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두 달 동안 빠지지 않고 하루에 한 개씩 버린 '1일 1폐'의 속도를 내기 위해, 9월에는 '30일 미니멀 게임 (The 30-Day Minimalism Game)'을 해 보았다. 유명한 미니멀리스트 조쉬 필즈 밀번(Joshua Fields Millburn)과 라이언 니코디머스(Ryan Nicodemus)가 그들의 홈페이지(https://www.theminimalists.com)에서 제안한 '물건 비우기' 방법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30일 동안 첫날에는 1개 둘째 날에는 2개의 물건을 버리면서 날수와 같이 숫자의 물건을 점점 늘려가, 마지막 30일에는 30개의 물건을 비운다. SNS에 #minsgame을 검색하니 10만 개가 넘는 사진이 뜬다. 9월은 마침 30일까지 있고, 날짜와 물건 개수를 맞추면 셈하기도 쉬워 9월 1일부터 시작했다.

1일 1개, 2일 2개씩 버리는 미션
 
한달간 1일1폐의 기록.
 한달간 1일1폐의 기록.
ⓒ 전윤정

관련사진보기

 
이 게임을 제안한 조쉬와 라이언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니멀리즘-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미니멀리즘-오늘도 비우는 사람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중학교 친구인 두 사람은 부모의 이혼과 가난으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앞만 보고 달린 그들은 20대 후반에 이미 남들이 선망하는 연봉과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고, 비싸고 좋은 물건들로 채워갔다.

그러던 중 조쉬는 어머니의 죽음과 이혼을 동시에 겪게 된다. 자신의 초등학교 숙제까지 가지고 있던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매일 딱 하나씩 버리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했다. 물건의 90% 이상 정리하고 나자 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만 남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더 심오한 질문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일까?"

친구 라이언은 천천히 조금씩 줄여가기보다 빠른 결과를 얻기를 원했기에, '포장 파티' 개념을 생각해냈다. 이사 가듯이 모든 짐을 상자에 싼 후, 3주 동안 필요한 짐만 그때그때 꺼내 쓴다. 3주 후, 물건의 80%는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들만 꺼내서 쓴 것이다. 그는 꺼내지 않은 물건이 든 상자째로 기부하거나 버렸다.
  
나에게 '포장 파티'는 무리인 듯싶어 '30일 미니멀 게임'을 시작했다. 숫자에 맞춰 버릴 물건을 찾다 보니 선반 한 칸을 차지하던 명절 때만 쓰던 물컵과 쟁반, 쓰지 않는 텀블러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상자 안에만 들어 있던 해외여행 기념장식품과 인형, 나무젓가락 등등도 정리했다. 가끔 숫자를 채우기 위해 전선, 세탁소 철제 옷걸이 등등으로 꼼수를 부리기도 했는데, 10번대가 넘어가고 20번대가 가까이 오면서 버려야 할 물건의 숫자가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오래된 편지를 모아둔 상자가 생각났다.

정리할 건 물건만이 아니구나

지금은 연락이 끊긴 사람들의 편지와 카드에 먼저 손이 갔다.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인연의 기한이 다 되었지만, 편지를 읽으면서 그 시절 그 시간만큼은 살아 있는 싱싱한 관계였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한 친구의 편지 더미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당시 애들이 어리고 사는 곳이 멀어 자주 연락하지 못했지만, 나는 생일날에는 축하 전화를 걸어 오랜만의 안부를 묻곤 했다. 지인의 생일을 미리 알려주는 SNS가 없던 십여 년 전에는 친구의 생일을 수첩에 적어 기억해야 했다.

한 번은 내가 축하 전화를 걸었는데, 이런 관계에 대한 친구의 지나친 농담에 기분이 상했다. 친구는 몇 달 뒤 내 생일에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건성으로 답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친구의 옛 편지 속에는 나의 취직, 결혼, 임신, 출산 등 중요한 때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 진심을 농담으로 받은 섭섭함만 있었는데, 어쩌면 나의 옹졸한 마음이 관계를 그르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서운함은 내 마음만 갉아먹었을 뿐이다. 옛 편지 덕분에 마음을 잘 봉합할 수 있어 다행이다.

9월 한 달 동안 1+2+3+…+28+29+30=총 465개를 비웠다. 밤에 편지함을 뒤지고 있으면 딸들이 "혹시 오늘도 편지로 때우시게요?"라고 물을 때는 계면쩍기도 했지만, '30일 미니멀게임' 아니었으면 편지 상자를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번에 전부 버리기는 힘들어서 '언젠가' 한 번씩 읽고 버려야지 하며 분명 미뤘을 테다. 하루에 채워야 하는 숫자가 있기에, 맞춰 정리할 편지를 고를 수 있었다. '래자불거(來者不拒)', 가는 사람을 쫓지 않으며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는 옛 성인의 말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다음 달에는 다시 '1일 1폐'로 돌아가야지 싶었지만, 왠지 감질이 난다. 숫자가 주는 통쾌한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물건을 버리기 시작한 후로는 탄력이 확 붙어버린 것 같아요", "한번 시작하니 멈출 수 없더라고요"라던 평범한 사람들의 인터뷰는 내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10월, '30일 미니멀 게임' 시즌 2가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https://brunch.co.kr/@monchou31)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중년의 둥지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50플러스 에세이 작가단 연재중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