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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가 폐지되기 이전의 근대에도 남아프리카에는 근대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아주 특이한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 존 쿳시(John M Coetzee), 앙드레 브링크(Andre Brink) 같은 소설가와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하(Breyten Breytenbach) 같은 시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의 텍스트 속에서 근대적 사고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백인이면서 흑인되기' '남성이면서 여성되기' '인간이면서 동물되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흑인정권이 등장하기 이전에 근대적 정체성 파괴 및 새로운 탈근대적 정체성 생성을 위한 이들의 작업은 하나의 문학적 사건 혹은 결코 달성되지 않는 근대적 비극으로 끝맺었다.

그러나 이들의 텍스트는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뒤에도 결코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거나 비극으로 끝맺지 않고 독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체로 생성되는 아픔과 즐거움을 향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시와 소설은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다르다.

이와 달리 시와 소설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전과 이후의 일관성을 보여준 이도 있다. 신문기자 출신의 저널리스트 막스 두 프레즈(Max du Preez)가 바로 그런 경우다.

배반자·반역자 '미친 막스'

나는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자마자 아주 우연히 두 프레즈를 만나게 됐다. 내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는 큰 여자와 작은 여자가 쇼핑을 하는 동안 시간을 죽이기 위해 들른 근처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꽃혀 있는 <전사들, 연인들, 그리고 예언가들의 이야기>(부제 '남아프리카의 과거에 대한 특이한 이야기들')라는 두 프레즈의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의 책은 엄연히 남아프리카의 역사임에도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긴 했으나 전혀 다른 시각으로 다뤄져야 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그는 흑인 아프리카인일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백인 중에서도 권력의 중심에 있는 아프리카너 출신이었다.

나는 그의 책을 단숨에 읽은 뒤 인터넷을 뒤져서 그의 자서전격인 <창백한 원주민>도 사서 읽었다. 그의 고통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삶은 마치 만해 한용운이나 백범 김구, 혹은 윤이상 선생이나 송두율 교수처럼 근대 속에서 탈근대인으로 살았던 전형적인 남아프리카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두 프레즈는 지난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가족들에게는 배반자로 낙인찍혔으며, 백인 아프리카너들에게서는 반역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고 동료 신문기자들로부터는 '미친 막스'라는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그는 본래 남아프리카 지배집단이었던 아프리카너 대농장주 집안 출신이었다. 아프리카너들만이 다니며 보수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설립된 스텔렌보쉬 대학교를 졸업한 두 프레즈는 보수적인 아프리칸스어 신문사의 정치부 기자라는 촉망받는 저널리스트로 남아프리카 사회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그는 신문기자로서 직업의식 및 근대성의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정신과 인간애를 추구하면서 아프리카너·백인·남자라는 근대적 정체성을 파괴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 자신에게 근대적 불행이자 탈근대적 축복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식인 본연의 의무인 진실을 추구할 때,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겠다고 우쭐대는 자가당착의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때, 인간 본연의 자유정신과 인간애는 끝없는 자기혁신의 생성을 경험하는 탈근대적 축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 신문기자 출신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저널리스트 막스 두 프레즈가 펴낸 <창백한 원주민>과 <전사들, 연인들, 그리고 예언가들의 이야기>.
ⓒ 장시기
14살 학생과 흑인 소년병사가 피로 깨우쳐준 역사의 진실

두 프레즈의 위대한 탈근대적 변신을 불러온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흔히 1980년 광주민중항쟁과 비교되는 1976년의 '소웨토 흑인 봉기'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 식민지였던 나미비아 독립운동 과정에서 학살당한 흑인병사를 목격한 경험이다.

두 프레즈는 백인 기자로는 최초로 '소웨토 흑인봉기'를 취재하기 위해 동료 사진기자와 함께 흑인 거주지역으로 들어간다. 흑인들의 온갖 위협과 경찰의 협박을 무사히 넘긴 두 프레즈는 당연히 총탄에 맞아죽을 줄 알면서도 무장경찰 앞으로 달려드는 14살의 어린 학생을 보게 된다.

