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휴가철입니다. 무더위까지 기승인데요. 산으로 바다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코로나19가 재유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계획마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이럴 때, 무더위와 여행에 대한 갈증을 동시에 해소시켜 줄 '나만의 휴양지'가 있다면 어떨까요?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추억 여행에 젖다 보면 답답함도, 무더위도 잠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속 추억이 담긴 '나만의 휴양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 (주)엔케이컨텐츠

 
평소 관람 극장의 공기, 향기, 좌석의 안정감, 함께 마시는 음료와 관객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형태를 넘어 당시 상황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관크(관객 크리티컬, 관람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가 많으면 아무리 잘 만든 영화도 재미가 떨어진다.
 
관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삶에 깊게 스며든 영화가 있다. 2012년 5월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파리를 배경으로 한 <미드나잇 인 파리>가 그러했다. 오랜만에 비 오는 주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여행 직후인 2012년 7월 개봉한 영화는 몸은 한국에 마음은 파리에 있는 나를 붙잡아 잊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영화가 나에게 시나브로 스며들었다.
 
항상 프랑스, 그중에서도 파리를 동경했다. 프랑스 영화를 유독 챙겨 봤다. 낭만과 예술, 사랑이 가득한 파리는 언제나 꼭 가고 싶은 도시 1순위였다. 파리에 가면 없던 로맨스도 생길 것 같았다. 내친김에 허니문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고 내 마음속에 영화 1순위는 아직도 <미드나잇 인 파리>가 되었다. 현재 우디 앨런 감독의 명성은 할리우드에서 퇴출 분위기지만 영화만 놓고 보자면 굉장한 작품이다.
 
파리에서 찾은 뜻밖의 낭만과 현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 (주)엔케이컨텐츠

 
물질만능주의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와 파리로 여행 온 작가 길(오웬 윌슨)은 1920년대 비 오는 파리에 살고 싶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그날도 쇼핑에 열 올리는 약혼자와 따로 산책하던 길,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끌려 갑자기 나타난 클래식 푸조 자동차에 올라타게 된다.
 
승객의 차림새가 이상하다고는 느낄 무렵, 놀랍게도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평소 동경하는 예술가를 만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1920년대 파리는 전 세계에서 모인 예술인의 용광로였다.
 
젤다와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던 파티에서 작곡가 콜 포터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선술집에서 만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책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친김에 거트루드 스타인을 소개받는다. 순수문학을 해보고 싶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니, 한번 가져와 보라고까지 한다. 거장이 내 소설을 읽어 준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더 있을까 싶다.
 
그러다 아름다운 여인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에게 첫눈에 반한다. 헤밍웨이,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티스의 연인이자 뮤즈인 아드리아나에게 빠져버린 길은 이네즈와 점차 소원해진다. 내친김에 길은 아드리아나와 1920년대 거리를 걷다, 홀연히 나타난 마차를 얻어 타고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에 당도한다. 둘은 예술과 감정을 나누며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 시대에 남겠다는 아드리아나를 두고 길 혼자 돌아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 (주)엔케이컨텐츠

 
영화는 각자의 마음속에 품은 완벽한 시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현재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자정이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와 반대로 자정이면 파리는 마법에 걸린다. 길은 21세기가 아닌 1920년대에 태어났어야 한다고 아쉬워하지만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 시대를 만나 비로소 정체성을 깨닫는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이다.
 
결국 이리저리 돌아왔지만 시간 여행은 현재와 과거, 모두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 다른 시대가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착각은,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낭만에 빠진 사람의 결점이란 소리였다. 인간은 언제나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과거에 발목 잡혀 사는 어리석은 동물이다. 과거의 영광은 과거라서 유독 아름다운 것이다.
 
여행, 쉼과 성장을 동시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 (주)엔케이컨텐츠

 
길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행 내내 이 결혼이 최선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어쩌면 파리 여행은 탐탁지 않았던 결혼에서 해방되어 한 단계 각성하는 성장이었을 거다. 잘 쌓은 명성을 버리고 전업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뜬구름처럼 꾸다가, 진심 어린 충고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게 된다. 1920년대 헤밍웨이는 죽음이 두려우면 글을 쓸 수 없다며 단호히 말한다. 사랑을 죽음에 비유한 말이다. 열정적인 사랑은 죽음을 몰아내고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단다. 이 말에 동의할지는 관객 각자에게 맡기겠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라 영화의 모든 판타지가 아름답게만 보였다. 마지막 장면처럼 비 오는 파리를 걸으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즐겁기도 했다. 10년 만에 다시 본 영화는 그때와는 좀 달랐다. 세월의 흔적 때문일까. 마냥 행복감에 빠질 수 없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4년 후, 이번에는 시부모님과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두 번이나 찾았던 파리는 내게 최고의 휴양지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길에게 이입하며 인생 2막을 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여전히 쓰면서 살아가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앞으로 10년을 주기로 이 영화를 꺼내 보면 어떤 감정이 생길지 내심 기대된다.
 
여전히 동양인 차별이 존재하고 불어를 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얄미운 파리지앵의 도시 파리. 또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이번에는 혼자이고 싶다. 노천카페에서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대화에 열중인 사람들, 모든 거리가 하나의 예술품인 분위기,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전경, 한강 보다 작은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본 아기자기한 풍경 등.

파리를 다시 떠올려 보다가 주인공 길처럼 걷고 싶어졌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또 어떤 인연과 사건을 만나게 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일단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 끝에 닿을 때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미드나잇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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