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충북 음성과 경기도 가평에 이어 세번째 `꽃동네'가 경남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 자락에 들어설 뻔했다. 그러나 5년간에 걸친 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다. 지난 94~99년 사이 벌어진 일이지만, 지역주민들은 아직도 오웅진 신부와 `꽃동네' 이야기만 나와도 극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자가 만난 현지 주민들은 악몽과 같은 그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거창 제3꽃동네' 설립을 반대한 사람들은 마을 주민, 지방의회 의원 뿐만 아니라 오웅진 신부와 같은 신분인 천주교 신부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당시 '제3 꽃동네' 반대투쟁은 거창에서 나오는 몇몇 지역신문에서만 보도됐을 뿐, 대부분 신문과 방송들이 이를 외면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은 아니다. <오마이뉴스>는 '거창 제3꽃동네 사건'의 현장을 찾아 반대대열에 섰던 주민, 관계자 등을 만나 당시 상황을 취재했다....<편집자 주>


▲ '거창 꽃동네'가 들어서려고 했던 현장(오른쪽)과 그 아래에 있는 강남마을 풍경(왼쪽).
ⓒ 오마이뉴스 윤성효
주민들, “오 신부 말도 꺼내지 말라”는 반응

현장을 찾아서 =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강남마을. 닷새전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데, 26일 아침부터 또 함박눈이 내렸다.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 위에 주민들이 마시는 물을 가둬놓은 저수지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있는 금원산 중턱 20만평에도 눈이 내렸다.

▲ 현장 가는길. 거창읍내에서 수승대 방향으로 가다가 상천마을을 지나면 강남마을까지 갈 수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거창읍내를 벗어나 수승대 가는 길을 가다가 옆길로 나와 위천면과 금원산으로 향했다. 위천면사무소에 들러 일요일 당직자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현재는 어떤 상태냐고 했더니 당직자는 "완전히 끝난 거죠. 여기서는 '꽃동네' 말도 못 꺼내요"라 대답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을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다.

'꽃동네'가 들어서려고 했던 장소를 묻자 그는 "그대로 있죠"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바로 밑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농업용수로도 쓰고 식수로도 쓰는데 어떻게 그 위에 대규모 시설을 짓는단 말이냐"면서, 이미 끝난 일을 왜 알아보려고 하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당직자가 일러준 대로 차를 몰고 한참을 올라갔다. 등산복 차림의 일행이 내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경상남도'에서 조성해 놓은 '금원산 자연휴양림'이란 안내간판도 지났다. 눈길에 차가 몇 차례 미끄러지면서 한참 올라갔더니 마을이 나왔다. 20여 가구가 사는 강남마을이다.

우산을 쓰고 마실을 가는 50대 아주머니를 붙잡고 저수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위에 있는데, 눈이 오는데 뭣하러 가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꽃동네' 들어오려고 했던 데를 가 보려고 한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왜, 또 들어 온대요? 안 되는데. 큰일이네"라고 말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무슨 신부인가 하는 사람 있지요. 우리는 그 신부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바로 꺼버립니다. 그렇게만 아소. 카~. 말은 잘 하대요”라는 말까지 했다.

@ADTOP5@

관련
기사
"가족에 10억 송금...횡령은 아니다 증빙자료 요구는 치욕, 수용 못해"

'거창 꽃동네' 반대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강신봉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군의원이었던 강씨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거창 꽃동네’ 사건은 청와대라든지 힘있는 권력기관의 비호가 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거창 꽃동네’ 반대운동에 동참했던 백남해 신부는 남다른 감회를 갖고 있다. 백 신부는 “오웅진 신부와 관련해 천주교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다”면서, “‘꽃동네’의 잘못된 사회복지 서비스의 중단과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경남도와 '꽃동네'가 도유림 사용과 관련해 주고받은 공문들.
ⓒ 오마이뉴스 윤성효
95년 도유림 사용동의 받아 촉발, 규모는 20만평 계획

경과 = 95년 1월 23일, 사회복지시설 ‘꽃동네’를 운영하고 있는 ‘재단법인 청주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이사장 정진석)은 경남도지사 앞으로 “도유림 사용 동의 신청서 제출”이란 공문을 냈다. 금원산 자락에 경상남도 땅 300만평이 있는데, 이 가운데 20만평을 무상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꽃동네’는 경남북과 부산 대구를 포함하는 남부권의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길가에서 다리밑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수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초 ‘꽃동네’는 1500여명을 수용하기 위해, 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에 걸쳐 313억원을 들여 시설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짰다.

