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내가 잠들기 전에> 표지

<첫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가 있었다. 하루가 지나면 기억을 잊어버리는, 단기 기억 상실증 환자가 등장했던 영화로 영화의 완성도와 별도로 줄거리가 꽤 화제가 됐었다. 다음날이 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사랑 유통기한이 하루에 불과한 연인을 주인공으로 삼았기에 그랬다. 영화의 달콤함 때문일까. 영화는 단기 기억 상실증 또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장애물 중 하나로 그렸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어떨까?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내가 잠들기 전에>의 크리스틴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란다. 낯선 남자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욕실로 몸을 피한다.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경악한다. 자신의 몸이 중년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악몽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늙어버린 자신과 침대에 있던 낯선 남자가 함께 있는 사진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욕실에서 나온 크리스틴에게, 낯선 남자는 말한다. "당신 남편이야"라고. 무슨 일일까. <첫키스만 50번째>와 비슷한 상황이다. 크리스틴은 하루가 지나면 기억을 잊어버린다. 하루의 기억 정도가 아니다. 남편인 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오래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로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자신이 중년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 일기장에 적한 한마디, "남편은 믿지 마라"

 

벤은 크리스틴을 극진하게 보살핀다. 크리스틴은 그런 상황이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되지만, 모든 것에 대해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당연한 것이다. 집에서 멍하니 있던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낮의 어느 시간이다. 의사라고 밝힌 남자는 벤 몰래 만나자고 한다. 그동안 그녀를 치료하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일까?

 

의사는 크리스틴에게 일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리스틴이 매일 같이 자신이 기억해낸 것들이나 알게 된 사실들을 적어뒀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깨어난 크리스틴은 의사 덕분에 일기를 펼치게 된다. 일기에는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었을까?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벤을 믿지 마라."

 

<내가 잠들기 전에>는 스릴러 소설로서의 미덕을 두루 갖춘 기대작이다. 요즘에 소개되는 스릴러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고 누가 더 잔인한지 경쟁이라도 하듯 극악스러운 살인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전기톱을 들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이 만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니발의 후예들은 상상을 넘어서는 잔인함과 밤잠을 잊게 만들 정도의 원초적인 선정성을 빚어내고 있다. 그렇게 해야 서스펜스와 긴장감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잠들기 전에>는 '깔끔'하다. 피가 튀는 일도 거의 없고 누군가 죽는 일도 거의 없다. 폭력의 급수로 따진다면 굉장히 심심한 단계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지닌 서스펜스는 한니발의 후예들을 침묵하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을 때, 남편이라고 하는 남자가 자신을 지켜준다. 믿을 건 오로지 그뿐이다. 그런데, 자신이 적은 일기에는 남편을 믿지 말라고 한다. 왜 그럴까. 크리스틴은 일기를 통해 남편이 그녀의 과거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째서일까.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런 걸까?

 

한니발의 후예들, 꽤 머슥할 것 같은데

 

크리스틴이 일기를 읽어갈수록 <내가 잠들기 전에>의 활자들 사이에 스며든 긴장감의 농도가 농밀해진다. 남편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고 크리스틴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남에 따라 그것의 무게는 더욱 커지는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흡인력이 인상적이다. 손에서 책을 쉽게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순간에는 어떤가.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은, 가장 짜릿한 순간이 되기도 하는데 <내가 잠들기 전에>가 맛보게 해주는 것도 그렇다. 반전도 훌륭하다. 반전의 수준은 최근에 소개된 어느 스릴러에 비해도 그 충격의 정도가 뒤떨어지지 않는다.

 

스릴러는 꼭 잔인해야만 서스펜스가 느껴지는 걸까? 연쇄살인범이 있어야만 긴장감이 느껴지는 걸까? 많이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잠들기 전에> 덕분에 인식이 좀 바뀔 것 같다. 하나의 소설 때문에, 한니발의 후예들이 꽤 머쓱할 것 같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