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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신익희 후보를 애도하는 인파(1956년5월)
ⓒ 한국사진기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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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하자 측근들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는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의사는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라고 진단하였다.

5월 5일 어린이날, 유해를 실은 구급차는 궂은 비 내리는 이리→강경→논산→공주→금강→조치원→수원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가는 곳곳마다 서거의 소식을 듣고 뛰어 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오후 4시경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빗속에서도 수많은 시민들이 유해차를 둘러싸고 울부짖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청 앞 세종로는 인파로 뒤덮였다. 일부 시민들이 "유해를 경무대에 안치하자"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자"를 외치며, 중앙청→효자동 쪽으로 전진했다.

민주당 간부들과 측근들에 의해 유해는 효자동 자택까지 2시간이 걸려 어렵사리 도착했으나 경무대 앞으로 집결한 학생ㆍ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를 경찰이 제지하면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경찰의 발포로 여러 사람이 쓰러지고 사망자도 생겼다. 4.19혁명의 예고편이었다.

다음날 경찰은 '경무대 앞 충돌사건'으로 사망 2명, 부상으로 입원 18명, 경상자 8명, 경찰과 헌병대에 의해 검거된 사람이 700여 명이라 밝혔다. 구속되었다 풀려난 학생ㆍ청년들은 뒷날 '5ㆍ5의거동지회'를 조직하고, 이들 중 민주당에 참여하거나 학생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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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준비되다가 국회에서 국민장으로 치루기로 결의함에 따라 5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키로 하였다. 장례식이 늦어진 것은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대통령 당선이 유력시되던 신익희 후보가 서거한 뒤 실시한 투표에서 총 투표자 9백 6만 7천여 표 중 유효 7백 21만여 표, 무효 1백 85만 6천 8백 표, 기권 54만 표, 무효표와 기권표를 합하면 2백 39만 6천여 표가 신익희의 추모 표였다. 이승만 5백만 표, 조봉암 2백 16만 표를 두고 볼 때 그가 살아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능히 이승만을 압도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서울에서 이승만은 20만 여 표 밖에 안 되는데 추모표가 28만 여 표에 이르렀다. 살아 있는 대통령보다 죽은 후보의 추모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이다.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는 거뜬히 당선되었다.

유해가 안치된 효자동 상가에는 연일 조문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고인과 동향이자 한성영어학교 동창으로 국어학자인 이희승의 〈해공의 급서를 애통함〉이란 추도사는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1956년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의 민주당 신익희후보 한강 유세
 1956년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의 민주당 신익희후보 한강 유세
ⓒ 서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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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의 급서를 애통함  

어이! 어이!
해공 형이여! 신익희 형이여!

형이 가셨단 말이 정말이요? 참말이요? 호외가 잘못이 아니오? 오보가 아니오? 아아! 5월 5일 오전 다섯 시! 이 무슨 기구한 시간이며, 이 어인 얄미운 시간인고? 추야월(秋夜月) 아닌 초하(初夏)의 새벽에, 오장원(五丈原) 아닌 이리행(裡里行) 차 중에서, 우리 민중의 친구요, 미래의 대통령인 해공 신익희 선생의 장성(將星)은 그만 떨어지고 말았단 말인가? 떨어지되 어떻게 이다지도 허무하게, 그리고 이다지도 안타깝게 진단 말이요? 때를 가리되 어떻게 이다지 적종하게 그리고 이다지 원통한 때를 가리어 진단 말이요? 

형이 가신 일은, 형 일 개인에 관한 일이 아니요, 형의 가족의 애절에 한한 일이 아니요, 그리고 우리 동창과 친우들의 비통에만 한한 일도 아니요, 전국민 전민족이 호천곡지(號天哭地)하여 몸부림치는 줄을 알기나 하고 가셨나이까? 필부필부(匹夫匹婦)와 초동목수(樵童牧豎)까지라도 모두 형의 관(琯) 머리에 매어 달리려 덤비고, 형을 운구하는 길에 느끼어 눈물을 흘리며 뒤따르는 것을 보시고, 발길이 차마 어이 돌아서더이까? 

한강 백사장의 그 많은 군중을 둔연(頓然)히 잊어 버리고 가셨소? 무엇 때문에 수십만 군중이 형의 경해(警咳)에 접하려 하든 것을 잘 아실 것 아니오? 아마 형도 뒤에 남아 있는 우리의 비통 못지 않은 원한을 가슴에 품고 가셨으리라.

