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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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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일생의 목표와 방향이 정해지거나 달라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동완은 배재학당에서 '민족주의계열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하나같이 향후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다. 

박동완은 배재학당 시절, 정동제일교회에 나가면서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 이필주 목사를 만났다. 이들은 1910년대 정동제일교회를 이끌었다. 뒤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이필주 목사와 기미년 독립선언에 서명하고 함께 옥고를 치뤘다. 현순ㆍ손정도 목사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었고 이후 박동완은 은밀히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박동완에게 영향을 준 목회자는 존스(1867-1919) 장로 목사, 최병헌(1858-1927) 제2대 담임목사(1903년 5월 -1914년 6월 시무), 현순(1879-1968) 제3대 담임목사(1914년 6월-1915년 3월 시무), 손정도(1882-1931) 제4대 담임목사(1915년 4월-1918년 5월 시무). 이필주(1869-1942) 제5대 담임목사(1918년 6월-1919년 2월 시무)를 들 수 있다.

서울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9년 2월 출판법을 공포하여 사전검열로 배일 출판물을 압수하고, 7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을 강탈한데 이어 9월부터 일본군의 대대적인 의병학살작전을 벌였다.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운명의 해 1910년 6월, 일제는 한국경찰권을 박탈하면서 일본 헌병이 한국치안을 장악하고, 8월 29일 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 설치된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 설치된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 CPN문화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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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부임하여 일제의 무단통치를 시행하면서, 한국인에게 공포감을 주고자 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의사를 이날 처형하였다. 

10월에는 구한국 왕족ㆍ고관ㆍ매국노 76명에게 일본작위와 전국의 대표적인 유생들에게 거액의 은사금을 주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신민회사건을 조작하여 이승훈 등 600여 명을 검거하는 등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박동완은 25세 때에 배재학당 학생 신분으로 망국의 치욕을 지켜보게 되었다. 

배재학당도 평온할 리 없었다. 1912년 말에 배재학당 대학부가 폐쇄되었다. 박동완은 배재고등학당에서 수학하고 1909년 10월이나 이듬해 10월(추정)에 배재학당 대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폐쇄조치로 졸업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박동완의 고난에 찬 생애에서 그나마 가장 행복했을 시절을 찾는다면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정동제일교회에서 현순ㆍ손정도ㆍ이필주 목사의 우국충정의 설교를 듣고 이들과 사귀면서 나랏일을 도모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 정동제일교회.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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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교역자들은 전인적인 인간구원을 향한 선교의 일환으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과 민족해방을 이루려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이들은 성직자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민족문제를 한 시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일제에 합병되기 이전 독립적인 국가의 위상을 알고 있고, 따라서 국권 회복을 염원하는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충군애국'의 유교적 실천윤리가 아직도 이들의 의식과 사상 체계의 심저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동제일교회의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 그리고 이필주 목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에 의해 지도된 정동교회는 그야말로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현순은 하와이에서 이민 간 동포들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들을 돌보는 목회 생활을 하였고, 손정도는 만주에서 생활하는 이주동포들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나라 잃은 한민족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체험을 가졌다. 한말 군인이었던 이필주는 외세의 침탈과 봉건 모순이 반영된 조선 백성들의 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민족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철저히 국권회복을 염두에 둔 책임 있는 교역자,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이것이 1910년대 정동제일교회의 민족운동을 이끌어간 교역자들의 논리가 되었다. 


주석
6> 오영교, 앞의 책, 제3권 자료편, 473쪽.  
7> 오영교, 앞의 책, 임미선, 앞의 학위논문, 31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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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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