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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는 우리가 단풍구경에 넋이 빠져있을 요즘 방방곡곡 산골짜기, 바닷가, 평야지대를 막론하고 가을걷이에 바쁘다. 오늘 탈곡 변천사를 잠깐 보고 그에 따라 변화해가는 6, 70년대부터 현재까지 탈곡기로 추수하는 장면을 몇 편으로 나눠 잔잔히 그려나갈 예정이다. 며칠 후엔 장성 북일면 <금곡영화마을>에 가서 그 시절을 직접 체험하고 취재할 계획이다. 모쪼록 들녘을 지날 때 농심을 헤아리길 바란다.<글쓴이>

▲ 홀태를 그네라고도 합니다. 빗처럼 생긴 틈에 벼를 얇게 펴서 쭉 당기면 벼가 쏟아집니다. <전남농업박물관>에서 촬영
ⓒ 김규환
나는 깡촌에서 살아온 덕에 일곱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다녔다. 1970년대 중후반에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나는 어른 몫까지 했다. 모질게 힘든 세상이었고 그 자리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학생인지 일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일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 고향마을 아이들에게 학교는 농번기를 제외한 한가한 시절에나 다니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봄과 가을 농번기만 다가오면 절반 가까이 교실을 비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주변 환경 때문에 학교에선 '농번기 방학'을 봄, 가을 두 차례 알아서 해줬다. 간혹 가을걷이를 마치고 학기가 끝날 즈음에야 나타나는 아이도 있었다.

동생 돌보기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꼴 베기, 벼 베기, 벼 뒤집기, 벼를 걷어 묶어서 집으로 이고 지고 오기를 비롯해 볏단을 집채 만한 높이로 쌓고 탈곡하기까지…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잠시 쉴 짬도 없이 일에 매달린다.

▲ 탯돌은 개상과 함께 반달형돌칼 이후 나온 가장 원시적인 수확 방법이었다.
ⓒ 김규환
모든 걸 사람 손과 힘으로 해치워야 하는 70년대 부지깽이도 동원되니 학교 갈만한 나이가 되면 남자아이는 실군(실한 일꾼) 노릇을 다 했다. 여자 아이는 일꾼들 밥을 하여 함지박과 양동이로 날랐다. 그것뿐이면 말을 하지 않겠다. 시시때때로 새참을 차리고는 곧장 합류하여 일을 한다.

오죽하면 낫으로 손가락을 잘라 헝겊을 처매 꾀병을 부렸겠는가. 그 때까지 앓지 않았던 홍역이라도 때에 맞춰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빌어보기까지 했다. 나 같은 부류는 학교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그 때마다 어른들은 일 하다 말고 학교로 달려와 귀와 머리끄덩이를 잡아 끌고 가는 일도 벌어졌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불과 25년 전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서 아직도 보리밥을 손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처절하게 곤궁했던 과거는 때론 살아나가는데 보약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슬픈 개인사로 다가올 때도 있다.

요즘엔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되어 그나마 실낱같이 남아 있던 희망마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뼈저린 고난과 고통,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삶이 지속되었다. 소작농이 일번지라면 두 번째는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 그네에 쇠 살을 올려놓은 모양이라고 해서 그네라고 한 모양인데 이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짚풀생활사박물관>에서 촬영
ⓒ 김규환
식구는 많은데 먹을 건 추수 뒤 한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동이 나니 수양아들딸로 보내거나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공순이' '공돌이'로 팔려나가기 일쑤였다. 그 대표적인 곳이 우리나라에 네 군데 있다.

강원도 영월-정선-평창과 경북 봉화 일대, 전라도 곡창지대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진장 산골 무주-진안-장수군이 그곳이다. 호남의 너른 들이 연상되는 전라남도에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곡성(谷城)과 담양(潭陽) 일대다.

500~600미터 대 두 군(郡)의 경계에 있으면서 빨치산 잔류세력이 둥지를 튼 화순군 북면 백아산 일대는 그곳 중에서도 가장 궁벽한 곳이었다. 전기와 텔레비전, 전화, 냉장고, 선풍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뒤늦게 선보였다.

지붕개량도 전북 장수군과 화순군 일부가 꼴찌다툼을 옥신각신 벌였던 사실도 있다. 여기에 연탄아궁이를 건너뛰어 군불을 때던 아궁이에서 80년대 후반 석유보일러로 직행하던 사례는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의 본보기이며 한국 현대사가 짊어지고 온 산 역사다.

▲ 어린 나도 많이 해봤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몸이 딸려 들어간다.
ⓒ 김규환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반대편에서 보면 밝은 빛이 있는 법이다. 오지에서 살았던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를 수천 년 동안 먹여 살렸던 농기구를 낱낱이 접하게 되었다. 추수가 가까워지면 그 경험이 새살처럼 솔솔 돋아 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한다.

