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비아>를 감상하기 전에 유념해야할 몇 가지. 이토록 화창한 4월의 봄날에, 굳이 이토록 '꿀꿀한' 삶을 다룬 한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동참하러 친히 극장까지 가야하는 것일까? '금방 비디오로 나올텐데' 따위 망언을 일삼는 친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혼자 가는 정도의 센스!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가 대체 뭐하던 사람인지, 그녀가 왜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저명한 문인이었음에도 자살로 불행하게 삶을 마쳐야했는지 만큼의 사전 지식은 숙지해주고 가는 정도의 센스! 이 정도는 꼭 지켜주셔야 비싼 관람료를 내고 극장을 본의 아니게 수면방으로 사용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다.
 영화 <실비아> 한 장면
ⓒ CJ AP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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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선택-삶의 극복과 예술에 대한 열정 오늘의 선택인 <실비아>로 들어가기에 앞서, 전기 영화를 감상하기 위한 가장 초급적인 질문 한 가지. '우리는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과거의 인물들을 복원해내는 방식은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화되고 있다. 그 인물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업적과 가치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시대를 배경으로 인물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그 이면에 숨겨진 고독한 내면에 주목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만나는 미국의 천재적인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 기네스 펠트로 분)는 대중에게 알려진 저명한 문인이기에 앞서, 삶의 불행과 고독에 맞서 싸우는 평범하고 심약한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되던 이들이 정작 자신의 일상에서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좌절하거나 극복하는 과정(<샤인> <뷰티풀 마인드> <토탈 이클립스> 등)은, 관객에게 묘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이면에는 늘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 있었다. 하물며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예술인들의 삶이랴. 그래서 천재 예술인들을 다룬 영화는 흔히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러브스토리), 그리고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라붙은 인생의 시련과 절망, 그리고 삶의 마지막까지 인물을 지탱해준 예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다. 엇갈린 사랑에 대한 절망을 섬세한 예술혼으로 극복해 내려 했던 <실비아>의 삶의 궤적은, 멕시코 출신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프리다>와도 연결고리를 가진다. 교통사고로 인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했던 육신의 고통, 남편이자 스승이었던 디에고(앨프리드 몰리나 분)와의 불행한 사랑으로 인한 영혼의 상처. 프리다의 캔버스 안에 펼쳐진 세계는 곧 자기 자신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삶 속에서 강인한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표현했던 프리다에 비하여, 더욱 섬세하고 유약한 성격의 실비아는 삶의 고통을 철저히 자기 안으로 눌러 담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살의 유혹을 느꼈을 정도로 심약한 실비아에게 평생의 사랑으로 여겼던 남편 테드(다니엘 크레이그 분)와의 파경은, 곧 인생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감이었으리라. 영화는, 실비아와 테드가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과정, 즉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행복으로 충만하던 시절과, 테드와의 결별 이후 깊은 고독과 절망 속에서 다시 태어난 실비아의 찬란한 예술혼을 아이러니하게 대비시킨다. 과연 개인으로서의 일상의 행복과, 후세에 남는 여류 문인으로 기억되는 문학적 성취 중 과연 그녀의 '화양연화'는 어떤 시절이었을까? 인물에 다가서기, 혹은 거리두기 전기 영화에서 나타는 공통적인 딜레마는, 영화가 실존 인물과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느냐다. 실존인물의 삶에 접근한다는 것은 늘 어렵다. 건조하게 펼쳐진 삶의 조각들을 취사선택하여 관객에게 설명할 수 있는 영화적 캐릭터로 재창조하는 작업은 늘 왜곡과 미화라는 양날의 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레이>의 시각장애인 뮤지션 레이 찰스처럼, 인물에 대한 경외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가 살아온 삶의 어두운 이면까지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예의바름이라든가, <역도산>의 조선인출신 프로레슬러 '역도산'처럼 특정 인물이 살아온 삶을 관통하는 어떤 '전형성(역도산의 경우에는 신분상승의 욕구)'을 발굴해내여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던가, 반드시 모범 답안은 없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변수는 인물이 처한 시대와 환경의 틀을 어떻게 주인공의 삶에 이입시키느냐에 따라서 인물에 대한 영화의 관점이 결정된다. 그런데 <실비아>는 여기서 시대 배경이나 사회적 담론, 혹은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역사적(혹은 문화적) 평가에서 벗어나 독립된 여성 드라마를 만드는데 주력한다. 덕분에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예술에 대하여 충분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맥락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대신 영화 <실비아>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담담하게 관조하면서 그녀에 대한 어떤 결론이나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이 의도적인 거리두기는, 그녀의 삶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면서 그 판단을 관객에게 넘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쿨한 척 하려는 영화의 시선은 관객이 실비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데도 인색한 우를 범하고 만다.
 영화 <실비아>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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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극중에서 테드와 짧았던 사랑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우울하고, 불안해하며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왜? 라는 섬세한 디테일이 빠져 있다. 왜 그녀는 결혼생활동안 문학적 영감이 고갈되었던가. 그녀의 삶 속에 잠재된 우울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관객이 영화를 시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전체적인 텍스트에서 행간의 여백이 너무나 많다. 관객으로 하여금 극 중 캐릭터의 심리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과, 부족한 내러티브를 알아서 '짐작'하게 만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영화는 간파하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실비아의 삶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위에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 속에 일괄적으로 투영하는 단조로운 방식에 그치고 만다. 그녀는 왜? 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의 입장을 듣고 싶었던 관객들에게는 다소 김빠지는 결말에 다름 아니다. 그나마 영화의 디테일을 복원해내는 것은, 기네스 펠트로의 연기력에 기댄바 크다. 예술혼과 불안한 감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실비아의 결핍감과 섬세한 지성미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기네스 펠트로는 여러모로 제격이다. 강하게 내지르기보다 안으로 쓸어담는 듯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는, 치열함이 부족해서 약간 밋밋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섣부른 감정이입을 자제한 채 관객으로 하여금 차분히 인물에 몰입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놓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실비아의 선택, 지독한 완벽주의와 애틋한 모정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순간이 지나고, 행복을 꿈꾸던 한 여성의 불완전한 삶의 궤적은, 잔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영화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실비아의 내면을 따라가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극장 문을 나서면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 한 권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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