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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기의 분노는 있을 수 없다. 정의의 분노는 없을 수 없다."

주희의 말이다. 흔히 도덕적 관념론으로 폄하되는 주자학이지만, 바로 그 학문의 창시자는 잘라말했다. 정의의 분노는 없을 수 없다고.

그래서다.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고 김태환을 벌써 잊었는가. 한국노총 충주지부장인 그가 파업현장에서 참혹하게 숨진 지 옹근 20일이 지났다. 하지만 사용자도 정부도 모르쇠다. 고인의 아내가 어린 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절규한 핏빛 한조차 우리는 한귀로 흘려 보낸다.

"당신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사랑해요, 미안해요’라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어요.”

참혹하게 숨진 노동운동가를 모르쇠 하는 정부와 사용자

부인은 회고했다. “해나가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며, 노동자들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며, 항상 버릇처럼 말하던 당신. 그런 당신이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평생 소외된 노동자들을 위해 살겠다던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시기에 저를 이 자리에 세우신건지요.”

노동자를 위해 할 일이 너무 많다던 정규직 노동자 김태환. 그는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서 거대한 레미콘차 뒷바퀴에 머리가 으깨지는 참사를 당했다.
그랬다. 서른 아홉해 고 김태환의 삶은, 그리고 죽음은 이 땅의 노동운동에 바쳐졌다. 얼마나 다른가. 고인의 인식과 참여정부의 대통령 인식은.

야만적 참사가 일어난 지 열흘 뒤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언했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많이 커서 대통령 타도, 정권 타도를 공공연히 말하므로 도와주려 해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기막히지 않은가. 아무리 권력의 향기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도와주려 해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명토박아 둔다. 고 김태환의 죽음은 노동운동에 대한 마녀사냥이 빚은 살인이다. 경영진이 파업을 방해하려고 동원한 레미콘 차량 앞에 서있는 노동운동가를 깔아버린 야만의 주체는 레미콘 차의 운전자도, 차를 몰라고 독촉한 경찰도 아니다. 그것은 틈만 나면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을 마녀로 사냥한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언론이다.

노동현장에서 산재로 1명이 사망해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스웨덴과 굳이 비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파업현장에서 야만적 참사로 노동운동가가 숨졌다면, 당연히 노동부장관은 조문을 와야 하지 않은가. 더구나 오래전부터 노동계가 요구해온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처우에 관한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하지만 어떤가. 김 장관은 모르쇠다. 게다가 차관은 언죽번죽 엄호에 나섰다. “노동계가 김태환 충주지부장 사망에 장관이 조문하지 않은 것과 최저임금 결정과정, 특수형태근로자 제도개선 등을 놓고 장관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든 경우 장관이 직접 가지는 않는단다.

“모든 경우 장관이 직접 조문하지 않는다”는 노동부

그래서다. 취임 뒤 지금까지 노동부장관인지 경제부처 장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행보를 걸어온 김대환의 사퇴를 두 노총이 강력 촉구하고 나선 것은. 그럼에도 그 요구가 정치적이라고 사용자단체는 언구럭부린다. 부자신문들도 “굴복하지 말라”고 김대환을 두남둔다. 눈물로 총파업을 다짐하는 노동자들에게 서슴없이 귀족의 딱지를 붙인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님은 고 김 지부장의 부인을 위로하며 말했다. “사람이 죽은 것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이 부르짖음을 외면하는 정부, 정치하는 분들이 너무 한다.”

7월 7일 총파업을 앞둔 노동자들 앞에서 거듭 묻는 까닭이다. 왜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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