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등장하는 억척빼기 상인 아줌마의 로맨스는 주로 '제비'과 남자의 사탕발림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사랑으로 그려지곤 하는데, 턱도 없는 소리다. 엄마 식대로 표현하자면 "남의 호주머니에서 돈 빼내야 하는 장사가 얼마나 영리해야 하는데" '제비' 따위에게 놀아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억척도 이런 억척이 없는 은희는 어떤 로맨스를 구가할까?  

나는 은희(이정은 분)와 같은 억척빼기 상인을 여럿 알고 있다(시장통에 들어서 보라. 이런 여성 상인은 어디서고 만나진다). 엄마의 단골이던 젓갈과 건어물을 팔던 점포 사장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살다보면 아픈 날도 슬픈 날도 있기 마련인데, 이 사장님은 한결같이 씩씩했다. 걸걸한 목소리는 우렁우렁 하고, 우리 엄마를 마치 자신의 엄마인 양 대하는 살가움은 또 어떻고.

나는 늘 이 아주머니의 에너지가 경이로웠다. 천성이라 단정했는데, 은희를 보며 내 판단이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프고 슬픈 날이 없었겠는가. 자기 앞에 들이닥친 삶이 너무 무겁고 무서워, 아프다 슬프다 할 겨를이 없었을 뿐인걸.

은희의 화양연화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양친이 돌아가시면서 맏이인 은희는 돌연 사남 일녀의 가장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에 나섰다. 이후 그의 말대로 돈, 돈, 돈하면서 제법 큰돈을 모았고, 빌딩을 올릴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억척같이 벌어 네 명의 동생들을 공부시키고 '누나 찬스'까지 줘가며 시집 장가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혼자다. 부자가 된 어느 날, 작은 어깨에 과하게 짊어졌던 짐을 모두 부리고 나서 돌아보니, 젊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끔은 "혼자 늙어 죽을"게 두려운 오십 줄의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은희에게도 "그때가 내 인생 피크였"던 화양연화가 있다. 눈부신 젊은 청춘이 있던 그때, 한수(차승원 분)를 만났다. 사랑했다.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의 운명처럼 은희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수는 자기의 길을 찾아 서울로 떠났다. 그런 한수가 돌연 삼십 년만에 은희의 눈앞에 나타났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수는 좌천이 명백한 전근 발령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은행 지점장이라지만, 그 나이에 어울릴 법한 노련한 연륜이 보이지 않는다. 축 처져 있고 불안정해 보인다. 그가 제주에 오자마자 찾은 여동생에게 염치없이 돈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의기소침이 급전에 대한 조급함에 있음을 알게 된다. 돈 때문에 궁지에 몰린 그는 왜 그렇게 많은 돈이 급히 필요할까.
 
한수는 기러기 아빠다. 골프 영재인 딸이 골프와 사랑에 빠지자, 딸을 프로 골퍼로 성공시키겠다는 큰 결심을 한다. 야망을 품고 딸과 아내를 미국으로 보낸다. 하지만 흙수저 은행원이 딸을 돈 먹는 하마라는 프로 골퍼로 성공시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일취월장할 줄 알았던 딸이 슬럼프에 빠지면서 한수와 한수의 가족은 위기에 처한다. 돈만 있다면 딸을 재기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돈만 빌릴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지경이다.
 
그런데 한수가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딸의 골프에 연연하는 동기엔 석연치 않은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그의 어릴 적 꿈은 농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언감생심이었다. 은행원이 되고 생활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은희처럼 든든한 가장 노릇을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흙수저 은행원이 학자금 대출 갚고, 많은 대출을 안은 채라도 서울에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면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다. 장남 하나 공부시켜 성공시키겠다고 "육지 나가 공장 다니며" 뒷바라지한 동생들을, 저 살기 바쁜 장남은 모른 체했다. 그리고는 제 잃어버린 꿈만 사무쳐, 더 많은 꿈을 포기했고 지금도 아등바등 사는 동생에게 갚지 못할 게 뻔한 돈을 빌려달라는 무참한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번번이 삶에 지는 것 같은 열패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마치 농구 선수가 되었다면 다른 삶을 살기라도 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것이다. 매번 미끄러지고 자빠지는 인생에서 어떻게 역전할 수 있을까. 그는 반전의 추를 자신에게서 딸에게로 이동시킨다. 골프 영재 딸이 제2의 박세리가 되어 자신의 꿈을 대리한다면,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한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자신을 속여가면서.

