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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요즘 책 읽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면사무소에 찾아오는 이동도서관을 통해 책을 빌려다 봅니다. 매일 저녁마다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몇 개월 동안 피아노를 배웠던 아내,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책 읽는 습관을 심어주겠다고 시작했는데 본인이 푹 빠져 버린 것입니다.

엄마가 책을 가까이 하자 아이들도 덩달아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역사인물에 관련된 책에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애들 데리고 역사 탐방을 다녀야겠어."
"근디 애들 그림지도는 어떻게 하구?"
"토요일로 몰아서 하지 뭐."

아내는 외양간을 고친 화실에서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공주시내와 면소재지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반쯤 접어두고 일요일에는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역사 탐방을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찬성했습니다.

때마침 녹두장군, 전봉준에 관련된 책을 읽고 있어 첫 역사 탐방을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우금티(1894년 농민군의 공주 싸움의 최대 격전지였던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군은 그해 11월 9일 오전부터 40~50 차례 이 고개를 넘기 위해 일본군. 관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로 정했습니다.

▲ 지난 10월 30일에 열린 2004 우금티 추모 예술제
ⓒ 송성영
우리 식구는 최근 몇 년 동안 동학농민군을 추모하는 '우금티 추모 예술제'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동학농민군들이 충남 공주에서 어떻게 싸웠는지는 잘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지난해 겨울부터 '동학농민 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의 정선원 선생(공주 유구중학교)을 따라다니며 우금티를 중심으로 펼쳐진 동학농민전쟁에 관련된 흔적을 더듬고 있습니다. 정선원 선생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우금티동학농민전쟁'에 관련된 자료집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나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공주로 향했던 동학농민군의 진격로와 마지막 전투지였던 우금티 고개를 더듬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정선원 선생을 통해 알게 된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 공주에서 이인면 사무소 쪽으로 가다가 만난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
ⓒ 송성영
공주에서 이인면 사무소 쪽으로 가다보면 도로변에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그 팻말 아래로 큰 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유림들이 조선시대나 일제 시대 의병을 일으켰던 것을 기념하는 사적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장문으로 새겨진 이 비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 높이 3 미터 가까이 되는 '유림의병정난사적비' 에는 공주지역 유림들이 충효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이 아닌 동학농민군을 몰아냈다고 적혀있다
ⓒ 송성영
이름하여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에는 충효사상으로 무장한 공주 지역 유림들이 '의병'을 모아 농기구나 죽창으로 무장한 무지몽매한 폭도들, 동학농민군들을 몰아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 '유림 의병'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본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군들을 몰아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구한말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도 아닌, 단기 4327년, 1994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처럼 역사를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를 수 있을까요?

그 비석이 세워진 곳에서 1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이인면 사무소가 나옵니다. (이인면은 동학농민군이 우금티로 진격하기 전에 점령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인면 사무소 앞에는 조선시대의 오래된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비석거리가 있습니다. 이들 비석 중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박제순(朴齊純)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 이인면 사무소 앞에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송성영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박제순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공주 감영에 머무르며 동학농민군토벌작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고 이 공덕비에는 그런 그를 추앙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박제순 공덕비'에는 당시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을사오적 박제순을 칭송하고 있다
ⓒ 송성영
비문 앞면에 새긴 글- (?)는 비문이 보이지 않은 부분입니다.
巡察使 朴公齊純 去思碑
福星 照 我公宣恩 剿匪救民 全省賴安
(?)粟移馬 殘驛復完 竪石頌德 永世不(?)

(해석)
순찰사 박제순을 보내고 그 선정을 사모하는 비
복된 별이 비치어 공이 은혜를 베풀었다.
비적(동학농민군)으로부터 백성을 구하여 편안하게 보살폈고
조를 내고 말을 보내와 부서진 이인역을 다시 복원했다.
이에 그 덕을 칭송하는 비를 세워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한다.


비문 뒷면에 새긴 글
'乙未'(이후의 글자는 보이지 않음)

(해석)
'을미'는 1894년 갑오 동학농민전쟁의 다음해인 1895년, 을미년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박제순의 공덕비는 동학농민전쟁 다음해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이 비문의 주인공인 박제순은 1905년 을사조약 당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과 더불어 을사오적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섯 매국노 중에 하나인 그는 1910년 '일제강점' 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았고, 중추원 고문, 경학원(친일 유학 단체) 대제학으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공덕비가 안내문 하나 없이 떳떳하게(?) 서 있는 현실을 아이들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거 당장 없애 버려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없애면 안 될 것 같혀, 안내문을 세워두고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두는 게 나을 것 같은디."

지난 여름, 정선원 선생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이인면사무소 직원에게 박제순이 어떤 인물인가를 적어 비석 앞에 세워둬야 할 것을 건의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나 봅니다. 그동안 없애버리지 않았을까 염려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박제순은 여전히 후세에 칭송 받아야 할 인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을사오적'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많았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매국노들의 후손들은 또 다른 외세에 빌붙어 대를 이어 호의호식해 온 게 현실입니다. 이제는 아예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축적했던 재산까지 되찾겠다고 당당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빠, 을사오적이 뭐여?"
"일본한테 나라 팔아먹은 나쁜 놈들."
"지금도 있어?"
"글쎄, 지금은 다 죽고 없는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그런 못된 놈들이 많다고 할 수 있지."

사실 박제순의 공덕비가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요즘 대한민국 정치판은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 박제순과 같은 또 다른 '을사오적'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1894년, 권력의 부패와 외세의 침탈로 나라와 겨레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떨쳐 일어나 '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하에 선포했던 동학농민군들, 그 후로 110년, 강산이 열한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공주 이인면의 '유림의병정난사적비'에 등장하는 '유림의병'과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일제가 아닌, 미국에 빌붙어 한민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내주고자 하는 매국노들이 당당하게 설쳐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림 의병정난 사적비'의 '유림의병'들처럼 나라를 구하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에 빌붙어 한 핏줄인 북한을 말살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 합니다. 외세에 빌붙는 것을 애국애족이고 한민족과 손잡는 것을 매국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길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한민족을 살리는 길인지 똥오줌 가릴 줄 모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반외세를 외친 동학농민군들을 폭도로 몰아붙였던 110년 전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개처럼 외세의 군홧발을 혓바닥으로 핥아 대는 한이 있어도 배불리 잘 먹고 잘살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을사오적들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식구의 첫 번째 역사 탐방은 '부끄러운 역사‘ 탐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역사’ 탐방 끝에 아이들에게 해줄 말을 깜박 잊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도 많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싸웠던 진짜 의병들도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외세의 협박 속에서 한민족을 지켜내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들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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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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