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가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에서 초반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와 함께 아시아축구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던 중동팀들이 첫 경기부터 잇달아 굴욕적인 참패를 당하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개최국 카타르(피파랭킹 50위)는 지난 21일(한국시간) 열린 대회 공식 개막전이자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에콰도르를 상대로 0-2로 패했다. 에네르 발렌시아에게 전반에만 멀티골을 내준 카타르는 역대 월드컵 사상 92년 만에 처음으로 개최국이 첫 경기에서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다.
 
또한 아시아 피파랭킹 1위 이란(20위)는 유럽의 강호 잉글랜드와의 B조 1차전에서 대량실점을 허용하며 2-6으로 참패를 당했다. 잉글랜드는 전반 35분 주드 벨링엄의 헤딩을 시작으로, 부카요 사카-라힘 스털링의 연속골이 이어지며 전반에만 3대 0으로 앞섰다. 후반에도 사카의 멀티골, 교체 투입된 마커스 래쉬포드와 잭 그릴리시의 한 골씩을 추가 넣으며 이란의 수비를 자비없이 무너뜨렸다.
 
이란은 메디 타레미가 후반 20분 첫 만회골을 넣었고, 추가시간에는 잉글랜드 존 스톤스의 파울로 얻은 페널티킥을 다시 한번 타레미가 키커로 나서서 멀티골을 성공하여 체면치레를 한데 만족해야했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상 아시아팀들은 월드컵 무대에서 언더독으로 평가받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는 사상 처음으로 열린 중동월드컵(아시아로는 2002 한일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이라는 점에서 '홈 어드밴티지'가 큰 변수로 여겨졌다. 카타르는 2019년 아시안컵 챔피언이자 개최국이었다. 같은 중동팀인 이란 역시 사실상 홈이나 다름없는 익숙한 환경에 아시아 최강의 전력과 경험을 갖췄다는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뚜껑을 여니 세계 축구와의 수준차는 아직 컸다.
 
역대 월드컵에서 개최국은 2010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하면 모두 16강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특히 개최국이 1차전에서 패한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카타르에게는 이런 월드컵 징크스도 무색하게 무기력한 경기내용으로 실망감을 안겼다.
 
카타르는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출전권을 얻기 전까지 자력으로 본선무대를 밟아본 경험이 전무했고 이는 월드컵 사상 최초였다. 선수 전원이 모두 자국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만 구성되며 큰 경기와 국제경험도 매우 부족했다. 카타르는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선수 귀화에 이어 리그까지 중단하고 6개월 장기합숙까지 단행하며 총력전을 펼쳤으나, 정작 월드컵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첫 경기 상대인 에콰도르는 남미예선 4위로 피파랭킹도 44위에 불과하여 A조에서는 카타르가 그나마 해볼만한 상대로 거론된 팀이었다. 하지만 카타르는 에콰도르에게도 90분간 유효슈팅을 단 1개도 기록하지못하는 충격적인 부진을 보이며, 전력이 더 강한 세네갈-네덜란드전을 앞두고 비관적인 전망이 높아졌다.

이란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을 제치고 3회 연속 1위를 차지하며 본선에 진출했을 만큼 자타공인 '중동의 맹주'로 꼽혔다. 다른 아시아팀들에 비하면 잉글랜드, 미국, 웨일스등과 한 조에 편성된 대진운도 그나마 해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란은 본선을 약 두 달 앞둔 9월, 지난 두 번의 월드컵을 지휘했던 포르투갈 출신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까지 다시 전격 복귀시키며 승부수를 걸었다.