그런데 이같은 계획은 이미 94년부터 논의되어 왔다. ‘꽃동네’는 당초 도유림 임대를 신청했지만 경남도는 ‘임대불가’ 대신에 ‘사용동의서’를 발급해 주었다. 95년 2월 공공시설 입지승인을 신청했고, 이후부터 지역사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위천면을 중심으로 ‘반대대책위’가 구성되었다. 거창군도 주민들의 뜻을 받아 경남도에 ‘도유림 사용동의서 철회’를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속에 96년 11월 국비 20억원 지원이 내시되었고, 이는 97년 사회복지비 예산에 반영까지 되었다.

계속해서 주민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군의회는 97년 4월 반대결의와 함께 서명운동을 벌여 3만7000여명의 서명을 받기도 했다. 도의회도 이 문제에 논의를 했고, 정종기 도의원 등이 반대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천주교 마산교구는 97년 6월 주민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메시지를 밝히기도 했다.

경남도는 97년 7월 9일자 공문을 통해 ‘도유림 사용동의서 철회’를 ‘꽃동네’에 통보했다. 경남도는 사용 철회 사유로 “대규모 복지시설 설치가 필요하지 않다”면서, “언제라도 지역 여건이 성숙되어 거창군에서 수용의사가 있을 경우 재발급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ADTOP6@
“성직자로서 있을 수 없는 공문” 보내 말썽 일으키기도

▲ '꽃동네'가 김영삼 대통령(맨 위)과 국가안전기획부장(가운데), 경남도지사(아래) 앞으로 보낸 공문의 일부.
ⓒ 오마이뉴스 윤성효
협조공문 파문 = 이런 과정에서 ‘꽃동네’ 오웅진 신부는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요로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을 두고 말이 많았다. 공문은 ‘참으로 고마운’이거나 ‘고마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대통령(김영삼), 국무총리(이수성), 국회의장, 재정경제원 장관을 비롯한 7개 부처 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 산림청장, 경남도지사, 거창군수, 한국전력공사 사장 앞으로 보냈다.

당시 공문에 보면, 4년간 건립 예산 313억원을 국비와 지방비로 충당하기로 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건설교통부는 3킬로미터 거리의 진입도로 공사, 내무부는 특별교부세와 일반교부세 지원, 환경부는 생활오수처리 시설의 재정 지원, 정보통신부는 4킬로미터 거리의 전화 설치, 한국전력공사는 고압전선주 무상 설치 등을 각각 요구했다.

그러면서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음해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꽃동네’는 공문에서 “몇몇 선동자들로 인한,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로 가난하고 선량한 동족의 구원의 삶이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에게는 “특별한 법적인 안배와 사랑의 선처”를, 국가안전기획부장에게는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는 몇몇 사람이 선량한 많은 주민을 선동한다”며 “선도해 줄 것”을, 공보처장관에게는 “정부의 홍보수단인 언론과 방송을 통해 주민선도와 예산 확보에 크게 도와 줄 것”을 각각 요구했다.

당시 ‘반대대책위’는 “실제와 달리 음해 날조했다”면서 “성직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법적 대응 움직임까지 보였다.

