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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6년 아브타이항이 세운 몽골 최초 라마교 사원인 에르덴조 사원의 정문 모습입니다. 에르덴조 사원은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첨탑이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데, 그 모습만 봐도 땅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사원에는 약 100개의 절이 있었고, 10,000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라마교는 티벳 불교가 몽골을 비롯한 네팔지방에 퍼진 불교의 한 분파라고 볼수 있습니다. 라마교에서 ‘라마’는 뜻은 덕이 깊은 승려 혹은 스승을 말하는데, 우리가 라마교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라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달라이는 ‘큰 바다 즉 대양(大洋)’이라는 뜻으로,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처럼 덕이 깊은 승려(스승)’입니다.

현재 티벳은 중국에 의해 강제병합 된 후 불교 자체가 조종되는 상황이라 티벳 불교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몽골의 라마교가 오히려 원형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약 몽골 인구의 90% 이상이 라마교 신자인데, 몽골 전통가옥인 게르에 들어가면 정 중앙에 라마신을 모시는 제단이 있을 정도로 몽골인들의 라마교에 대한 신앙심은 깊습니다.

▲ 에르덴조 사원안에 있는 중심 절의 모습입니다. 몽골의 아름다운 정경인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에 쌓여 신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모습이 묻어 나옵니다. 그저 저 맑고 고운 하늘만 보고 있어도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옴마니 반메홈~
ⓒ 푸른깨비 최형국
라마교는 13세기 경에 티벳에서 몽골로 전해졌습니다. 몽골의 초원을 통일하고 중국까지 완전히 정복한 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칸은 티벳을 점령하면서 티벳 승려 ‘파스파’를 원나라 왕실에서 초청하고 라마교가 뿌리내리도록 힘을 썼습니다. 그 이후 몽골에서는 승려는 특권계급에 속할 정도로 지위를 보장받았으며, 수백 개가 넘는 라마교 사원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원나라는 라마교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종교 자체가 국가를 파탄에 이르게 할 정도로 변질됩니다. 결과적으로 천년제국을 꿈꿨던 원나라는 라마교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 사원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는 승려들의 모습입니다. 불공시간에는 특별히 털로 만든 모자를 쓰는데 그 모습이 무척 이채롭습니다. 그래도 불심만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겠지요.
ⓒ 푸른깨비 최형국
이러한 쇠락의 길을 이끌었던 내용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결혼하는 신부의 혼전(婚前)에 고령의 라마승과 동침을 하여 순결을 바쳐야 했던 초야권이라는 관습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말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생활을 조금만 엿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몽골에서는 나이가 어리고 성(性)에 대한 경험 없는 초심자에게 신체적 손상을 주지 않고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성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 에르덴조 사원의 지붕을 지키고 있는 용머리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의 용머리에 비해 투박한 모습이지만, 그 위용만큼은 뛰어나 보입니다. 잡귀 잡신을 물리치는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는 인구가 곧 나라의 힘 즉, 전사(戰士)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었고, 좀 작게 보자면 유목생활에 많은 자식들이 도움이 되었기에 이러한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性)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있는 라마교는 인도 사상사 중 탄트라적 발상과 유사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즉, 인간의 욕망과 몸을 긍정하여 남녀간의 성적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상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마니차’ 라고 불리는 라마교의 경전이 새겨진 원통의 모습입니다. 몽골인들은 이 둥큰 통을 손으로 돌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읊조리면서 탑돌이를 합니다.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것 자체로 경전을 온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이들 장난감처럼 작은 것부터 큰 드럼통 만한 것까지 크기 또한 다양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것은 몸 부정의 철학과 몸 긍정의 철학이 공존해온 모든 사상사에서 조금씩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즉 정치, 종교 등의 사회 내생환경과 맞물려 여성의 지위문제나 불교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만들어낸 철학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융성했던 몽골의 라마교 또한 극심한 탄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몽골에 공산정권이 들어 선후 약 700여개의 라마교 사원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의 지위 또한 박탈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몽골에도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 라마교도 이전의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몽골의 8대 활불 복드한의 궁전 모습입니다. 연두빛 기와가 초원 빛깔과 맞물려 그리도 고울 줄은 몰랐습니다. 허나 여기저기 쇠락한 몽골의 흔적이 가득하기에 쓸쓸한 내음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안에는 다양한 문화재급 불교 관련 전시물이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보통 우리 나라의 스님들은 회색의 승복을 입는데, 몽골의 라마승들은 소매 없는 홍의(紅衣)를 입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라마교를 홍교(紅敎)라고도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핵심적으로 외고 암송하는데, 라마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홈’(Om Mani Padme Hum)을 암송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라마교의 다양한 문화들이 들어와 아마도 이러한 암송 글을 한 번씩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 복드한 궁전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상감 꽃그림입니다. 금빛으로 찬란했던 당시의 모습을 향기 없는 내음으로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러한 라마교의 주 암송 글인 옴마니 반메홈의 의미는 ‘침묵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시작 글자인 ‘옴’ 을 몽골어로 파해해 보면, 옴(Om)은 AUM의 동음으로서 A는 창조, U는 유지, M은 파괴를 뜻하여 세상의 시작과 끝을 상징합니다. 이는 힌두교에서도 말하는 성애(性愛)의 3대 신인 우주창조의 신 부라마(Brahma), 파괴와 생산의 신 시바(Shiva) 그리고 유지의 신 비시뉴(Visnu:Vishnu)의 의미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복드한 궁전의 처마를 장식하고 있는 귀면의 모습입니다. 깜찍한 개구쟁이가 웃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몽골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이처럼 라마교는 우리 생각하는 불교의 모습과 외형적인 면에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라마교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 하나로 귀결되니 불교신자라면 몽골의 사원에서 절을 올리는 것도 좋으리라 봅니다.

▲ 몽골어로 ‘아슬릉’이라고 불리는 석물이 간단 사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해태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마음 착한 사람들에게는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니 너무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 푸른깨비 최형국
첨부파일
bluekb_240477_8[1].MPG

덧붙이는 글 | 푸른깨비의 몽골문화 답사기는 총 10편으로 자연, 들꽃, 마상무예, 역사, 생활 등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서 몸철학과 무예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홈페이지는 http://muye.ce.r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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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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