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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교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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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변호사는 천직이었다.

5공시대에 시국사건은 유신시대 못지 않았다. 유신의 정신적 유산(DNA)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행태였다. 불의의 시대에 의로운 일을 하다가 구속된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83년 말 이래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가 계속 터져나오자 전두환 정권은 정부 및 사회에 대한 어떤 종류의 비판에 대해서도 '좌경용공'의 딱지를 붙여 탄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교육 현장의 문제의식을 모아 비정기 무크 <민중교육>지를 1985년 5월 20일에 창간하였다. <민중교육>은 일선 교사들의 시각에서 교육 문제 해결의 방안 제시를 하고자 창간되었다. <민중교육>은 창간되자마자 당국의 주의를 받았다.

6월 25일 서울 여의도고 교장 김재규는 서울시교위 학무국장에게 책자를 전달하였고, 학무국장은 그 내용에 대해 시교위 안기부 조정관에게 의뢰하였다. 이후 <민중교육>은 급속히 사건화되어 7월 16일 출판기념회는 종로경찰서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다. 7월 18일에는 시교위가 관련 교사들을 소환했으며, 7월 22일에는 유상덕ㆍ김진경 교사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문교부와 언론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펼쳐졌다. 8월 8일부터 검찰의 형사처벌방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10일 유상덕ㆍ고광헌 교사 등 6명이 자진출두했으며,  8월 17일에는 김진경ㆍ윤재철 교사와 실천문학사의 송기원 주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주석 1)

한승헌은 법조계에 복귀한 이래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이동철 지음)의 실제 주인공인 허병섭 목사의 상고심 사건에 이어 다시 '민중교육'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이돈명ㆍ홍성우ㆍ김동현 변호사와 함께였다.

공소장은 그 첫머리부터 가공할 편견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정형편이 어려워 현실에 대한 불만이 컸다면서 가난 - 불만 - 현실비판 - 용공이라는 어이없는 도식을 내밀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자 검사는 한 피고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은 북한 공산집단이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공소사실을 강력히 부인하는 피고인들도 거의 "예"라고 대답하는데, 이 피고인은 뜻밖에도 "모릅니다"라고 잘라버리는 것이 아닌가.

검사는 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니,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도 모른단 말이오?"하면서 언성을 높였다.

피고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의 신문을 볼 수도 없고 방송도 못 듣게 하는데 어떻게 북한의 대남전략을 안단 말입니까."

"구체적인 것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을 것 아니오?"

검사의 집요한 반복질문에 귀찮아졌는지 피고인은 "대략적인 것은 좀 압니다."라고 응수했다.

검사는 드디어 말꼬리를 잡았다는 듯이 "방금 전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니 대략적인 대남전략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라고 다시 물었다.

피고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예비군훈련 가서 들었습니다." (주석 2)

윤재철 피고인의 뒷날 한 변호사 관련 기록이다. 

변호사 신문은 한승헌 변호사님이 하셨다. 미리 오셔서 조목조목 정리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자세하게 의견도 묻고 지도도 해주셨는데, 아주 자상하신 것이 남이 아니라 한 식구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키에 약간 가무잡잡한 얼굴이 꼭 시골에서 김 매다 지금 막 올라오신 삼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변호사님을 접견하고 감방에 돌아와서는 말씀해주신 것을 조목조목 머리에 떠올리며 답변을 구상하고 외우곤 했다. 지금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변호사님이 교육이론가들 못지않게 교육문제에 관해, 이념적인 문제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계신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주석 3)


주석
1>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437쪽.
2> 한승헌, <교육민주화 염원과 '용공 - 반미' 사이>, <실록(3)>, 467~468쪽.
3> 윤재철, <교육민주화의 횃불>, <실록(3)>, 488~48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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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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