꽃동네 활동 = 오웅진 신부는 정부 요로에 진정서 형태의 공문을 보내는 것 이외에 당시 갖가지 활동을 벌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가운데 거창군과 군의회를 방문해 경기도 가평의 예를 들면서, 결국 거창도 설립되고 말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아림신문> 발행인 윤구씨는 당시 칼럼에서 이를 지적했다. “오 신부가 군과 의회를 방문해, 꽃동네의 설립은 거창뿐 아니라 가평에서는 이 보다 더 강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은 주민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하면서, 거창 역시 결국은 동의할 수밖에 없으며 설령 동의가 없다고 해도 법으로 관철시킬 것이라며 협조를 바란다고 했다고 한다.”

200명 이상 집회 6회나 열어, 서명운동까지

반대운동 전개 = ‘꽃동네 설치반대 투쟁위원회’는 95년 2월 결성되었다. 그해 1월 ‘꽃동네’에서 경남도에 도유림 사용동의를 신청한 지 한 달만이었다. 거창에서 200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가 여섯차례나 열렸고, 마을 이장들도 반대결의대회를 열 정도였다.

이들은 ‘거창 꽃동네’가 들어설 경우 “자연 파괴가 심각하기 때문”이고, “거창에 이익보다 피해를 줄 것”이며, “꽃동네가 설만한 적지가 아니다”고 이유를 밝혔다. 당시 ‘위천면 꽃동네 반대추진위원회’는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오웅진 신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까지 했다.

“꽃동네를 세우려는 오 신부의 계획이 ‘적지’라는 관점이 아니라 ‘도유림’과 220억원이 넘는 엄청난 자금까지 무상 지원을 받기 때문에 자행하는 것이라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꽃동네’를 짓겠다는 그의 뜻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마을 위 저수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안내판. 26일 오후 눈이 내려 앞이 보이지 않은 속에 수영 금지를 쓴 현수막이 보인다.
ⓒ 윤성효
전 교구장도 반대에 힘 실어줘

천주교 비난, 반대 = 당시 ‘거창 꽃동네’는 천주교회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거창성당 한 신부는 지역신문에 칼럼(“거창한 ‘거창 꽃동네’ 유치될까?-아림신문)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군의회가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 신부는 “대규모 복지시설은 현 시대에 부적합하고, 예정지 주민들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며 분명한 반대 입장을 냈던 것.

97년 6월 천주교 마산교구장은 경남지역 전 성당에 메시지를 전달해 “주민들의 꽃동네 반대 운동의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마산교구장은 이후 낸 자료집에 쓴 글에서 “주민들이 정당한 이유로 반대할 때에는 그 반대의 의견이 충분히 참작되고 타협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꽃동네가 바로 그 자리에 그런 형태로 설립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이라 설명했던 것.

오웅진 신부를 비난하는 일반인들의 글도 쏟아졌다. 당시 정종기 도의원은 “오웅진 신부는 고해성사를 받으라”는 제목의 글을 <아림신문>에 내기도 했다. 정 전 의원은 “(정부 요로에 보낸 공문과 관련)그 성스러운 신부복을 입고서 시정 잡배들이나 써먹는 수법을 동원했다”면서, “오 신부가 지역주민의 절규를 외면한다면 종교인으로서의 자질을 한번 검증해 봐야 할 것”이라 밝혔던 것.

또 <아림신문> 발행인 윤구씨는 “꽃동네의 계시”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신론자들이 흔히 말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한 사업(선행)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다’는 것이라면서 이 ‘무궤도 열차에 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들 한다. 지금 거창이 꽃동네라는 무궤도 열차 앞에 놓여 있는 것 같다”라고.

천주교의 몇몇 뜻있는 신부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웅진 신부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 전 마산교구장까지 나서서 반대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특히 백남해 신부는 드러내놓고 '거창 꽃동네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

이후 ‘거창 꽃동네’ 사건과 관련해 두 차례 자료집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천주교에서 낸 것이다. 그만큼 천주교 내에서도 오 신부가 추진한 '제3꽃동네 사건'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만큼 문제가 있는 사건으로 봤다는 얘기다. 그 자료집 맨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 ‘꽃동네’의 무분별한 양적 팽창이 가져오는 폐해를 직시하고 막는데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