본격 탐구하기에 앞서 개념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야겠다. 타작(打作;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그 알을 거두는 일. 마당질. 바심)과 탈곡(脫穀; 곡식의 이삭을 떨어냄. 타곡)은 곡식을 훑어낸다는 뜻에서는 같은 뜻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타작은 두들겨서 곡식을 털어내는 것이다. 보리와 밀, 콩 등을 도리깨나 방망이로 때려서 알곡을 모은다. 탈곡은 가을에 이삭귀가 튼튼한 벼 따위를 돌이나 개상에 후려치고 홀태나 날카로운 연장을 써서 줄기와 분리하는 작업이다. 타작에 비해 힘을 몇 배는 더 들여야 한다.

자 그럼 오로지 인력과 자연의 힘을 빌려 아름답게 살아가던 시절로 돌아가 볼까. 어렴풋이 우리 기억 속에 있는 추억을 되살려주는 가을걷이에 쓰였던 탈곡기를 들춰보자.

선사시대와 고대, 중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이 써왔던 것 중에서 오직 한 가지 반달형돌칼만 손에 쥐어보지 못했다. 십리 거리 원리마을까지 4km만 내려가면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이 논과 밭 사이 사이에 즐비하지만 피죽을 쒀먹는 장면과 돌칼로 벼이삭을 따던 풍경은 내 머리에 들어있지 않다.

손으로 곡식을 따다가 반달형돌칼(半月形石刀)을 씀에 따라 생산성이 무척 높아졌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낫으로 베어다 한곳에 모아 탈곡하는 농경사회로 진입이 촉진되었다. 토기와 돌절구, 나무절구에 넣고 곡식을 빻아 끓여먹고 떡을 해먹는 풍습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발동기와 고속탈곡기 거리가 꽤나 멀지만 벨트에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했고 지축이 흔들리니 주변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 김규환
철기시대와 선사시대를 잇는 도구인 돌은 자주 쓰던 방식이다. 바닥에 무엇이든 깔고 돌에 쳐서 곡식을 떨어내는 일은 우리 골짜기에서는 누구나 직접 해보았다. 이뿐인가. 조금 더 발전된 개상과 탯돌은 일상에 널려있었다.

단원 김홍도(1745~?)와 다산의 둘째아들 정학유(1786~1855)는 18세기 후반 사람이다. <타작> 그림이나 <농가월령가 9월령>에 보이는 장면은 20세기가 되기까지 200년 동안 별 차이가 없이 이어졌다.

차차 자세히 다룰 쇠로 만든 큰 빗처럼 생긴 기구인 '그네' 또는 '홀태'에 끼워 벼를 훑는 방식은 눈과 손에 익는다. 지금쯤 고향마을 구석 어딘가엔 주인 잃은 홀태가 처박혀있을지도 모른다. 이후 새마을운동과 산업화로 둘이 발판을 밟아서 하던 탈곡기가 보편화되었다.

인력에만 의존하다가 동력을 이용하였는데 첫 번째가 발동기다. 정미소에나 있을 법한 사람 키보다 큰 바퀴에 땅이 들썩거리는 발동기다. 벨트를 먼 거리 탈곡기에 연결하여 손만 잘 놀리면 되었다.

발동기는 덩치가 워낙 커서 소도 끌 수 없는지라 경운기에 연결하여 쓰도록 소규모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또 한 번 혁명적 진화를 하게 된다. 고속회전이라 대는 순간 곡식이 떨어졌다.

▲ 동력식으로 바뀐 뒤로 회전 속도가 빨라 대는 순간 곡식이 떨어진다. 긁어내고 짚다발 묶느라 바빴다.
ⓒ 김규환
이후 '대동산업' 등 농기구 업계에서는 컨베이어벨트로 볏단을 자르르 펴서 옆으로 먹이면 줄줄이 쇠를 따라가 알곡만 분리하여 가마니로 벼가 뚝뚝 떨어지는 편리한 기계를 만들어냈다.

경운기의 등장으로 논에 쉽게 설치하고 철수하기가 쉬웠고 주변에서 거들던 사람들도 한결 수월해졌다. 점차 내가 커감에 따라 기계화를 유달리 먼발치에서만 지켜보았을 뿐이다. 일손을 덜어줬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감히 접근하는 걸 허용치 않는 콤바인은 이제 하루 수천수만 평을 벼 탈곡을 삽시간에 해치운다.

며칠 전 벼를 수확하는 논에서 만난 친구는 세상에서 벼농사같이 쉬워진 게 없다고 한다.

봄에 볍씨를 담글 필요도 없이 맡기면 되고 농약도 몇 해만 치지 않으면 해충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단다. 물꼬만 봐주면 가을에 누렇게 익는데 콤바인이 와서 거뒀다가 일하는 사람이 직접 싣고 가 말려서 가마니에 담아 준다니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 먼저 탈곡기를 쇠말뚝으로 고정하고 경운기와 벨트를 연결하여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수확한다.
ⓒ 김규환
다산 정약용이 <보리타작>에서 노래했던 만큼만 풍족한 가을이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 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오.

▲ 이앙기와 콤바인이 들어선 뒤로 사람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건 왜인가?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며칠 후 아직도 낫으로 벼를 베어 오래 전 방식으로 탈곡을 하는 장성 북일면 <금곡영화마을>로 농촌체험을 떠날 예정입니다. 벌써 벼는 다 베었다는 군요. 아쉽지만 함께 가실분은 cafe.daum.net/sanchaewon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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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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