라도, 일본 소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까지 눈물겹도록 뜨겁게 보여준 작품이라면 어떤 마음이라도 녹이고 말테니까. 슬프지만, 행복하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창궁의 묘성 - 전4권 세트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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