형은 신언서판을 구비한 호인물이었고. 늠름한 호걸이었소. 그러나 그 군중은 형의 풍채를 사모하였던 것이 아니오. 형의 구변에 매혹되었던 것도 아니오. 또 형의 필재를 애호하는 생각으로도 아니오. 물론 이러한 점도 전연 몰각된 것은 아니리다. 그러나 국가 민족에 대한 형의 분골쇄신적 충성, 통일ㆍ자유를 위한 형의 불요불굴의 금강심(金剛心), 시사(時事)ㆍ세정(世情)에 대한 형의 투철명석한 판단력, 이 모든 사실을 63세라는 형의 인생 노정(路程)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이 형을 암야(暗夜)의 명촉(明燭)과 같이, 미진(迷津)의 보아(寶我)와 같이, 노옥(老屋)의 지주(支柱)같이, 적전(敵前)의 철성(鐵城)같이, 믿고, 바라고 의지하였든 것이 아니었든가요? 

형은 이러한 민중의 신망과 의뢰(依賴)와 갈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60평생을 국내에서 혹은 해외에서 형극과 고초를 달게 여기며, 파란과 장애를 돌파하면서 초지일관, 철두철미, 불파불멸(不破不滅)을 계속하여 온 것이 아니었든가요? 민중의 여망이 어찌 우연의 소치이며, 일시적 흥분에서 나온 것이라 하리까? 

형은 일찍이 누구에게도 노색(怒色)을 보인 일이 없었소. 해활천공(海濶天空)의 대도량의 주인공이 아니시오?(……)

형의 지취(志趣)야 변할 리 있으며, 소관사(所關事)야 바뀔 수 있었으리까?(…) 한결같은 정치인으로서 호국 투사로서 시종일관하여, 필경은 야당의 대통령 입후보자로 출마하였다가 선거를 겨우 열흘 앞둔 5월 5일에 거연(遽然)히 급서하시다니, 모두가 꿈만 같고 거짓말 같소이다. 대체 이것이 무슨 일이요?  하늘이 이다지 이 나라 이 백성을 미워하고 박대하시는 것입니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형과 좀 더 자주 면접하였을 걸. 형은 국사(國事)를 위하여 안비막개(眼鼻莫開)하였었고, 나는 속무(俗務)에 시달려 골몰무가(汨沒無暇)한 탓으로 1년에 서너 차례 만나기도 쉽지 못하였든 것이요. 그러나 옛날 학창시대의 형의 언행거지(言行擧止)가 이제 새삼스럽게 눈 속에 되살아남을 절절히 느낄 뿐 아니라, 대인군자(大人君子)의 근자(近者)의 모습이 눈 앞에 생생히 나타나고, 그 정중 근엄한 음성이 고막을 쟁쟁히 두드리니, 진정 안타까와 견딜 수 없소그려. 지금 이 시각에도 형이 효자동 사저(私邸)에서 망중(忙中)에 흥겨워 하는 듯하며, 정당 사무실에서 대인접물(待人接物)에 파안일소(破顔一笑)로 담론에 열중하시는 듯 하구려. 

아무래도 형이 타계하였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고, 거짓말 같기만 하구려. 이 세상 어느 구석을 뒤지면, 형의 광안(光顔)을 다시 한 번 뵈오리까? 원통하고 억울한지고. 인생의 무상이여! 천도의 무심이여! 그러나 형은 잘 아시리다. 육신의 인간은 일시의 가탁(假托)이요, 심령과 이상이 영원의 생명인 것을. 계계승승(繼繼承承) 무궁히 걸어 오는 후래(後來)의 인간들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 줄 수 있는 정신과 주의(主義)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요, 또한 영생인 것을 형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리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달관하고 제시리다. 

부디 명목(暝目)하시어 선복(仙福)을 면면(綿綿)히 누리시오. 그리고 이 땅의 무리도 굽어 살피시오. 형의 이상을 이어 받들고, 형을 태양같이 앙모(仰慕)하여 마지않는 이 무리에게도 명우(冥佑)를 내리시오.

해공 형이여! 안면(安眠)하시라. 신익희 형이여! 어이 어이! 어이 어이!

                                                              1956년 5월 6일 

효자동 자택에 안치한 영구(靈柩) 앞에 엎드려 일석(一石) 아우는 원통히 곡하노라. (주석 3)


주석
3> 앞의 책, 778~7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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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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