추레해진 한수가 절절히 돈이 필요할 그때,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첫사랑 은희가 부자이고 게다 싱글이라는 사실은 쥐구멍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을, 은희를 좇아 종종대며, 단란했던 가족의 사진을 감추고, 아내와 별거 중이라고 떡밥을 던지고, 첫사랑을 만나 설레는 은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은희의 돈에 구애를 시작한다. 친구끼리 추억여행이라고 둘러댄들, 오염된 동기나 저의가 감추어지겠는가.

다시 가슴 설렌 첫사랑, 그리고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한수의 의도를 모르는 은희는 잠깐 시간 여행 중이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지로 돌아온 그는 어느새 한수를 사랑했던 소녀가 되어 있다. 다시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화양연화란 얼마나 짧고 허무하던가. 이들의 밀월여행을 알게 된 고등학교 동창남들이 일제히 궐기해 은희에게 한수의 저의를 폭로하는 전화를 쉴 새 없이 해대면서, 은희의 로맨스는 산산이 조각난다. 그들은 마치 은희가 어리석기 짝이 없어 꼬임에 넘어가기 쉬운 아이라도 되는 양, 한수의 남루한 삶을 낱낱이 고해바친다. 절대 돈을 빌려주면 안 된다고 침을 튀기며 성토하는 것이 마치 친구의 의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유일무이한 우정의 표시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속내가 우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은희가 더 잘 알고 있다. 한수가 서울내기가 된 것도, 외모로나 직업으로나 어딘지 모르게 밀리는 감이 있는 것도 다 아니꼽던 이들은, 은희를 위기에서 구하는 척하며 못난 열등감을 드러낸다. 이들에게 은희가 누군가. 오십이 되어도 철 안 드는 동창남들에게 은희는, 어려울 때마다 위로와 돈줄을 대주는 누이이자 엄마다.
 
결국 이들의 관심사는, 오십이 될 때까지 죽어라 돈만 버느라 좋은 호텔에서 룸서비스 한번 시켜본 적이 없는 자신이 가여워 눈물 흘리는 은희의 상실감이나 허무함에 있지 않다. 단지 은희가 돈을 줬는지 안 줬는지, 은희가 한수와 잤는지 안 잤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은희가 모를 리 없다. 은희는 그들의 좌초된 인생을 건져내준 것이 누구인가를, 넘지 말아야 할 선 앞에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토록 우뚝한 은희가 내린 마지막 선택에서 나는 갸웃거렸다. 은희는 한수에게 왜 돈을 빌려주었을까. 자신의 화양연화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 은희가 보낸 돈을 한수가 되돌려 보냄으로써 이들의 화양연화는 지켜진 셈이다. 은희가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한수는 친구의 돈을 탐한 나쁜 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희가 보낸 돈을 한수가 거절함으로써, 아니 거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겨우 친구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리송해도, 은희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기란 힘들다. 자신의 책임을 한 번도 밀어낸 적 없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그어 놓은 금을 한 번도 밟고 넘어서는 일 없이, 삼십 년을 매일의 성실로 이루어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가족을 건사하고 친구들과 마을의 고령 해녀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면서, 공동체에 돌봄의 질서를 세우는 은희에겐, 참혹한 재앙에서도 번번이 딛고 일어서 삶을 일구어냈던 제주 여자의 피가 선연히 흐르고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아가는 은희, 그는 오롯한 제주의 여자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 제주 여자 이정은 소녀 가장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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