케이로스표 이란의 트레이드마크는 이른바 끈적끈적한 '늪+침대축구'였다. 객관적 전력에서 앞선 강팀들을 상대로 극단적인 '우주방어'를 기본 전략으로 역습 한 방을 노리는 텐백축구에 한국도 여러 차례 골탕을 먹었고, 심지어 월드컵 본선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스페인, 포르투갈같은 강팀들도 제법 고전을 면치못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케이로스의 이란은 지난 두 번의 월드컵 본선에서 모두 조별리그 통과에는 실패했다. 2014 브라질 대회에서는 1무 2패, 2018 러시아 대회에서는 1승1무1패를 기록하고도 16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강팀들을 어느 정도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창의성이 없고 수동적인 축구라는 한계도 명확했다.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 1차전은 이란의 현 주소를 보여준 경기였다. 이란은 예상대로 초반부터 라인을 바짝 내리고 수비에만 집중했다. 이는 측면 풀백과 2선의 침투능력이 출중하고 유럽 최고 수준의 화력을 지닌 잉글랜드에 오히려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경기 초반에 골키퍼 알리레자 베이란반드가 동료와의 충돌로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나가는 악재는, 가뜩이나 주전 의존도가 엄청나게 심한 이란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실제로 이란은 골키퍼 교체 이후 무려 6실점을 허용했다. 특히 전반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첫 실점을 허용하면서 우주방어의 이유를 잃어버린 이란은, 다급하게 전략을 변경하여 라인을 끌어올렸지만 이는 오히려 물오른 잉글랜드에게 역습의 공간을 내주는 또다른 자충수가 됐다.
 
이란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는 조별리그 3경기 4골,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3경기 단 2골 밖에 내주지 않았는데, 지난 본선 두 대회를 합친 것과 같은 실점을 잉글랜드전 한 경기에서만 허용했다. 이는 이란 월드컵 역사상 역대 최다 실점 수모이기도 했다.
 
이란 축구팬들은 1996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6-2로 대파했던 순간을 자국축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중 하나로 꼽으며, 지금도 이른바 '식스투'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그런데 비록 상대와 대회는 다르지만 월드컵에서 하필 똑같은 스코어의 굴욕을 당하며 또다른 식스투를 역사에 남기게 됐다. 잉글랜드와의 전력 차를 고려하더라도 월드컵에서는 보기드문 스코어다. 이란은 선수들의 이름값이나 전력 면에서는 오히려 지난 2014-2018 대회보다 더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는데다, 홈이나 다름없는 같은 중동지역에서 열린 월드컵으로 기대를 모았기에 더 충격적인 결과였다.
 
한편으로 이란과 카타르의 굴욕은 다른 아시아팀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 대륙 소속으로 출전한 팀은 호주를 비롯하여 총 6개팀이다. 이중 중동팀은 총 3개팀이다.
 
아시아팀의 다음 주자도 또다른 중동팀인 사우디아라비아다. 그런데 사우디의 상황도 썩 좋지가 않다. 아르헨티나, 멕시코, 폴란드 등 각 대륙을 대표하는 강호들과 한 조에 편성된데다 하필 첫 경기부터 슈퍼스타 리오넬 메시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22일 오후 19시)를 만난다.
 
공교롭게도 사우디는 월드컵 출전마다 아시아팀중 대패의 흑역사가 유독 많았던 팀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첫 월드컵 출전이었던 1994년 미국 대회에서 깜짝 16강에 올랐으나 4년 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프랑스에 0-4 대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독일에 무려 0-8로 참패하는 수모를 썼다. 같은 대회에서 열린 아일랜드전에서도 0-3으로 무너졌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우크라이나에게 0-4, 12년 만의 출전이었던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러시아에 0-5로 무릎을 꿇은 바 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한국과 일본, 오세아니아의 호주 등도 하나같이 녹록지 않은 대진운을 넘어야하는 상황이다. 최근 월드컵 참가국들의 규모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그에 따른 대회 수준의 질적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사실상 월드컵에서 시장 규모에 비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를 가장 겨냥한 지적이기도 하다. 아시아 국가들이 이번 대회에서 월드컵 수준에 어울리는 경기력을 증명하지못한다면 비판의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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