그는 이를 통해 백인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아래 흑인들의 '절대적인 희망의 부재'가 만든 무한한 절망을 경험한다. 소년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남아프리카 백인 정권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사회가 하루라도 빨리 근원적으로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 첫 걸음은 자신이 스스로 '백인 아프리카너 남성'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버리고 '흑인·아프리카인·여성'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두 프레즈는 내전이 한창이던 1978년 중반 나미비아로 들어간다. 나미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독일 식민지였다. 그러나 1945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남아프리카연방공화국의 백인들만의 총선거(1948)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구성된 아프리카너 보수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승리하면서 나미비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식민지가 된다. 나미비아 식민지 정권의 핵심은 남아프리카 지배정권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계 백인이자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너들이었다.

나미비아의 내전상황을 취재하던 두 프레즈는 나미비아에 주둔하는 남아프리카 군대가 반란군 본거지라며 폭격한 나미비아와 앙골라의 국경지역에 있는 치타도(Chitado)라는 마을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곳은 반란군의 본거지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고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그 와중에 두 프레즈는 "나으리, 물 좀 주실 수 있나요?"라고 아프리칸스어(아프리칸스어는 나미비아의 공식 언어다)로 말하는 흑인 소년병사의 죽음과 맞닥뜨린다. 그는 여기에서 '수세기 동안 흑인에게 강요한 백인들의 표현 형식'을 읽어낸다. 두 프레즈는 "죽어가는 병사가 내게 말한 6개의 단어는 과거 내 모습이자 나를 대표했던 모든 것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며 "내가 그 사건 이후에 어떻게 과거와 동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겠는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두 프레즈는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아프리카너 민족주의가 흑인 아프리카인들의 희망을 앗아간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와 함께 아프리카너의 정체성을 지켜주던 아프리칸스어가 300여 년 지속된 흑인 노예와 가정부, 정원사들이 만든 민중의 언어라는 사실도 실감한다.

자신을 고고하게 지켜줬던 '아프리카너 백인 남자'라는 근대적 정체성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아프리칸스어는 단지 근대적 지배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언어라는 껍데기의 기호일 뿐이었다.

아프리카너 백인 남성, 정체성을 벗어던지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돼버린 근대적인 '아프리카너 백인 남성'에서 벗어나 흑인이 되고, 여성이 되고, 동물이 된다. 근대적 폭력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아프리칸스어 신문사에서 쫓겨난 두 프레즈는 영어신문사에서 활동하는 자유기고가로 변모한다.

그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NGO가 연합한 단체의 도움을 받아 남아프리카 최초로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위한 아프리칸스어 주간신문을 창설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백인 정권의 비리와 권력의 횡포를 폭로한다. 그를 도와주는 동료 기자들은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여성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아르바이트 대학생들뿐이었다.

두 프레즈는 죽을 고비도 두번 넘겨야 했다. 첫번째는 나미비아 반군 단체를 취재하러 가는 도중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이고, 두번째는 비밀 첩보경찰과 연루돼 있는 백인 우익단체가 요하네스버그에서 벌인 폭탄테러였다.

심지어 그의 신문 <브라이 위크블라드(Vrye Weekblad: 자유 주간신문)>는 정보부장과 경찰국장이 낸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해 만델라의 흑인정권이 등장하기 두달 전 폐간되기까지 했다. 이 소송은 백인 정권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의 흑백이 화합하고 있는 탈근대 시대에 <브라이 위크블라드> 같은 신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과거의 권력을 누렸던 아프리카너 백인들이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비극이다.

▲ 장시기 교수
현재 두 프레즈는 네덜란드의 대학교에서 교수로 오라는 유혹에도 남아프리카에 남아서 흑인과 백인의 구별이 없는 남아프리카 대지의 역사를 연구하며 백인들만의 역사에서 탈피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전사들, 연인들, 그리고 예언가들의 이야기>는 두 프레즈가 새롭게 탈근대의 역사를 연구한 기록들 중 하나다. 그의 자유정신과 인간애는 남아프리카 탈근대의 시대에 화려한 불꽃을 피우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장시기 교수는 1960년에 태어났으며 1985년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0년부터 같은 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영미문학연구회 사무국장, 문학과 환경학회 재무이사, 민교협 사무처장 등을 지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과 언어>, <근대와 탈근대의 접경지역들>,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등의 책을 펴냈으며 안식년을 맞아 지난 7월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에서 연구교수로 머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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