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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자에게 기사를 쓴다는 것은 어찌보면 생명과 같은 일입니다. 기자에게 기사란 자신의 존재 이유이며, 또한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가치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부족하지만 이런 기자라는 위치에 서서 객관적 사실과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후로 다시는 이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마 저의 부끄럽고 초라한 결정에 대해서 분노하는 독자분들도 계실 것이고 기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행동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의 마음에서 기자로서의 평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진실을 보도해야 합니다. 기자는 객관적 사실을 보도해야 합니다.

▲ 지난 21, 동두천 캠프케이시 앞에서 벌어진 미군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군사재판 항의시위에서 태극기에 혈서를 쓰고 있는 시민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데, 저는 제가 취재를 하면서 직면한 수많은 사실과 진실 앞에서 저의 평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 저의 균형감각과 저의 차가운 이성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서릿발같은 차가운 진실 앞에 그리고 매서운 겨울바람과도 같은 날카로운 사실들 앞에서 저는 할말을 잃고 머리 속에서 울려나오는 그리고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양심의 함성에 기자로서의 저의 존재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번 여중생 사망 사건의 무죄 평결과 그 파장을 취재하면서 저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진실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국내외의 형사법 전문가나 법대 전공자들과 인터뷰를 시도하면서 이번 사건의 유죄 성립 여부와 판결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하였고 또한 이러한 판결이 국제법적인 문제가 없는지조차 찾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부족하지만 기자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부족하기만한 노력은 거대 언론 미디어의 보도와 주한미군측의 발표문 앞에서 한낱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제가 찾고자했던 사실과 그 사실에 기초한 진실들은 그들 앞에선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무죄 평결이 마치 진리인 듯 널리 배포되고 남아 있던 작은 희망마저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땅이 법치 국가임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법치국가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 땅 위를 밟고 있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인권과 우리 한국민의 주권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선 그 누구도 그들만의 법으로 그들 스스로 심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저의 소박한 신념과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인권을 짓밟지 못하리라는 굳은 믿음이 저의 내면에서 의심받고 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원망스럽습니다. 기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렇게 갈등하고 의심하고 괴로워하는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는 기자가 지녀야할 평정과 냉철한 이성은 사라지고 고통과 갈등 그리고 두려움과 절망이 저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또 이번 여중생 사망 사건에 관련되어 피의자가 된 미군들을 부당하게 혹은 맹목적으로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미국 내 몇몇 한인들, 일부 네티즌들, 일부 유명 인사들을 보면서 저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충격과 고통 그리고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비록 기자이지만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저도 또한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취재를 하면서, 이런 취재 대상을 대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마치 그들이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의 감정의 과잉(overflow of powerful feelings)이 저의 취재를 흐트려트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는 저의 굳은 의지를 저의 감정이 어지럽게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번 사건에 대한 취재는 저의 마음의 평정을 되찾지 않는 한 불가능함을 여러분 앞에 알리고 고백하고자 합니다.

저의 기사를 읽고 격려해주셨던 분들과 저는 저의 기사에 반대하여 비난과 비판 그리고 욕설을 보내주셨던 분들 모두에게 유감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진실을 추적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부족한 제가 기자로서의 저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저와 반대되는 기사를 작성한 거대 미디어와 주한 미군의 보도 자료보다 더욱 설득력이고 논리 정연한 기사를 쓰지 못한 점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여러분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며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논리적이고 제가 조금만 더 설득력 있는 글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지금 저의 초라한 모습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제가 이렇게 더 이상 취재를 못하고 이번 사건에서 물러나는 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기사로서의 투철한 사명 의식과 강한 의지가 부족한 탓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저의 부족함을 꾸짖어주시고 저를 대신하여 아니 저와 같은 부족한 모습이 아니라 더 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숨겨진 진실과 진리를 가지고 여러분의 기사를 이 땅 위에 세워주십시오.

끝으로 제가 기사를 작성할 때, 기꺼이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하며, 무명으로 소중한 취재 자료를 아무 대가없이 제공해주셨던 수많은 네티즌 여러분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디시인사이드, 나우누리의 폐인 여러분, 여러분들은 진정한 기자이며, 기자 정신으로 무장한 강건한 시민 언론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진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게시판에서 보여주셨던 여러분들의 뜨거운 열정과 진실추구에 대한 희망을 저는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제 이번 사건에 대해 기자가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사건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기자로서의 평정마저 잃은 제가 더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분께 부끄러운 일이 되겠지만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저에게 큰 용기가 되고 위안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김대중 정권의 고위 관계자가 말했던 그 "한줌의 모래알같은 극좌 반미 세력"의 일부로 저 자신이 낙인찍힌다 할지라도 기꺼이 저의 마음 속에 타오르는 양심의 전언과 진실을 열망하는 자유의 불길을 좇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아름다웠던 두 소녀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부당한 재판에 대해 함께 손잡고 우리를 억누르는 저들에게 항변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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